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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류사회의 '존경 못받는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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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류사회의 '존경 못받는 권위'

한 사회학자의 '우리식 유교'와 씨름하기<2>

***I부. 누구나 평등하다?**

자고로 사회가 존재할 때부터 권력분할이 이루어져 왔다.다행히 반대급부로서, 현대사회로 올수록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권위구조를 타파하려는 평등개념의 도입이다.

한 사회가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발달할수록, 하향식 권위체계가 무너지는 쪽으로 변하고, 함께 가는 공동체의식이 발달하게 된다. 사회구성원들의 시각도 상하종렬식이 아닌, ‘더불어 살기’라는 병렬식 개념으로 바뀌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전통사회구조를 들여다 보면, 어떤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 상하식으로 신분을 결정하는 풍습이 이미 심화되어 있었다. 권력이 있고 없음, 남녀차이, 나이차이...라는 자연적이고 사회적 조건을 중시하던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거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이, 전통사회에서 대중소비사회로 바뀐 상태인 현대사회에서 -중간 소화단계가 없이- 그대로 진입해 살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형식을 존중하는 주자학적 사고방식이 사회곳곳에 자리하게 된 후에,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인간주의적 평등개념과 자본, 유통, 산업의 경제개념등을 충분히 곱씹어 소화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곧바로 대중소비사회로 이어지게 되었다.이 중간단계의 생략으로 인해서, 개인으로서의 인간개념이나 사회평등 개념은 충분히 자리하지 못한 채, 어떤 일에서 형식을 중시함은 곧 내용의 불일치를 가져와 갈등요소들로 남아있게 되기 쉽다.

이런 부딪힘들은 비합리적 요소-적재적소(適材適所)에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지 않음-가 사회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형식을 위한 내용의 부실은, 단단히 짓지 않은 집처럼 허실하고, 그 문제점이 사회 전반에 나타나게 된다.

***개인주의적 관점은 오히려 인간적이고 평등적이다**

유,불,선 중에 단연 유교가 행정적으로 통치를 용이하게 해 주는 가치체계였음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적 의식체계에서는 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규정되고 있고, 반대로 불교나 '선'에서는 개인의 '홀로서기'가 우선인 가치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 현대에도 서양의 지식인들이 불교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던 이유는 그 가치체계가 서양의 개인주의나 평등사상과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한 예로,‘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단연 조선의 유교적 생각 때문이다. 죽음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던 그 조선시대 이전의 시절에는, '가문의 대'라는 것이 조선시대처럼 철저하게 심하지는 않았다. 이런 가치체계의 흐름을 알면, 유교란 그 태생자체가 비평등적이며,개인의 생각과 삶을 용납지 않는 사회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몰개성주의였다는 것은 이해하게 된다.

결국 '한 아이는 한 개체이며 그 생명력은 존중되어야한다'는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 발상은, 유교적 가족주의 사회에서 지켜나가기 어렵다. 그러니 신세대적 사고바탕인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거의 매 순간 구세대의 틀과 부딪히게 됨은, 당연한 현실이며 한동안의 지속될 한국사회문제다. 남에게 튀면서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세대와 남이 볼까 두려운 세대와의 차이...이것 자체가 사회갈등이며 문화괴리다.

이때 우리 신세대적 사고를 가지고 추구하는 개성이라는 것이 곧 개인주의다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아직, 우리나라 신세대들의 개성이란 물질주의에 의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자체가 또 다른 사회병리적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신세대들의 비싼 브랜드의 선호라던가, 연예인에 대한 선호, 쉽게 소비문화에 탐닉하게 되는 것 등은 -'개성존중’이라는 순수한 의미의 개인주의가 아닌- 대중소비사회의 또 다른 물질주의적 행태이고 또 다른 의미의 몰개인주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한 개인은 유도된 유통구조 속에서의 소비자이고, 진정한 의미의 개인적 시각은 거의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재의 '개성추구'라는 물결이, 그 소비를 패턴화할 수 없는 정도로 다양하게 개인화되어 발달되고, 또 탈매체적이면 탈물질적 사고에 의한 것이라면 -즉 가격이나 브랜드나 트렌드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라면- 그제서야 참다운 개성을 가진 개인들의 물결이라고 할 것이다.

소비적 대중매체를 비웃으며... 자신의 색깔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 권위적 발상을 뒤로하고... 소공동체적 삶을 사는 사람들, 소비보다... 에콜로지적인 발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위 아래 서열을 세우기보다... 타인의 시각을 인정해 주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 지게 될 때,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의 사회가 될 것이다.

***평등은 어릴 때부터...**

남녀차이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 사회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여아의 수를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만든 사회다. 또한 아무리 사회인식이 나아졌다해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평등보다는 차별을 경험케 된다.

