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역사학자 박노자 교수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양심선언을 해 수감중인 강철민 이병에게 장문의 격려 편지를 보냈다.
17일 발행된 진보적 시사 격월간지 <아웃사이더>에 실린 '강철민 의사(義士)'에게란 제목의 박노자 교수 글을 <아웃사이더>의 양해를 얻어 전문 게재한다. 박노자 교수는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으로도 활동중이다. 편집자 주
***강철민 義士에게**
강철민님, 안녕하십니까?
이 편지를 쓰기 직전에 강철민님의 공판 소식을 2003년 12월17일자 「한겨레」에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제 눈을 의심했지요. 판사가 취조하듯이, 6ㆍ25 동란 때 전사한 미군의 숫자를 아느냐, 왜 우리가 미국에 진 빚을 갚으려 하지 않느냐, 따졌다면서요? 그야말로 눈을 의심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오늘날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켜 주고 다시 일으킨 은혜’)에 감읍하고 대대로 그 ‘은혜로운’ 명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졌던 조선 시대도 아닌, 국가 간의 관계가 늘 냉정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상식으로 돼 있는 근대 시기인데, 어찌해서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이토록 조선 시대의 냄새를 풍기는 수사에 집착을 하지요?
사실 “진 빚”을 들먹이는 것은, 꼭 조선 시대에 명나라 황제들의 위패를 모신 만동묘(萬東廟,1703년 창립)에서 제사 지냈던, 그 구수한 ‘전통적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시절만을 연상시키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광수 등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1930년대 말부터 “조선인들이 꼭 황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에 무한한 충절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광분했을 때, 바로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지켜 준(?) “대일본 제국”에 대한 “도덕적 부채”를 늘 들먹였기 때문이에요. 한국 보수파의 가장 큰 내부적인 모순이란 무엇인가 하면, 말로는 ‘사대주의’와 ‘친일’을 당연히 부정적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가미된 일제 시대의 토착적 예속 엘리트의 ‘특등의 일본인’(즉 ‘외지인’임에도 ‘내지인’보다 천황폐하를 더 잘 모시는 ‘모범적 황국신민’) 콤플렉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물론 백악관을 향해서 궁성 요배(遙拜)를 하지 않고, 그 노예적 심성으로 황국신민 서사를 능가할 수 있는 「조선일보」의 논설을 외우고 다니지 않지요. 그럼에도 그 근본적 심리가 크게 바뀐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판사의 그 놀라운 대미 충절(?)도, 남한이라는 반공 국가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중심 국가에게 진 빚을 개개인의 모든 남한인들이 그 몸을 총알받이로 바쳐서라도 갚아야 한다는 그 끔찍한 국가주의적 사고방식도 눈길을 끌지만, 또 하나 그의 재미있는 발언은 "본인에게 파병 명령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느냐?"라는 것이었어요. 본인이 아닌, 정권과 군 당국의 기만적 선전에 속고 높은 월급의 유혹을 참지 못할 또 다른 가난뱅이가 총알받이로 나간다면 본인은 남의 일로 여기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안창호나 전명운처럼 미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초기의 도미(渡美) 한인들이 독립 운동에 나선다는 것은 바보짓 이상으로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본인이 살고 있는 미국이 아닌, 본인이 이미 떠난 먼 조선을 일본이 삼켜 버린 것인데 본인이 왜 나섭니까?
참 재미있는 것은, 겉으로는 늘 멸사봉공 등의 전근대적 표어를 내세우는 한국 국가주의적 보수주의는, 실제로는 전근대적 사대부들의 도덕관과 정반대가 되는 거의 무한한 이기주의와 보신주의에 심성적으로 기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보수파의 원조들인 일제 시대의 토착적 예속 엘리트들이 ‘시국 강연’을 돌면서 “한 사람처럼 다 황군에 입대하자”고 외쳐도, 본인까지 입대하려 하지는 않았거든요. 장담컨대, 이라크 파병안을 주장하는 국방부의 관료들이나 국회의원, 조중동의 논설위원들도 본인의 아들이나 친척을 그 죽을 곳으로 보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를 위한 희생”을 쉴새없이 강조하면서도 본인은 몸을 살짝 피하고 국가의 전능(全能)으로 인한 혜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의 식민성, 약탈성이 뚜렷해 보이는 진면목입니다. 참, 최익현과 같은, 자신의 몸을 정말로 돌보지 않는 전근대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을 요즘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할 걸요. 김구가 바로 이와 같은, 진지한 보수주의의 유형에 속했지만 김구의 비극적인 운명이 한국 보수주의 전개의 방향을 잘 보여 주었지요.
