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새해 첫날인 1일, 집권 후 4번째로 2차대전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북핵 문제 및 자위대 이라크 파견 등 민감한 시점에 이루어진 이번 기습 참배에 한-중 양국 및 시민단체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고이즈미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어서 급속히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 집권 후 4번째 야스쿠니 신사 참배 **
고이즈미 총리는 1일 오전 11시 30분경 일본 언론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일본 전통의상 차림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도착, 신도 의식에 따른 합장과 절은 하지 않은 채, 지난 3번의 경우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참배했다고 교도(共同)통신 등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내각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로 서명하고 헌화료로 3만엔(약 30만원)을 헌납한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후 기자들과 만나 “일본의 평화와 번영이 지금 살고 있는 분들뿐 아니라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쳐야 했던 분들의 희생에 기초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담아 참배했다”고 말했다.
집권후 4번째인 이번 참배로 지난 2001년 4월 취임이후 매년 참배하겠다는 공약을 서둘러 마친 고이즈미 총리는 올 해는 더 이상의 참배는 없을 것이라고 시사했지만 앞으로도 참배를 지속할 뜻임은 분명히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2001년 8월 13일 참배 공약에 따라 8.15를 이틀 앞두고 참배한 바 있고 2002년 4월 21일에도 한일 공동 월드컵기간을 피한다는 명분하에 참배를 앞당겨 한 바 있다. 중국은 이후 고이즈미 총리의 방중을 거부해오고 있다. 2003년 1월 14일에는 한-중 양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는 점을 들어 그 전에 참배를 마무리한다는 명분으로 세 번째 참배를 앞당겨 실시했다.
***한국 정부, 직접적인 표현으로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 촉구**
고이즈미 총리는 기습 참배 이후 “신사 참배는 일본의 전통이며 주변국들도 한 나라의 역사나 전통, 습관을 이해할 것이라 본다”고 밝혔으나 한-중 양국 정부 당국은 물론 시민단체, 일본 내 야당들도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정부는 이날 신봉길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세계평화를 파괴하고 우리 국민에게 말할 수 없는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전쟁범죄자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고이즈미 총리가 또 다시 참배한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야스쿠니 신사를 더 이상 참배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정부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이같이 직접적인 표현을 써가며 참배중단을 촉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어 그는 “우리는 그간 올바른 역사인식이 한일 관계의 근간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전쟁 범죄자에 대한 참배가 중단되어야 함을 누차 지적해 온바 있다”며 “그런데도 일본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전쟁범죄자들을 계속 참배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신봉길 대변인은 또 “우리 국민의 감정이 또 다시 상처를 받게 된데 대해 우려와 함께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고이즈미 총리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진정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한다면, 과거 역사를 직시하는 바탕위에서 인근국가들의 입장과 국민감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주중 일본 대리대사 소환**
중국 정부도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항의의 뜻을 나타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에 대해 “강한 분개”의 뜻을 밝히기 위해 하라다 치카히토 베이징 주재 일본 대리대사를 소환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은 강한 분개를 표했다”며 “고이즈미는 중국인과 아시아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신사참배를 지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는 중-일 우호관계에 대한 정치적 기초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며 “고이즈미가 잘못된 행동을 계속하면 그는 중국인과 전세계인들로부터 불신을 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민단체 및 일본 내 야당도 비난 거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및 태평양전쟁유족회 등의 시민단체들도 “이번 기습 참배는 일본이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우경화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하지만 ‘연례행사’로 굳어져 가는 신산참배 문제는 정부가 우선 시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한 비난 목소리는 한-중 양국뿐만 아니라 일본내 야당들에서도 이어졌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민주당의 칸 나오토 대표는 중국 및 한국 등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며 “이번 참배는 개인적인 신조를 중시해 국익을 해치는 행위이며, 국민에 대해 책임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공산당의 이치다 다다요시 서기국장도 “침략전쟁과 군국주의 추진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의 참배는 절대 용서되지 않는다”면서 “주변 국가들에게도 일본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여전히 하지 않고 있어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7월 참의원 선거 앞둔 고도의 정치적 행위", 차기 6자회담 영향 우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이같은 주변국 및 야당의 강력한 반발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한 것은 이로 인한 정치적 이득이 보다 크다는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참배 이후 자민당 내에서는 우호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자민당 호리우치 미치오 총무회장은 이번 참배에 대해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이 오가겠지만 신념에 근거에 참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옹호했고 일본 유족회 회장인 고가 마코토 전 간사장은 “한 해의 시작일에 참배받은 것에 감개가 깊다”고 강조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에 관해“전범 유족들 및 이들 동조세력들은 고이즈미 정권을 지지하는 주요 정파 가운데 하나”라며 “특히 7월에 있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선거승리에 주요 관건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했다. 지난 11월 중의원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다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번 신사참배는 보수 우익 세력을 동원하려는 고이즈미 총리의 계산이 깔려 있는 정치적 행동이라는 것.
신사참배 시기가 앞당겨진데 대해선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분석했다. 40명의 항공 자위대가 이미 출발했지만 일본 국내 여론은 여전히 자위대 파견에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게다가 자위대가 공격을 받은 이후 신사 참배를 할 경우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더 큰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도 이를 의식, ‘이라크 파견 자위대의 안전을 기원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단지 “많은 것을 기원했다”고만 짤막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같은 고려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시기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차기 6자회담 개최와 맞물려 파장이 예상된다. 로이터 통신도 차기 회담 당사국인 “한국과 북한, 중국이 모두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에 강력 비난하고 있다”고 전해 차기 6자회담 개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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