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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초원으로 떠났다...은하수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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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초원으로 떠났다...은하수가 쏟아졌다

[프레시안 공정여행①] 내몽골 자치구와 베이징, 촨디샤 마을

독자·조합원과 함께하는 프레시안의 첫번째 공정여행의 목적지는 내몽골이었습니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고 게르에서 잠이 드는 일부터 드넓은 초원에서 말을 타고, 몽골인의 집에서 말똥을 태워 치즈를 만드는 일까지 낯설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10여년 전 '공정여행'을 창안해 지금까지 소개해오고 있는 작가이자 여행가인 최정규 교수가 기꺼이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내몽골 타이푸스치 평원 일대를 시작으로 베이징을 거쳐 중국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촨디샤 마을까지 여행했습니다. 그 여정을 소개합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5시간 쯤 달리자 평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톨게이트 같은 간단한 경계를 넘어서자 내몽골이라는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몽골 문자가 이정표마다 병기돼 있었다. 몽골에서 분리돼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된 내몽골 자치구다.

내몽골 자치구의 면적은 중국의 10분의 1에 달한다. 남한 면적의 12배다. 인구는 한국의 절반 수준인 2500만명 정도다. 지하 자원이 많아 최근 경제가 좋아지고 인구가 많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땅 넓이에 비하면 인구밀도는 여전히 낮다. 이마저도 80퍼센트 가까이가 한족이고 몽골족이 2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래의 몽골땅이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내몽골, 초원과 말의 나라

몽골인은 말을 특별하게 생각했다. 우리를 초대한 몽골인의 집에 들어섰을 때도 온통 말이었다. 시계에도 거울에도 그림과 천에도 말이 그려져 있었다. 여러 개의 말 인형이 창가에 있었고 오래된 말 안장이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 벽 높은 곳에는 마두금이 걸려 있었다.

모린후르라고 불리는 '초원의 첼로' 마두금(馬頭琴)은 두 줄 짜리 현악기다. 현과 활을 말총으로 만들고 말 머리를 조각한다. 느린 곡조의 연주를 하면 애잔한 소리가 난다. 유목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악기다. 200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지난 수십년간 내몽골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유목에서 정착으로 전환되면서 고유의 정서가 많이 달라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두금은 유목민의 정서를 상징하는 악기로 남아 있다. 집 주인의 진지한 얼굴에서 나온 "열 마리도, 백 마리도, 천 마리의 가축도 한 사람이 키운다"는 말은 고독한 유목의 여정에서 마두금을 켰을 몽골인의 삶을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말일까? 꼭 칭기스칸 시대의 영광에 대해 말하지 않더라도 말은 초원을 누비는 몽골인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강력한 무기였고, 빠른 이동 수단이었으며 수많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몽골인에게는 전통적인 말 숭배 풍속도 있다. 중국 정부의 정책으로 이제는 유목 생활이 많이 줄었지만 말을 키우고 조련하는 일은 여전히 몽골인에게는 중요해 보였다. 내몽골은 현재 터전을 옮기는 유목 대신 초원을 분할해 휴경을 하는 방식으로 가축을 기른다.

▲ 몽골인에게 말은 각별하다. 집 한 구석을 전통 말 안장이 차지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집 주인 형제가 마두금을 꺼내 들었다. 두 줄짜리 현악기 마두금은 애잔한 소리가 난다. 유목민의 외로움을 달래는 악기였다. ⓒ프레시안(최형락)

말 타기와 게르... 초원의 하루

여행지에서 현지인의 집에 들어서는 일은 낯선 일이다. 집 주인 형제는 손님을 따뜻하게 맞았다. 우리는 직접 소젖을 짜고 말똥을 태워 치즈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집 안에서 오랫동안 얘기하며 생활 모습을 살펴 볼 수도 있었다.

초원에서 말을 타는 일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마을에서 말을 모아 온 마부들은 우리를 태운 말의 고삐를 잡고 초원을 걸었다. 말을 타는 시간은 한 시간에 가까웠는데 어느 정도 적응하면 고삐를 놓고 혼자 탈 수 있게 해주었다. 승마 경험이 있는 사람은 유순한 말을 골라 초원을 달려보기도 했다. 말에서 내린 사람들은 활쏘기에 열을 올렸다. 옛 몽골 기병을 생각하며 의미심장하게 활을 잡았지만 사실 활 시위를 잡아당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만찬이 시작됐다. 환하게 불을 지피고 음악에 맞춰 마치 강강술래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불 주위를 돌았다. 그러고나자 양 통구이가 나왔다. 지역에서 행사를 치르는 기예단이 찾아와 몽골 전통의 노래와 기예를 보여주었다.