그 이라크 파병이라는 희대의 망동만으로도 민중의 역사적 심판을 받아도 마땅할 극우적 관벌(官閥)로부터 지금 재판을 받고 계시니 어이가 없으시지요? 그런데, 제국주의적 살육을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본인에게 제일 어려우면서도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효과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라크 침략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닮아 가는 베트남 침략 때의 미국을 생각해 보시지요. 그때 수백만 명이 각처에서 참여했던 데모들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징집 명령을 거부한 수만 명의 미국인이 보여준 ‘직접적 행동적 저항’, 그리고 거기에 더해 베트남 주둔 미군 안에서 일어난 여러 불복종 사건들은 군 당국과 백악관에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지요. 징집 명령 거부 때문에 아예 캐나다로 이주해 버린 사람만 해도 그때에 5만 명에 달했습니다. 가정을 등지고 외지로 가는 것은 개개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그 ‘행동적 저항’의 최종적 결과가 그래도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베트남에서 패주한 미제는, 그 후에 약 15년 동안 몸조심(?)을 해서 대규모의 침략 전쟁을 하지 않았거든요. 1980년대 말에 동구권이 흔들리고 나서야 걸프 전쟁이라는 큰 규모의 학살에 나선 것이었지요. 이란의 이슬람 혁명(1979)이나 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1979)하는 등 미국의 예속 국가들이 반미 운동에 성공했을 때도, 베트남 전쟁 패배의 경험을 기억했던 미국이 침략을 감행하지 못하고 경제 제재와 친미 세력의 지원에 그치고 말았지요. 이것은, 예컨대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민중의 무장 저항과 양심적 미국인, 서구인들의 반전 행동이 결국 미제의 패배에 기여했던 것처럼, 이란과 니카라과 등지에 있는 수십만 명의 잠재적 희생자들을 구제한 것이었지요. 이라크 침략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작금의 이라크 저항 세력의 성공적 투쟁,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 가는 미군의 패색으로 봐서는 그럴 것 같지 않지만, 만일에 미국에 의한 이라크의 식민화가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시리아나 이란, 아니면 이북이 그 다음의 희생자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에요. 그러나 미군이 다시 패배를 당하면 그 다음 침략 저지르기가 훨씬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늘의 반전 행동은 내일의 이란인, 시리아인, 그리고 이북 동포와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지요.
물론 침략의 주범이 미국과 영국이기에, 바로 그곳에서의 양심적 행동들이 이 침략의 중지에 가장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 정권이 깊이 절하면서 바치는 3천 명의 총알받이들이 이라크로 가거나 말거나 미국 침략의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파병 반대의 행동은 우리에게 지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천문학적인 무역 적자와 외채에 휘청거리면서 발악적인 침략 전쟁과 유전 약탈에 마지막 기대를 거는 미국 패권의 상대적인 약화, 유럽 연합이나 중국의 입장 강화와 한-중 무역이 한-미 무역량을 능가한 사실이 반영한 한국 대외 경제 관계의 다변화, 햇볕 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 등 최근 대두되는 일련의 경향들에 힘입은 한국은, 지금이야말로 대미 예속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호기를 만난 것입니다.
미국의 파병 요청(말이 좋아서 ‘요청’이지 실제로는 일종의 ‘협박투 명령’이나 다름없었지요)에 "아니오"함으로써 독립(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주요 경쟁자로 부상하는 유럽연합/중국측과 미국측에 대한 등거리 관계 수립)을 선언한다면 미국으로서 대북 침략 계획하는 것도 많이 힘들어질 것입니다. 과거 만만한 한국에는 침략 동참을 쉽게 요구할 수 있었지만 독립을 선언할 경우 한국의 위신이 결정적으로 달라지거든요. 그러나 미국의 명령을 순순히 들어 총알받이를 바친다면 차후의 대북 제재나 침략에의 동참 요구에 미리부터 파란 불을 켜 주는 꼴이 되지요. 그러한 측면에서는 파병 반대의 투쟁이 도덕적인 최상 명령, 즉 살육 거부의 본능에 따르는 일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약해져 가는 패권 국가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발악적 전쟁을 일으키려는 오늘날에는, 예속 관계의 청산과 독립만은 살 길입니다.
강철민님, 지금은 비록 힘드시겠지만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 때만 해도 장준하나 함석헌과 같은 극소수의 선각자만이 살육에 반대할 수 있었던, 군사주의에 매몰된 과거의 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군사주의 반대가 전체적 민중 운동 속에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고, 군사주의와 대미 예속의 각종의 폐단에 대한 의식이 넓어져 갑니다. 강철민님의 의거(義擧)가 이 의식이 더 확산되는 하나의 계기가 됐습니다. 님을 비방하는 우민(愚民)의 수도 아직 적지 않지만 님의 행동을 보고 ‘미국’과 ‘전쟁’의 문제에 대해서 진정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더 많습니다. 바른 일을 결행한 한 사람의 감방 생활의 어려움은, 결국 많은 이들의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하루하루 좋은 날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캄캄해진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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