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액정 필름, 옷장 제습제, 참치캔과 즉석죽과 몇 가지 컵밥, 냉동 돈가스, 어린이 영양제, 여름 원피스와 샌들, 액상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 조립식 5단 책장, 그리고 인터넷 서점에서 구매한 책 네 상자와 각각 낱권으로 도착한 책 세 권.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할 즈음에 주문해서 받은, 지난 일주일간 도착한 택배들이다. 가장 무거웠던 건 가로 600센티 세로 350센티의 5단 책장, 가장 가벼웠던 건 한 권짜리 책. 가장 늦게 배송된 물건은 주문한 지 5일 만에 도착한 여름 원피스, 가장 빨리 배송된 건 주문 다음 날 도착한 참치와 컵밥. 소파에 편히 앉아서, 혹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주문한 물건은 대부분 이삼일 안에 집 앞까지 신속 정확하게 배달되었다.
<까대기>(이종철 지음, 보리 펴냄)를 읽기 전까지는 인터넷 쇼핑에 뒤따르는 택배 서비스는 내가 지불한 배송료나 물건 값 안에 포함되었으므로 당연히 누려야 할 편의와 권리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뀐 건 아니다. 다만 물건을 '사다'와 '받다', '보내다'와 ' 받다' 사이에는 엄연히 인간의 노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까대기'는 택배 상하차를 의미하는 말이자,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표현이기도 하다. 만화가가 꿈이던 작가가 상경해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한 일이 바로 까대기였고, 그때 기록한 이야기를 만화로 만든 책이 바로 <까대기>다. 작품에서는 작가 이종철이 아니라 '이바다'라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서울로 올라온 이바다의 삶은 녹록지 않다. 서울의 삶이, 무릇 이 나라 청년들의 삶이 그러하듯 생계와 꿈, 직업과 미래를 만드는 시간은 혹독한 대가를 담보로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바다 역시 방값과 생활비를 감당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일이 필요했고, 다행히(?!) 최저시급보다 2000원 더 많은 '알바'를 찾게 된다. 아침 7시부터 네댓 시간 정도 일하면 한달 80만 원을 버는 일, 최소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돈과 꿈을 이루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 일. 그렇게 시작한 일이 까대기였고, 그 일을 6년 동안 하게 된다. 생활비가 빠듯해 알바를 더 하면 만화 그릴 시간을 잃게 되고, 잠을 쪼개 꿈을 좇다 보면 생계를 위한 매일의 노동이 더욱 힘겨워지는 쳇바퀴를 무던하고 성실하게 견뎌낸다. "견디는 방법은 그저 버티는 방법밖에 없다"(238면)는 이바다의 읊조림은 작가 이종철의 목소리이자 우리 모두의 흔한 혼잣말이어서 그 울림이 새삼 깊다.
이뿐인가. 이바다가 만나는 무수한 인물들, 주로 택배-물류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삶이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준다. 식당 주인, 유도 선수, 은행원, 도박꾼이었던 그들이 택배기사를 하게 된 경위라든지, 까대기를 하는 공무원 준비생, 학원강사, 불법 취업 외국인 노동자들과 화물차 기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사연 없는 이가 없고, 고단하지 않은 삶이 없다. 그들의 어깨에 놓인 일상의 무게는 시시포스가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바위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 살기 위해 일을 한다. 땀을 흘리면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일을 한다. 비가 와도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폭염과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일을 한다. 잠시 쉬었다 가도 이내 다시 레일 앞에 서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짐들을 '까대기'한다. 그런데도 "아파서도 안 되는 시급제 알바"(177면)는 끊임없이 되묻는다. "저도 쓸모가 있겠죠?"(77면)라고.
<까대기>가 만화의 형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과 그 노동의 가치와 숭고함에 대해서 얼마나 잘 다뤘는지는 이미 여러 지면에서 거론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 잠식한 비윤리적인 물류 시스템이나, 특수 고용직과 비정규직, 시급제 알바의 부당한 노동환경, 인력을 갈아 넣어야만 유지되도록 진화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잘 묘사했다는 칭찬도 마치 군더더기 같다. 책의 부제인 '택배 상자 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라든지, 맨 뒷장에 적힌 일곱 명의 추천사만 보아도 <까대기>가 독자에게 건네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바다가 진짜 만화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꿈이나 희망이라는 단어와 맞닿아 있다면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도. 그러니 이바다가 만화가가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부사를 붙여주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혹독한 6년을 잘 버텼기 때문에, 그 시간을 잘 견뎠기 때문이니까. 그러므로 주저 없이 큰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이바다의 고민은 무용과 유용의 잣대 앞에서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위태로운 현실과도 맞닿아 있고, 이바다의 일상은 존재 이유가 노동력으로밖에 치환되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쓸모없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과도 닮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쓸모'를 의심하는 청년의 하루하루는 너무 내 이야기 같고, 너무나 우리의 모습 같다. 그러니 뜨거운 박수는 다치지 않고 열심히 일한 까대기 이바다를 향한 박수이자, 헛된 희망이라며 섣불리 포기하지 않고 근성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무수한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박수이자, 한 권의 만화책으로 이 많은 이야기를 시종일관 따뜻하고 담담하게 만들어낸 작가 이종철을 향한 박수이자, 오늘도 지치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는 당신들을 위한 박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저 당신들이 고맙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먹을 것과 입고 신을 것, 생활용품과 책 등을 손쉽게 사들일 것이다. 현관 앞에는 당연히 택배상자가 계속 놓일 것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택배상자를 뜯을 때마다 무수한 이바다를 떠올릴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질 때까지 이 택배상자를 건네고 받았을 무수한 당신들을 떠올릴 것이다. <까대기>에 등장하는 우리를 닮은 수더분한 당신들, 피로와 고단함이 켜켜이 쌓여도, 다시 웃고 다시 힘을 내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꿋꿋하게 일을 하는 당신들을.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릴 것이다.
"모두들 몸과 마음도 파손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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