숙소는 몽골 유목민의 천막인 게르였다. 초록의 초원에 하얗고 파란 천막은 낭만적인 데가 있었지만 설렘은 길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기온도 뚝 떨어졌다. 8월 하순인데도 침낭 없이는 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침이 되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인사가 길었다.

그 추운 밤 밤하늘의 별들은 선명했다. 북두칠성이 또렷했고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은하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 초원에서 말타기. 말을 타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 초보자도 약간의 적응을 거치면 혼자서 말을 탈 수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해가 진 뒤 서쪽 하늘에는 오랫동안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게르 위로 수많은 별이 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은하수가 선명하게 보였다. ⓒ프레시안(최형락)


오보와 티벳 불교

오보에 올랐다. 오보는 산 위에 원추형으로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 장대를 꽂아 놓은 것을 말한다. 높은 곳엔 어김없이 오보가 있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몽골 토속의 샤머니즘 신앙의 산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13세기 경 정책적으로 티벳 불교가 수입되면서 오보도 티벳 색채를 띠게 된다. 오보에서 지내는 제례를 티벳 불교 사원이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토속 신앙을 감싸 안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그 경계가 희미하지만 오색의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도 티벳불교의 영향이다.

오르는 길에 돌 하나씩을 들었다. 돌탑을 세바퀴 돌고 돌을 쌓으며 소원을 빌었다. 몽골인들에게 선물 받은 푸른색 천으로 만든 하다를 돌에 묶어 놓고 내려왔다.

수태차와 마유주... 내몽골의 음식들

과거 원나라 때 불교를 수입하면서 티벳 불교로 결정한 것은 육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는 채소를 얻기 어려워 유목 생활에 맞게 육식이 발달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음식들도 그렇다.

수태차는 우유에 차를 넣고 끓여 만든다. 여기에 소금이나 버터를 첨가한다. 비타민과 무기질을 공급하고 추운 겨울 체온 유지를 위해 마시기도 한다. 손님이 오면 새로 끓인 수태차를 내오는 게 몽골식 예법이다. 인도의 차이와 비슷한 느낌인데 조금 더 고소한 맛이 난다.

손님을 맞는 대표적인 음식은 양이다. 귀한 손님이 오면 양을 잡아 통째로 구워 대접하는 것이 몽골의 오랜 전통이다. 양을 잡을 때는 고통을 짧게 하기 위해 칼로 가슴 부위를 째고 얼른 손을 넣어 심장을 비트는 방법을 쓴다. 몽골인들은 가축을 죽일 때 예를 갖춘다. 오랫동안 써 온 방법이다. 게르에 들어설 때 마주친 양은 다음날 통구이가 돼 만찬에 등장했다.

마유주는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손님이 오면 양구이와 함께 내놓는다. 말젖을 가죽포대에 넣고 저어가며 2~3일 발효시키면 단맛이 사라지고 거품이 생기는데 점차 기름이 분리되고 가라앉은 투명한 액체가 생긴다. 이것이 마유주다. 약 38도 내외의 고도수 술인데 신기하게도 말이 주로 뜯어 먹던 풀맛이 난다고 한다. 과거에는 유목민들이 말젖을 가죽에 넣어 말 안장으로 쓰면서 발효시켰다.

우유 두부는 몽골인들의 주식 중 하나다. 멀리 나갈 때 비상 식량처럼 챙겨 나간다. 양이나 말젖을 발효해 만드는데 생김새는 두부이지만 사실은 치즈다. 맛이 시고 우유맛이 강하다. 말려서 먹기도 하고 튀겨서 먹기도 한다.

▲ 오보는 본래 몽골 전통의 샤머니즘 신앙에서 나왔다. 티벳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불교에서 오보 제례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프레시안(최형락)



▲ 드론을 띄워 본 평원. 낮고 둥근 산들이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듯하다. 가운데 오보가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 내몽골에서는 티벳 불교 사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원 안에 놓인 티벳 불교의 지도자의 사진 ⓒ프레시안(최형락)



▲ 바람이 많은 내몽고에서는 풍력발전기가 많았다. 아래 하얗게 보이는 것은 양떼다. ⓒ프레시안(최형락)

