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는 우익의 '대본영'으로 불린다. 대본영은 일제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수행했던 군국주의 군부의 지휘부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 최대 규모의 극우단체가 '대본영'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 극우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향수가 강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도발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일본의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와 백색국가 제외 등 경제보복에서 비롯한 한일 갈등은 미시적 국면에서 어떤 형태로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갈 것이다. 수출규제 품목 중 포토리지스트에 대해 삼정전자에 한해 2건의 수출허가를 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건강한 시민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익은 제국주의 일본 부활이라는 망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일 갈등이 결코 대법원 징용배상 판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유이다. 경제보복도 추격하는 한국에 제동을 거는 의미도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한국 등 주변국과의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켜 일본 우익이 결집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기 위함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일본의 경제보복에서 비롯한 한일 갈등의 기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다. 일본은 조선 침략은 물론 중국·대만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광범하게 침략하고 결국 미일 전쟁을 통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의 전초를 다졌던 전범국가다. 일본 경제 거품의 붕괴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은 '제국의 영광'은커녕 국가 전체가 위기의식에 빠지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향수와 이어지면서 극우 세력의 개헌 시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패망 이후 미국에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재기의 길을 모색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기지로서 일본의 존재가 필요했고, 미·일은 상호 이익의 관점에서 동맹을 형성했다. 미일동맹은 아시아에서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남방 진출을 억제하는 주요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한미동맹이 미일동맹의 하위 개념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해방 직후 맥아더가 발령한 작전명령 4호에 의하면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 일본 본토와 구별하지 말고 "천황 및 일본 제국의 각종 통치 수단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라"고 요구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 24군단장인 하지 중장이 일제 관료기구에 협력하던 조선인과 총독부 행정기구를 통치의 기제로 활용하고 친일 세력 부활의 결정적 계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는 "한국을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만든다"고 선언했다. 한국의 독립을 장래에 약속하면서도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을 붙였다. 여기서 적당한 시기의 의미는 국제적인 한반도 신탁통치와 그 후의 독립을 의미한 것이다. 카이로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후에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신탁통치 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을 가른 결정적 명분, 신탁통치를 둘러 싼 찬탁이냐 반탁이냐는 무수한 희생과 증오를 잉태한 이념 갈등의 단초요 핵심 명제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미·영·소 삼국 외상회의의 결정의 핵심은 남과 북이 하나의 임시조선민주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는 이를 위한 방법론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최장 5년 기간의 미·영·중·소 4개국이 후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를 주도적으로 주장했던 측은 미국이었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왜곡은 어이없게도 1945년 12월 27일의 동아일보의 기사에서 비롯됐다. 기사의 내용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은 그 구실로 삼팔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다. 그러나 삼상회의에서는 조선의 즉시 독립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는 분명한 오보였으나 이 기사는 사태를 결과적으로 왜곡했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측은 미국이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무분별한 반탁운동에 미국은 오히려 경악했고, 미소가 남북에서 지배를 합리화시키는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된 게 한국의 현대사다. 그리고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장래의 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놓아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 등은 잘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극우 집단의 군국주의 부활 야욕과 국내의 청산되지 않은 일제 잔재,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냉전세력의 반역사적이며 비민주적 인식들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우리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
수구세력, 친일세력의 뿌리는 하나다. 세월호 참사와 5·18 민주화 운동 망언을 일삼는 인사들은 한일 갈등에 대해서도 국민의 정서와 인식과는 동떨어진 극단적 인식을 유튜브 등에서 주장하고 있다. 냉전사고와 친일의 뿌리가 같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작업도 경제· 외교적 해법과는 다른 트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역사 왜곡을 일삼는 것을 바로잡아야 하듯이 해방정국에서의 이데올로기 갈등, 제주 4.3 민중항쟁과 여순 항쟁 등을 좌익의 폭동으로 왜곡한 역사도 바로잡아야 한다. 분단과 냉전의 극복은 극일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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