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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표절='국가적 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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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논문표절='국가적 망신'?

Citisci의 '과학기술@사회' <21> 과학윤리 교육 부재가 더 큰 '망신'

새해가 밝은 직후인 지난 1월 4일, 우리나라의 신문과 방송들은 KAIST 박사 출신으로 캠브리지대 방문연구원을 지냈던 한 재료과학자의 논문 표절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네이처> 신년호의 머릿기사를 인용한 보도내용에 따르면, 그는 KAIST에 있을 때부터 주로 러시아어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을 표절해 자신의 연구결과인 양 발표해 왔으며 캠브리지에 간 이후에도 이런 행위를 계속하다 2002년에 원 논문의 저자에 의해 결국 표절 사실이 들통나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자주 볼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필자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번 보도를 눈여겨본 사람이면 모든 매체들이 입을 모아 이번 사건을 '국가적 망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필자는 이 점이 심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이 말에서는 마치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외국에 나가 지나친 쇼핑을 일삼아 '나라 망신'을 시키고 있다는 얘기와 비슷한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그런 식으로 규정하다 보면 과학에서 일어난 논문표절, 좀더 넓게는 과학에서의 기만행위(scientific fraud)가 갖는 의미에 관해 성찰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논문표절=국가적 망신'이라는 등식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오늘날 과학이라는 사회적 활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기술, 기만행위는 일상적인 일**

먼저 이번 사건이 '국가적 망신'이라는 얘기는,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행위와 인연이 없는 집단인데 우리나라 과학자들만 예외적으로 문제라는 식의 가정을 암암리에 깔고 있다. 단언컨대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논문 발표에서 실험결과를 날조, 변조, 표절하는 등의 행위를 일컫는 용어인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는 이제 과학계에서 점차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과학 활동에서 기만행위가 본격적으로 문제로 부각된 것은 1980년대 초였는데, 당시에는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계와 일반 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상당수의 국가들에서는 과학에서의 기만행위 문제를 관장하는 기구가 독립적으로, 혹은 기존의 연구지원기관 산하에 생겼고, 미국에서는 1992년에 기만행위에 대한 내부고발(whistleblowing)을 접수하고 이에 대한 조사를 전담하는 연방기구인 연구윤리국(Office of Research Integrity)이 보건복지부 산하에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는 점점 더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사이언스>, <네이처>, <뉴사이언티스트> 같은 저널의 뉴스 지면에서 이와 관련된 소식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가을에 밝혀진 나노물리학자 얀 헨드릭 쇤의 논문조작 사건은 그 이전까지 생물학이나 의학처럼 상대적으로 '말랑말랑한' 과학 분야에서나 일어나는 것인 줄 알았던 기만행위가 물리학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했던 <네이처>의 사설은 그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과학에서의 기만행위가 (나쁜 과학자가 아니라) 정신나간 과학자나 하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고 없다." 여기 담긴 씁쓸한 어조는 불과 20년 새에 크게 달라져버린 과학계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만행위 증가는 과학 활동의 상업화가 밀접한 관계 있어**

그리고 둘째로, 이번 사건을 '국가적 망신'으로 이름붙이고 나면 과학계에서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따져묻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말해 "과거에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았던 기만행위 사건들이 최근들어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뭘까?"와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지 않고 극소수의 '일탈적' 과학자들이 문제였다는 식으로 사건이 봉합될 공산이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는 좀더 생각해볼 문제다. 왜냐하면 기만행위의 증가는 과학 활동의 결과물이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소유한 전략적 수단으로 간주되고 과학 활동의 상업화가 급격하게 진전됨에 따라 과학계 내부의 경쟁이 극심해진 최근의 상황에 크게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계 내부의 경쟁 증가(최근 <네이처> 기사에 나온 표현을 빌면 이른바 '특종 경쟁')는 정보와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과 공유가 과학 활동을 지탱하는 기반이라는 과학자공동체의 고전적 이상을 침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넘기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과학자들이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인정받아 명성을 얻었던 과거와는 달리, 과학의 결과물 그 자체가 바로 돈이 되는 요즈음의 '첨단과학'에서는 과학자가 기업과 같은 스폰서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부와 명성을 거머쥐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경쟁의 증가로 빚어진 과학자들간의 불신과 함께 작용해, 과학연구 결과물의 질적 수준을 유지시켜 주는 장치인 동료심사(peer review)의 약화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과학계 내부의 경쟁은 개별 과학자들간의 경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저널들간의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기만행위 사건들에서는 문제가 된 논문들이 <네이처>나 <사이언스>와 같은 저명한 학술지에 다수 실려 충격을 자아냈는데, 학술지 편집자나 논문 평가자들이 심사과정에서 부정행위를 걸러내지 못한 것은 자기 저널에 소위 '섹시한' 연구결과를 먼저 실으려는 과학 저널들간의 경쟁이 작용한 결과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현재 제기되고 있다.

***과학윤리 교육 부재가 더 큰 '국가적 망신'**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은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를 과거와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을 둘러싼 사회적 여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급격하게 변화했고, 이제 과학은 백여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신사들이 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니게 되었다. 과학은 스스로의 오류를 자동적으로 교정하는 활동이므로 기만행위 따위는 발붙일 곳이 없다는 믿음(일부 과학자들이 아직도 고수하고 있을)은 오늘날 너무나 순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번 표절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변화한 상황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으며, 그 결과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나 연구윤리 문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자를 양성하는 학부 및 대학원 과정에서 연구윤리와 관련된 내용을 거의 교육하고 있지 않으며, 과학 전문학회들도 소속 회원들의 윤리적 행위를 강제하는 윤리강령이나 연구윤리상의 문제가 공식 제기되었을 때 이를 다루기 위한 윤리위원회를 거의 두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과학에서의 기만행위는 국내에서 거의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고 이와 유사한 부정행위가 과연 얼마나 행해지고 있을지에 대한 현황 파악 시도조차 없는 형편이다. 이번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던 대로 일종의 '국가적 망신'이었다면, 그건 아마도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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