100억 짜리 사합원과 중국의 부동산

베이징으로 향했다. 원나라 때 계획된 도시 베이징은 마치 요새 같았다. 지도에서 보면 중심부에서 여러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다. 하나의 환을 지날 때마다 검문이 심했다. 건국 70주년 행사 때문이었을까. 외국인 단체 관광객에 대한 검문은 비교적 덜했지만 밀리는 검문 행렬을 수차례 지난 끝에야 베이징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베이징의 오래된 골목인 후퉁을 걷다 한 사합원에 들어갔다. 사합원은 말 그대로 동서남북 4면에 집을 지어 정원을 가운데에 두는 전통 주택이다. 밖으로는 창문을 내지 않는다. 정문에서도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게 벽 하나를 둔다. 마당에는 꼭 나무를 심고 어항을 두어 금붕어를 키운다. 도시화로 사합원은 많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도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 못하다. 보존 가치가 큰 사합원의 경우 희소가치 때문에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우리가 둘러본 사합원의 가격은 한화로 100억원 정도였다. 집 주인은 사합원을 팔지 않고 일반에 공개하고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아 큰 돈을 벌고 있었다. 처음엔 100억원이라는 금액에 놀랐지만 곧 의문은 공산 국가의 사유재산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다.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고 모든 땅은 국가 소유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정부는 땅의 사용권을 70년으로 정했다. 거래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소유권이라기 보다는 사용권이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소유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2019년으로 70년이 만기가 되면 중국 정부는 땅의 사용권을 다시 70년 연장하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합원은 도시의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황링시 마을과 대장정

촨디샤 마을로 가는 길에 황링시 마을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이 마을은 대장정 당시 중국 공산당이 머무른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유적을 보존해 소박한 박물관을 만들었다.

대장정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에 쫓긴 마오쩌뚱과 공산당이 약 1만 5000킬로미터의 험난한 장정에 올라 공산당의 근거지를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옮긴 과정을 말한다. 대장정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영웅담 섞인 고난의 여정에 자극 받아 공산당에 가입했다.

공산당은 서서히 세를 확장해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장악했다. 그 원동력을 사람들은 대장정 당시 공산당의 도덕성에서 찾기도 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고 도덕과 윤리를 중시한 전략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평이다. 대장정을 이끈 마오쩌둥은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다.

인권 탄압과 언론 통제가 공공연한 오늘날 중국의 첫 출발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 황링시 마을의 임표(왼쪽)와 모택동의 사진. 홍군의 대장정 때 공산당원들이 이 마을에 묵었다고 한다. 마을은 유적을 모아 박물관으로 꾸몄다. ⓒ프레시안(최형락)

·청 시대의 건축물이 보존된 촨디샤 마을

촨디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험난했다. 높고 깊은 산속으로 굽이치는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야 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건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이 작은 산촌마을은 명나라 영락제(재위 1403~1424) 때인 15세기 초 산서 지방의 주민들이 베이징으로 이주하던 때 생겨났다고 한다. 이후 촨디샤는 1500년대 들어서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곳이 베이징과 산서, 후베이성을 잇는 교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한(韓)씨 성을 가지고 있다.

촨(爨)자는 흥할 흥(興), 수풀 림(林), 큰 대(大), 불 화(火) 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함께 불을 지펴 흥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아궁이 찬, 불 땔 찬'으로 쓰인다.

▲ 촨디샤 마을 ⓒ프레시안(최형락)


관광이 아닌 여행

촨디샤 마을을 끝으로 4박 5일간의 짧은 여정은 끝났다. 마지막날 양꼬치와 마유주, 맥주 파티를 하며 소회를 나눴다. 참가자들은 관광 일색인 기존 패기지 여행과는 많이 달랐다고 말했다. 현지인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에 만족도가 높았다. 공정여행의 취지에 대해서도 공감했다.

공정여행은 여행지를 관광지화하고 자본만 배불리는 방식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개념이다. 10여년 전부터 한국에 소개됐다. 숙식과 프로그램을 가급적 현지의 생활 방식에 맞추고, 여행 경비가 현지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행자 스스로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프레시안이 조합원, 독자들과의 여행을 기획하면서 공정여행을 꼽아 든 것도 이런 점 때문이었다.

▲ 촨디샤 마을의 일선천. 촨디샤 마을의 삼륜차를 빌려 탔다. ⓒ프레시안(최형락)


▲ 내몽골의 평원. 오보에 오른 여행자들 ⓒ프레시안(최형락)



▲ 몽골인들은 환영의 의미로 마유주를 건네고 푸른색 하다를 목에 걸어주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사전에 약속을 잡고 몽골인의 집을 방문했다. 이제는 터전을 옮기는 유목을 하지 않는 현지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산에 오르자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프레시안(최형락)



▲ 촨디샤 마을의 마지막 날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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