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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형식은 NO, 이제는 내용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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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형식은 NO, 이제는 내용의 시대"

한 사회학자의 '우리식 유교'와 씨름하기<3>

***내용이 살아있는 형식이 되려면...**

내용이 더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할 때, 우리사회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부분들을 몇 가지 언급하기로 한다.

***관혼상제에 대하여**

주자학의 형식주의를 말할 때 그 대표격인 관혼상제의 격식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에까지 대대로 우리에게 짐이 되고 있는 이런 제식절차가 그동안 많이 간소화되긴 했지만, 아직 혼수문제가 발단이 되어서 이혼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 절차의 맹독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전통문화가 좋은 것이면 전수될 필요가 있으며,문화적 정체성을 찾는다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면사포 쓰는 예식후에 전통혼례가 폐백절차의 모습으로라도 남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결혼식이 획일화되고 더욱 상업적으로 물든 상황 - 우리사회에 아직 획일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에서도, 결혼 당사자들이 어떤 주관에 의해 개성을 가지고 선택하는 문화가 서서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저 반가운 생각이 든다.

"요즘은 약아서 집을 마련하고 혼수비용 아낀대요, 예식장비용은 무슨... 그냥 어디서 간단히...또는 그냥 신고만 했는데 잘살아요...신고도 안하고 사는데 잘 지내요...축의금은 사양합니다." 기타 등등

이런 식으로 추구하는 문화의 다양성은 인간 개개인의 사고방식을 세우는 데도 도움이 되고, 형식보다 내용에 충실한 쪽으로 가는 사회의식들이라서 반갑다.

이때 '문화적 전통'에 따른 예식이라 하더라도, 문화적 내용이 충실해지는 모습이 되면 더욱더 좋을 것 같다. 가령 폐백은 하되 시어른만 할 게 아니고, 양쪽 어른께 그간 어른으로 키워준 공을 감사드리는 정도로 한다면, 결혼제도라는 형식에 문화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더 충실해질 수 있다.

죽은 후에 가문의 영광을 보여주려는 작업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에야 사고가 깨인 분들이, 사후에 납골식 묘를 선호하는 작업이라던지, 사체의 사후기증까지 범인의 선을 넘어선 멋진 선택들을 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전체적인 중산층에 이런 것들이 더욱 전해져야 하고 또 이때 납골당을 지어도 조금 더 우리나라식으로 된 문화적 포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사의 축문이란 것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글들을 읽고 들으면서 이 세상을 떠나신 이를 그리는 마음이 잠시 되어보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 일일 것 같다. 무슨 뜻인지 느낌이 오지 않는 한문의 축문은 도통 알수 없는 외래의 말처럼 느끼게 되어 참가자들의 공유된 분위기를 깨게 된다고 생각된다.

또 가족전체가 돌아가신 분을 추모한다는 분위기가 잘 느껴지는 제식에는, 차린 음식도 고인이 좋아하시던 것을 쓰면서 지방특유의 제사음식을 몇가지 추가하는 정도로 좀 더 내용에 충실한 것이 되면 좋겠다.

전통제식의 모습들을 보면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하면서 대대로 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가문주의적 사회구조와 형식주의적인 사고방식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떤 일이 가문의 이름으로 진행될 때, 다른 가문이 어찌 생각할까 하는 일반화된 시각들이 들어가고, 또한 형식주의적인 주자학바탕은 제식에 내용보다 형식을 강조하게 했다.

이제 우리가 사는 이 핵가족화된 사회 그리고 개인적 시각이 중요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제식이라도 그 내용을 보다 충실히 할 기회를 이미 갖게 되었다. 단지 우리의 제식행위가 하나의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래서 내용이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생명력있는 중산층 문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 또 다른 바램이다.

***향락산업과 '자연스런 즐김'의 거리감**

우리나라에 술집, 노래방, 여관이 많은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특이한 현상이다.