혹시라도 노인세대와 같이 지내고 있는 가정에서는 기존의 가치관 때문에 '평등'이란 개념을 교육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노인세대들이 손자들을 대할 때 남자애에게 대하는 태도와 여자애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른데, 이런 "대를 이을 애"에 대한 예우는 비단 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의식주 전반에 걸쳐 가족원들의 감정 속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잡게 만든다.

혹시라도 어렵게 얻은 남아의 경우, 더욱더 '버릇없는 아이‘로 키우게 되고, 그 반면에, 여자애들만 둔 가정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도사린 여성비하의 사고방식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있다.

***세 살버릇 평생간다**

한 가정에서 선택의 중심-생선의 맛있는 부위, 놀러 갈 때의 장소 선택권 등-을 남자어른이나 아이에게 주는 것은, 앞으로 그 남자가 커서 사회생활이나 가정을 꾸리는데도 문제거리를 낳게 한다. 맞벌이 부부가 더 많아지는 현실에서, 남자도 자신의 일상의 일, 양말 벗는 일부터 옷거리에 옷거는 일 까지, 그리고 시간이 난다면 요리와 방청소까지 여성, 남성의 구분없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역할분담이 요구되는 것은 '인간평등'의 실현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기 전에, '가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집안 일을 분담해야한다는 자연스런 일인데, 우리나라 남자들은 아직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힘들다.

우리나라의 경우, 할머니, 엄마 아빠로부터 아이들은 물도 혼자 떠먹지 못하게 교육되는 점이 서양의 교육방식과 다르다. 식사 전에 수저를 식탁에 놓게 하거나, 당번을 정해서 설거지를 돕게 하는 일, 옷을 반드시 걸어 놓게 하는 일 등은 공부가 아닌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돕는 첫걸음 교육이고 나중에 가정을 꾸리는 데 꼭 필요한 실습이다. 생활을 위한 공부를 등한히 하고, 직업을 구하는 공부에 몰두시키는 것은 사실 장기적으로는 비효율적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사회갈등요소를 곳곳에서 낳게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부터 서서히 바꿔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성중심적 사고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유교의 풍토가 사회 곳곳에 한 순간 한 순간의 언어사용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 새끼가 울어?"
"여자가 얌전해야지 그게 뭐니"
"여잔 조신하구 착하게 살아야 해"... 등등

말 한마디, 한마디들은 비인간적인 성차이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TV등 매체에서 젊은 남성이 요리를 하고,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을 볼 때, 우리 사회가 변화되고 있음을 느낀다.

또 학교에서나마 가사시간에 남자애도 뜨개질과 요리를 할 수 있는 교육이 행해지고 있으며, 여성의 일을 나누는 것이 이젠 필요조건에 들어간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구세대의 남녀관은 가정에서 세부적으로 교육되는 것이 더디기 때문에 사회변화가 느리다. 언어의 사용 속에 녹아있는 우리의 이러한 관습은 쉽게 또는 빠르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활 속에서 평등적인 언어를 고르는 것부터 신경쓰면서 살아야 한다. 혹시라도 이때, 아이를 교육하는 평등적인 교육을 이해 못하는 구세대와 갈등이 있다면, 아이의 엄마, 아빠세대 (중간세대)는 부단히 구세대에게 시대적 요구를 '이해가 되게' 말씀드려야 한다. 중간세대들은 구세대에게 우리나라가 성별의 차이로 겪게 될 여러 문제들을 쉽게 알려드려야 할 의무가 있고, 갈등이 있더라도 그 갈등을 최소화하여 희석시키는 과정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단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간자적 역할은 너무나 크다**

위와 같은 이유때문에 우리나라에서의 여성운동은 그냥 하나의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일이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일 뿐이다.
누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눌린 사람도 많다.

우리 사회는 '신분'에 의한 권위가 있고 없음으로 구분되었던 사회의식이 그대로 이어진 경우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전반적으로 어떤 종류든 권위를 갖고 싶어하고, 가진 자는 거드름과 기타의 권위행세를 아낌없이 발휘하고 싶어한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으로부터 잔소리를 쉽게 듣거나, 또는 일과 상관없는 '눈치'까지 보는 등 그 스트레스가 강하다. 일이라는 객관적인 직업관이외에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는 요소가 많다.

