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숨진 제주인·한국인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일본인들이 있다. 대를 이어 위령탑을 지키는 대마도 주민 에토 유키하루(62, 에토), 제주4.3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일본인 모임 '한라산회'의 고문 나가타 이사무(72, 나가타)다.
1950년 즈음, 4.3과 예비검속 포함 한국전쟁 전후 수장 당한 국내 민간인 학살자들의 시신들이 일본 대마도 해안가 곳곳에 떠밀려왔다. 전체 숫자는 수백 구에 이르고 일부는 손목과 발목이 철사·끈으로 묶여 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에토의 아버지 故 에토 히카루는 섬사람들과 손수 시신을 수습했고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고스란히 들려준다. 2007년 2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에토는 그해 5월 대마도 북쪽 '사고 만'(佐護 湾) 지역에 희생자 공양탑을 세운다. 사고 만은 떠내려 온 시신을 매장한 지역이다. 에토는 그 뒤로 가족과 함께 계속 공양탑을 찾아 영령들을 추모해왔다.
시간이 지나 2014년 5월 재일제주인 김시종 시인과 나가타 이사무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내 모임 '한라산회'가 대마도 '미네마치 오오미'(峰町青海) 지역에서 '제1회 제주도 4.3사건 희생자 대마도·제주 위령제'를 개최한다. 미네마치 오오미 역시 수장당한 희생자들이 발견된 장소다. 김시종 시인과 나가타 이사무는 2016년 5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를 통해 에토 집안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2018년 9월 16일 사고 만에서 에토와 함께 두 번째 위령제를 개최한다. 세 번째 위령제는 올해 9월 29일 사고 만에서 열렸다.
한라산회는 대마도 위령제 뿐만 아니라 2008년부터 4월 3일이면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모아 제주를 방문한다.
한라산회는 지난해와 올해 4월, 칠머리당굿보존회와 함께 제주에서도 위령제를 가진 바 있다. 지난해 대마도 위령제는 칠머리당굿보존회가 담당했지만 올해는 제주큰굿보존회가 맡았다. 4.3희생자유족회는 지난해 처음 대마도 위령제에 참석했다.
위령제를 하루 앞둔 28일 저녁, <제주의소리>와 만난 에토, 나가타는 국적에 무관하게 '사람된 도리'로서 위령제에 임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에토, 나가타 순)
"살아있는 한 아버지의 마음을 계승해 나가고 싶다"(에토 유키하루)
Q. 대마도에 표류해온 사람들 관련해서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A. 1950년 전후라고 설명하셨다. 확실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몇 개월 동안 시체가 떠내려 왔는데 200구는 넉넉히 수습했다고 기억했다. 처음에는 장작불에 화장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너무 많이 오면서 감당이 안돼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 발견 당시에는 경찰에 신고했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 주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무섭다고 나서지 않으면서 아버지가 지인 몇몇을 설득해 함께 수습했다.
A. 꽤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는지 부패하고 신체 부위가 부풀어있었다고 기억하셨다. 팔을 잡아당기면 팔이 통째로 쑥 빠지는 정도였다고 한다. 남녀 모두 있었다.
Q. 표류한 사체들 중에 제주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A. 아버지가 사체 옷에 한글이 쓰여져 있어 일단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시간이 지나 내가 (한라산회) 나가타상을 만나서 제주사람들의 사연을 접했다.
Q. 지난해 처음으로 공양탑에서 위령제가 열렸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A.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고 기뻤다. 탑을 세운 2007년부터 날씨가 풀린 봄날이면 아내와 함께 가서 공양을 지내고 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런 장면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올해는 한일관계가 좋지 않으니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민간 차원에서의 이런 교류는 정부 관계와 다르지 않겠나. 나가타상과도 의논했는데 희생자 위령제는 멈추지 말고 이어가는 게 좋다고 입을 모았다. 할 수 있는 한 매년 위령제를 열겠다.
Q. 어느덧 당신(62세)이 아버지 나이(80세 사망)를 따라가고 있다. 시신을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을 비춰본다면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하나?
A. 내가 아버지라도 분명 똑같이 나섰을 것이다. 이것은 국경과 소속의 문제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피해자들이 희생당해 여기까지 떠내려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자주 말하셨다. 한국인, 일본인을 떠나서 나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전라남도에서 태어나 2살까지 살고 대마도로 왔다. 조부모님이 한국에서 장사를 했고 아버지가 한국에서 태어났다. 공양탑 건립 과정은 사연이 있다. 어느날 스님 같은 사람이 아버지에게 와서 '시체를 많이 건드렸으니 공양탑을 세우지 않으면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시다가 2007년 돌아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스님이 다시 내게 와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래서 공양탑을 세웠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가 하는 말을 흘려들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 건강이 갑자기 악화된 2004년부터 자세히 내용을 전해 들었다. 본인도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겼는지 꽤 자세히 설명해줬다.