서구사회의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하려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놀라는 점이기도 하지만 비단 그들의 놀란 눈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향락사업의 번창 밑바닥에 원인을 집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선 기업의 접대비문화라는 것이 이들을 키운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지만, 또한 그동안 금욕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주자학계통의 우리식 유교사회에서 마냥 억눌려 왔던 성문화나 쾌락문화가, 하나의 반작용으로서 또는 하나의 촉매작용을 하면서 이 향락업을 키운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런 향락업의 대상이 최근에는 여성, 청소년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경우, 인터넷과 매스컴, 여행 등을 통해서 서구문화나 일본문화를 접하게 되고 이를 그대로 유입함으로서 더욱 더 성문화의 개방을 가져 왔다.

이때 간과하기 쉬운 점이 바로 우리 문화와 일본 문화와의 근본적인 차이다. 일본은 그들의 바탕이 된 양명학적인 생각과 또 후에 그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화 탓으로, 성을 '자연스런 본성', '즐거움'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생각하게 했다.

게다가 그들의 성은 그들 특유의 '칼의 문화'에서 오는 폭력성과 미학추구와 맞물려 더욱 발달되어 있다. 일본에 대한 문화비평으로는 <국화와 칼>이라는 일본문화를 파악한 고전에 속하는 책에서뿐 아니라, 쿠로사와라는 감독의 <난(亂)>이란 영화를 보고 쓴 -"미학으로 치장된 비사실성"에 대한- 프랑스 영화비평가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전쟁을 그린 이 영화에서 싸움터에서의 사실성이 배제되고 아름다움으로 치장된 미학으로 포장된 것이라는 그의 평을 보면서, 일본문화를 잘 파악한 글이라고 생각되었었다.

어쨌건 일본의 미학과 폭력적인 시각이 잘 '포장된' 포르노문화를 알게 모르게 수입하고 있는 형편이 되어 버린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그 감상자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화적 감성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성문화는 감추어지기만 했고 터부시되었다. 이는 앞서도 말했듯이 주자학적 사고에서 나온 금욕주의가 이루어낸 풍습이겠지만, 조선 그 이전시대에 더 누렸다고 보이는 성적인 자유로움은 하나의 사회적 타부로 만들게 되었다. 기껏, 가부장제에 따라 또는 권위를 가진 양반계급의 남정네들이 기생들과 첩을 둘 수 있었고, 규방의 규수에게는 겹겹이 옷들이 입혀졌다. 양반과 평민의 갓의 크기가 서로 달랐듯이, 물론 안방마님에게도 옷의 색깔에까지 세세하게 형식화되었던 것이 바로 주자학적 사고였다.

우리사회에 '즐길거리'들이 없다는 것도, 그 원인은 금욕주의적이었던, 또는 어른과 아이들을 구분시킨 거리감을 키운 유교적 생각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동안 터부시되어왔던 유교적으로 감취진 성문화에 반기를 든 사고방식, 성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고 사랑의 행위일때...라는 생각은 어쩌면 현대인의 당연한 요구라고 보여진다.

향락업과 상관없이, 성 자체를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 들이려는, 한동안 일어났었던 '아우성운동'같은 흐름은 현대 우리사회에서는 하나의 인권운동이라고 보아진다. 또한 요즘은 여성들이 생리를 떳떳이 말하는 분위기가 되어가는 것도 이런 여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라는 측면에서 적극 환영할 일이다.

이러한 자연스럽게 성을 다루기운동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성과 자본주의의 만남, 즉 산업화된 성 때문에 오히려 일어나는 인간성 파괴라는 문제를 안고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성적인 것을 매개로 (도구로) 해서 값이 지불되는 일이 성행하는 것을 더욱 담론화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대를 잇기 위해서만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동물들과 달리, 성욕구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언제라도 진행되는 신경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윤리적 불감증에 의해 또는 자신이 쉽고 빠르게 돈을 버는 일에 '몸을 제공하는'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면, 이러한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문화는 문제성이 있는 사회이고 결코 성의 해방이 아니라 성의 물질화라 하겠다.