우리 사회처럼 권위를 중시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가 높은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푸는 일'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조금 심한 예이긴 하지만, 회사에서 상사의 권위에 비위를 맞추다가 스트레스 받고 집이나 친구 찾아서 술을 마시다가 집에 돌아와서 아이와 아내에게 소리지르는 가장이 되는 일, 권위적인 남편과 시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다가 친구찾아 노래방에서 노래나 불러재끼는 여성들의 돌파구, 이 어른들의 스트레스 속에서 자란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의 도미노는, 저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면서 풀게 될 수 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우울.조울병학회(이사장 김광수)는 지난 6~11일 서울시내 20~60세 주부 1천 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통해 우울증 유병률을 분석한 결과, 세계평균(25%) 의 2배 수준인 45%로 집계됐다고 28일 밝혔다.(서울=연합뉴스, 김길원기자 2003년 10월28일)"

우리나라 주부 45%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12.3%는 자살충동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전체사회에 모두 이런 일들로 덮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쉽게 만나게 되는 스트레스형 우울증들의 모습은 사회전체의 문제가 되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원인을 과거부터 내려온 권위주의가 팽배한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이혼율이 왜 높아지느냐 또는 이민을 왜 하느냐 하는 문제에 접근할 때, 다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이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만성 스트레스형 우울증환자들이 많은 사회라면 그 갈등과 삐걱거림이 쉽게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고 이는 심심치 않게 사회면에 나타나는 일련의 행동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쌓일 것이 없으면 풀 것도 없다**

'한(恨)'이라고 말해지는 우리 정서의 단면은 사실 유교사회의 상하개념의 권위사회에서 갖는 아랫사람들의 스트레스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을 품고 한을 삭혀야만 했던 많은 사람들은 모두 권위를 얻지 못한 평민이나 백정, 그리고 아낙네들이었으니까...

이런 과거사회의 풍토에서는, 아무리 사회구조가 현대적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평등한 개념 - 직업의 귀천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는-이 일반화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富)가 만능이 되어버린 천민자본주의 (다른 정의가 없어서 이 단어를 쓰고자 한다. 즉, 자본주의가 다른 합리주의를 같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물질로만 들어온 결과의 의미이다.)가 가치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우리사회에서는, 부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곧 귄위가 되었다.

그래서 '돈 있으면 가장 편한 나라, 돈으로 안통하는 게 없는 나라...' 라는 식의 말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좇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것을 위해 벗기도 쉽게 하고 또 쉽게 죽어버리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도 보게 된 것이다.

***상류사회 사람들의 권위**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과 기본질서를 다루는 의사, 법률가, 고위관직인 등은 예외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명예와 권위 뿐아니라 부도 동시에 갖을 수 있게 된다. 어느 사회나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부귀를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현재 진보된 사회에서는 이런 직업인들에게 사회에 '공익을 담당하는' 입장이라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고 또 그런 사회의식이 많이 내재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위에 열거한 직업을 택하더라도, 그저 자신과 맞아서 선택했고 즐거이 그 소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고, 부와 명예를 걸머지려고 택한 직업으로서 의식이 적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사회에서 이런 직업군의 사람들이 스스로 갖는,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갖는 의미는 아직 너무 물질적이고 권위의 상징이라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 이들 직업군 중에서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들 대부분의 상류사회는 일반의 평범한 사람들과 억지로 구분짓는 경향마저 있다. 게다가 이러한 상류를 열망시키는 경향을 부추키는 상술은 특별 골프회원, 스포츠 클럽회원 등 다양하게 일조하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옷을 잘 차려입고 물건 사러 갔다고 옷가게의 서비스가 눈에 띄게 좋아지고, 큰차를 타고 왔다고 호텔 도어맨이 먼저 온 작은 차를 모른 척하고 큰 차의 문만을 여는 서비스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누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억눌린 사람도 많은 법이다.가진 자들이 그들의 권위를 뽐내고 살고, 사회전반이 그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살 맛이 안난다.

서구사회에서도 이런 물질에 의한 척도가 분명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노골적으로 심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이유는, 자본주의 발달이 점진적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쿠션들이 더 녹아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인간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들에서는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돈과 권위에 대한 열망이 적고, 자신의 직업은 그저 주어진 또 좋아하는 직업으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이들, 경제적으로도 더 잘 살지만 좀 더 인간주의적 시각이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가진 자도 자신의 철학에 의해 평범한 행동을 하고 즐거워 하며 사는 것을 본다. 유명한 신문계의 재벌의 아들이 빈민가 학교의 선생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일, 돈이 많아도 작은 차를 습관적으로 애용하는 사람, 한 나라의 수상이나 장관이 지하철을 애용하는 일, 비서에게 가방을 챙기게 하지 않고 손수 들고 다니는 관료들(물론 이들이 政敵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이 모든 일들은 우리보다 삶의 질이 높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일이다.