Q. 대를 이은 정성이 양국의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A. 우리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을 생각하면서 공양탑을 세운 것도 아닌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버지의 마음을 계승해 나가겠다. 다만 나 이후로는 누가 할지 걱정스런 마음도 있다.
"어둠 속에 묻힌 사람들의 운명은 살아있는 우리들이 책임져야 한다"(나가타 이사무)
Q. 2014년 대마도에서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한 계기는 무엇인가?
A. 2013년 마이니치신문 취재로 김시종 선생과 제주도를 방문했다. 일정을 마치고 제주공항을 떠나 간사히공항으로 가는데 김시종 선생이 '대마도에 가서 위령제를 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대마도는 가본적도 없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어디 있는 지도 몰랐다. 무척 의아했지만 선생은 진심으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2014년 1월 대마도를 방문하고 그해 5월 24일 위령제를 열었다. 대마도에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지만, 위령제를 계기로 현지에서 인연을 맺었고 지금까지 계속 함께 해오고 있다.
A.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았다고 증명을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마도에 떠밀려온 제주도민과 한국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으로서 존재를 말살 당한 것이다. 바다에 버려졌기에 증거도 없고, 살아온 일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살았다는 기억조차 상실된 채 남겨지는 것이 4.3사건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그렇게 버려진 사람들이 대마도까지 떠밀려 왔다. 이것은 운명이다. 그들의 운명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 위령제를 구체적으로 열자고 제안한 사람은 김시종 선생이다. 2014년 첫 위령제를 열고 대마도에서 선생과 가진 술자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본인은 1949년 4.3 학살에서 벗어나 밀항해서 오사카 마이코(舞子) 해변에 도착했다. 자기는 살아서 해변에 왔는데 도망갈 수 없던 사람들은 살해당하거나 예비검속을 받아 바다에 수장당해 쓰시마섬 해변에 왔다.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매우 고독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마도 살아남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김시종 선생은 다른 동지들이 살해당해 쓰시마로 떠밀려왔다는 사실에서, '내가 어둠 속에 묻힌 희생자의 위령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배경으로 내게 위령제를 제안했는데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선생에게 '왜 내가 (위령제를) 해야하냐'고 물어봤었는데, '넌 위령제 여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냐'고 대답했다.(웃음)
Q. 대마도에 떠내려 온 희생자에 대해 아직까지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없다. 제주도청이나 4.3평화재단, 4.3유족회가 위령제를 크게 지원하지도 않는다.(4.3평화재단은 올해 위령제를 위해 버스 대여 차량을 지원함. 편집자 주)
A. 2014년 첫 위령제는 애초 진정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열었다. 그렇게 시작했기에 누가 지원을 하나 안하나 관심 없다. 추모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안와도 된다. 이것은 나와 한라산회의 일관된 입장이다. 2018년 공양탑에서 처음 가진 위령제에 참여하기 위해 한라산회 사람들은 한 사람 당 5만엔 씩 부담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예산이 나오면 오고, 안 나오면 안 오는 태도는 안된다. 오늘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님도 공감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도저히 비용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사정도 이해는 간다. 어쨌거나 일본 쓰시마 위령제는 많은 상징성을 지닌다.
Q. 한라산회는 4월 3일이면 꾸준히 제주를 방문해, 도민들에게도 어느정도 익숙하다. 4.3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됐나.
A. 50대 나이에 김석범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읽었다. 딱 소설 내용 정도만 4.3에 대해 알았다. 제주로 가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던 중 2008년 4.3 60주년 때 평화연수 운동을 하는 친구로부터 위령제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처음 제주를 방문했다. 50명 정도 모여서 갔는데 그 멤버를 주축으로 한라산회가 탄생했다. 지금 한라산회는 120명 정도다.
Q. 당신에게 4.3은 무엇인가. 그리고 김시종 선생은 어떤 존재인가.
A. 60주년 위령제 현장에서 느낀 감격은 책으로 4.3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희생자가 3만명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피부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1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유족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제주에 다녀오고 나서 4.3사건에 대해 내가 어떤 입장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4.3사건에서 배우고 일본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2010년 참석한 4.3 전야제에서 김시종 선생의 시 낭독을 접했다. 큰 충격을 받고 '이 사람이 누구지'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수소문하면서 오사카 자택으로 찾아갔다. 그게 인연이 됐다. 김시종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 말이 너무 많아진다. 확실한 것은 난 김시종 선생의 영원한 2인자다.(웃음)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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