게다가 일본이나 서구사회에서는 아동문제와 더불어 문제성을 안고 있는 이 산업... 그 산물들이 우리 사회를 침투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나라가 IT강국이고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적이라 하지만, 그 내용에서 성인물유통이 전자오락과 함께 중요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음 또한 세계적이라 함을 볼 때, 그냥 간과할 문제는 분명 아닌 것 같다.

성의 해방과 성의 산업화사이에 끼인 세대. 그것이 또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고, 그래서 개개인들은 용의주도하게 성장하는 성의 산업화에 필터를 넣고 걸러서,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성이라는 입지를 방어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오염된 또는 오염시키는 물결을 타지 않으려면... 개개인들은 이제 일상에서의 매체선택부터 이성적 판단을 끊임없이 내려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현실적 감각을 교육해야...**

우리나라에서 각종 현실적 현재적인 사회문제들을 되집고 생각해보는 교육시간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지만, 사실 교육 커리큐럼을 짤 때 왜 현실적 감각을 가지고 만들지 않는 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보이는 겉핧기식의 역사교육은, 가령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연대별로 외우고 중요사건 나열하고 그것 암기하고 하는 식이다.

이에 반해서 현실적 역사교육이란 사건의 배경에 깔린 사고방식을 토론하고, 또 어떤 대안책을 찾아서 더 나아가는 방향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왕따문화'가 학생들간에 문제라면 그에 대한 토론과 교육이 사회시간에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실제적이 아니고 또한 가정에서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사회문제가 밖으로 표출될 때마다 넋놓고 바라보기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회변동이나 시스템으로서 사회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학교나 교육제도라는 것이 기존의 체제를 지키려는 보수성이 있다고 한다. 그 나름의 돌아가는 시스템이 윤활유를 거부한다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바꾸기 어렵다면, 대안교육이니 실험교육이니 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교육에 임하는 사람들에게 권위주의를 없애는 여러 대안을 실천하게 하고 현실적으로 교육 커리큐럼을 운영하도록 하는 의식개혁을 조금 더 했으면 좋겠다.

배운 사람들이 몸담고 있는 곳이어서 오히려 이런 운영의 현실화를 하게 되면 여러 사회갈등이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계가 움직여서 더 윤활유를 붓고 스스로 자정하고, 권위요소를 줄이고 교육을 현실적으로도 이루어지도록 그 운영체계를 조정해야 한다.

현재의 교육현장의 모습이란, 학생, 선생, 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어서 오로지 학생 장래의 일자리를 찾기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듯하니, 그저 이런 교육현실을 대할 때 암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우리나라 중고생들은 논설문을 써도 대학시험준비용으로 쓴다. 자신의 진정한 생각이 학교에서 토론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주고 받고 하면서 생각키우기를 할 수 없는 체제다. 사설교육으로 받는 논술지도는 전형적인 틀이 있고, 또 이를 통해 하는 논술은 반짝세일처럼 일회적인 효과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진지하게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발전시킬 주고받는 시간이 거의 없다.

생각주머니를 한창 키워야할 학생들이, 장래라는 효율성에 의해 학교와 가정에서 어른들에게 유도되어 있을 때, 자율성, 창의성, 타인에 대한 배려, 사회적 책임감등은 키워질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러한 덕목에 대한 실질적인 공부가 중시되어야 사회전반에 대화나 토론문화가 성숙된 모습으로 변할 것 같다. 우리나라 국회의 민주적인 토론문화나 진행이 매끄럽지 못한 것을 해결하려면, 사실 초등학교부터의 교육 커리큐럼에서 부터 그 원인을 찾을 것 같다.

필자의 애들이 다니는 캐나다의 공립학교 예를 들어보면, 한국과 비교해서 시설도 낙후된 것 같고 재정도 그리 넉넉지 않지만... 애들의 공부가 단기적인 효율성에 목표를 두지 않고 개성과 창의성키우기에 두는 것 같고,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여러 가지 사회의식 프로그램의 운영이 참으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본다.

한국의 교육행정가들이 진정 배워야 할 것은 교육학적 이론에 의한 학위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돌아가는 교육현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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