그네들은 직업의 귀천이라는 의식이 우리보다 적고 또 인간의 존엄성(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다. 이들의 상류사회는 좀더 자연발생적으로 구성되고, 안전사고 예방이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려는 차원에서나 이웃에게 더 폐쇄적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눈높이**

서양의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데는 캘비니즘이 동력이 되었으며, 그 자본주의의 밑바닥에는 휴머니즘이라 일컫는 인간주의가 장기간 걸쳐서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자체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추구하게 되는 본연의 자세인, 잉여라고 일컫는 플러스 알파 때문에 스스로 발달을 멈추지 않게 되어있었다는 게 요즘의 일반론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중산층의 인(간)의 권(리) 찾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어떤 직업에 의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눈'이 좀더 인간적이고 차별적이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저소득층들의 권리를 위한 뒤집기 단계를 겪었으니, 그곳에서도 물론 직업의 귀천이 덜 느껴지는 요소가 깔려있게 된다. 물론 권위적이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의 경우 이런 점이 더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양쪽 사회 어디서든지, 권위적인 요소가 인간적인 요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이 잘 이루어진 경우라면, 사회 밑바탕에 직업이나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 '차별적이지 않으려고' 하는 힘도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사회의 경우, 신분을 중시하던 과거의 사회가 중간숙성 단계없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과정에서, 인간주의에 대한 시각인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이 키워질 과정이 거의 없었다. 누구나 동등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습득할 시간적 과정의 역사가 너무 짧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정한 인식없이 권위적이기 쉽거나 또 역으로 비권위적이기 쉽고, 사회전반에 스트레스성 우울증을 가진 사람도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의 귀로에 섰을 때, 가장 중시되는 가치가, 가족중심 -더 크게는 지역중심-적 이기주의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성 삐걱댐이 강하게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행동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권위체계를 없애야 하는 일련의 행동이 필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인의 이름도 문패에 건다던지, 여성의 위치를 존중하는 태도는 참으로 민주적으로 보였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하위수준이던 여성의 정치참여나 기타 분야에서의 여성의 참여가 많아짐을 본다던지,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호주제가 논란이 되는 등의 일련의 일들이 '인간주의적인 또는 평등'을 위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닭이 먼저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먼저 솔선하여 권위를 부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들을 평등한 입장에서 대해야, 사회가 더 평등한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크고 멋진 외제차를 타는 사람이 권위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풍토가 바뀌어야 하고, 이를 갈망하는 사람이 적어져야 이 사회가 밝다. 자기 이름 석자가 부끄럽지 않는 것이 돈과 권력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주류들이 많아져야 한다. 한번 사는 인생, 떳떳이 살다가는 인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집안에서도 권위를 가진 사람들, 그것이 돈 잘버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는 남성쪽의 부모님이든 여성쪽의 부모님이든, 권위을 앞세워서 하는 행동들을 줄이기위해 끊임없이 대화해야 할 상황이다.

일상에서 가령, 한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 꾸준히 '대화'할 때, 그 남편은 권위에 의한 행동을 줄일 것이며,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대화'를 하고 지낸다면, 앞으로의 의식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은 하늘이요" "당신이 승진하면 내 어깨에 힘이 올라가요." 또는 "내 아들과 딸이..."라는 맹목적인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그 얘기를 듣는 사람도 사회에 나가서는 그냥 말부담, 즉 스트레스가 된다. 가족구성원들이 모두 짐을 나누어 질 마음의 준비를 늘 했으면 좋겠고, 적어도 말부담을 주지 말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 가정에서도 남성의 권위 이외에도, 중간세대인 여성이 권위적인 시어른을 모시는 일은 아직도 버거운 스트레스다. '시'자가 붙으면... 어렵다는 말은 가족간의 관계가 합리적이지 못하고 권위적인 데에 있다는 말이다. 전혀 다른 가정의 풍습을 지닌 새 식구를 들여서 서로에게 맞추면서 세대를 꾸리게 한다는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하면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들어 온 며느리에게 무조건 자신의 풍습을 완전히 버리고 남자의 가정에 맞추고 권위체계에 들어오라는 것은 며느리된 여성에게는 가혹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존재하는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이 되는 시집살이라는 말은 이 현대에는 전혀 맞지 않다.

현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개성을 존중받기를 원하며, 자신의 삶을 중시하며, 또한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세대가 거꾸로 일을 결정하는 힘을 가진 경우, 시어른이 오히려 며느리 '시집살이'를 한다고 한탄하는 세태가 되기도 하여 다시 노인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가치관의 변화, 즉 과도기에 나타나는 문제다.

우리 사회도 점차로 권위를 쫓는 것이 삶의 모토가 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개성을 살리면서 하는 쪽으로 변모하고는 있다. 아이들 앞에서도 부모가 어느 대학에 꼭 가기를 희망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남편을 가장으로서 짐지우는 일보다 짐을 기꺼이 나뉘어 지는 여성들이 더 많아 지고 있는 점은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적은 것을 보면, 집안에서, 또는 사회단체의 운동으로서, 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이런 시각을 키우기 위한 사회교육프로그램의 강화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즉, 이런 사회의식 함양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학교의 프로그램으로 중시되는 것- 공교육과 집안에서의 교육이 동시에 중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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