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정부의 도발적 행위에 대하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결전의 의기로 대응하고 있다. 그만큼 이 사안이 우리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와 우리 후손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또 다른 정책 논의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국민연금 개혁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비추어 이 사안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절대로 소홀하게 취급돼서는 안 되는 국정 현안 중의 하나다.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치열하게 논의하여 최선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공적연금, 국가중심주의냐 국민중심주의냐?
최근 일본 정부의 경제침탈 행위를 관찰하면서 그들의 행태를 이끄는 정치이념과 우리나라 공적연금의 발전 경로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바 '국가중심주의'다. 아베 정권의 일탈적 행위의 근저에는 국가중심주의가 있다. 이는 다수 대중이 학습된 무기력에 빠져 비판 능력을 상실할 때 오는 위험한 현상이다. 전혀 다른 영역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이 국가중심주의적 동기에서 구상되고 설계되고 도입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냉정하게 그 실체를 깨닫고 위험성을 경고하며 국가중심주의의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논의하고 합의해야 할 이슈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일찍이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하는 국가의 양면성을 지적하며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사람이 있다.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다. 그는 호전국가(warfare state)에서 힌트를 얻어 복지국가, 즉 'welfare state'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에서 벗어나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국민과 이웃나라 국민들에게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국가의 두 얼굴에 주목하였다. 당시의 독일은 국민을 국가 발전의 수단으로 동원하여 강력해진 경제와 군사력으로 이웃국가들을 침탈하곤 했다. 윌리엄 템플은 그런 국가를 호전국가라고 했다. 반대로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힘쓰며 이웃국가들과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불렀다.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해도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국민의 삶에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템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가는 복지국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것 같지만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첨언이다. 그는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국가가 복지국가의 외형을 띠면서도 국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파시즘적 국가중심주의로 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국가중심주의의 반대 개념을 국민중심주의라고 했을 때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은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양자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제도 도입의 목적 설정, 제도나 재정 운영 원칙의 설계, 재원 조달 방식 등에서 국민의 삶 개선을 우선시하느냐, 내자동원이나 산업진흥, 경제성장 등을 우선시하느냐를 보면, 양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공적연금, 특히 국민연금은 최근까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를 추구해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국민의 노후의 삶이 열악하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이유를 다시 더듬어보자.
첫째, 제도 도입의 동기와 목적 측면에서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 보장을 최우선시하지 않았다. 기금의 축적과 유지를 통한 경제 활성화나 정권의 정당성 확보가 암묵적인 최우선의 목적이었다. 둘째, 가입 대상자 선정 시 근로 여건이 열악한 직업군을 후순위로 하였고, 제도 도입 당시의 노인 연금권 확보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 초기 가입자들이 연금권 확보가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설계한 우호적 수급 구조는 제도가 성숙할 때까지 상당 기간 지속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급속히 허물었다. 절대적으로 충분한 가입 기간을 확보할 수 없는 초기 가입자들에게 적정 노후소득을 보장하려면 보험료에 비해 급여 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불가피하다. 충분히 제도가 성숙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서서히 급여 수준을 낮췄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셋째, 제도의 설계와 기금 운영에 대한 국가의 관여 정도에 비추어 그에 상응하는 재정 책임을 지는 데 국가는 인색했다.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를 주요 재원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사회보험연금제도에서 저소득자와 불안정 취업자 등은 국가의 재정 지원이 없으면 보험료를 내지 못하거나 불충분하게 납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가 그들의 자조 노력을 돕거나 최소한의 연금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재정 지원이 필요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거나 최대한 기피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국민 대다수를 포괄하는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연금기금을 통한 국가경제의 견인과 연금재정의 건실화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온 것이다.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의 보장이라는 공적연금 본래의 목적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보다 국가중심주의적 가치를 우선하여 추구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연금 도입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의 노인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 평균 열 분 이상의 노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이라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사회 현상이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음에도 어느 정당, 어느 정치인, 어느 관료를 막론하고 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에 '각별한 기대'를 거는 이유
다시 한번 돌아보건대,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를 추구해 온 '국민의 연금'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기에 포용적 복지국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여타의 공적연금 개혁의 방향을 명확히 하고, 개혁 목표의 설정이나 개혁 추진의 전략과 방법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을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개혁의 출발 과정에서 그런 변화의 조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의 사회적 논의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길을 잘 간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국가중심주의적 가치에서 벗어나 국민중심주의적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근본적 가치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 착안해야 할까?
정책학자 피터 홀(Peter Hall)에 의하면 근본적 정책 변화는 그 정책이 추구하는 '목적'과 '핵심 원칙'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근본적 정책 변화(fundamental policy change)라고 한다.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과 불확실한 미래를 고려할 때 공적연금은 정책 목적과 전략에서 근본적 대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국민연금 '재정 계산의 해'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의 사회적 논의는 과거와 같이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수급구조 중심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적연금이 추구해야 할 최우선 가치와 목적에 대한 치열한 논의와 합의이다. 그동안 국민연금은 어떤 목적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해 왔는가? 공적연금은 노후소득 보장이 본래 목적이다. 재정 안정화는 그 목적을 잘 달성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이차적 목적이다. 그동안 수단적·이차적 목적이 본래적·일차적 목적을 밀어내고 우선시 되어 오지는 않았는가? 그렇게 추구한 정책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의심도 하고 질문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런 치열한 모습은 현 사회적 논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목적과 수단의 전도는 효율성과 성과를 앞세우는 정부에서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국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엄중하다. 한두 개의 사례를 들어보자. 어떤 가장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분(수단적 목적)으로 평생 돈 버는 데만 열중하고 아내와 자식들과 대화하고 가족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지속적으로 소홀하다고 치자. 그 결과,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이혼에 따른 가족 해체와 자식들의 원망이라는 불행을 맞게 된다. 돈도 결국은 가정의 행복에 도움이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60년 동안 모든 국가 역량을 경제성장에 집중하였다. 일정 기간 불균형 발전 전략이 불가피했다 할지라도 어느 시점부터는 적절한 사회정책을 통한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를 간과한 채 모든 자원과 역량을 경제성장에만 투입했다. 정책의 경로 의존성에 매몰되어 변화의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국민의 행복지수는 최하위에 머물고 급기야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국가가 추구해야 할 목적인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경원시하고 수단적 목표인 경제성장만 추구한 업보이다. 저출산으로 인한 생산인구의 감소는 삶의 질에 대한 국민의 평가보고서다. 국가중심주의적 경제성장만을 추구한 결과가 결국은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그간의 논의와 이후의 절차
우리는 이 전환의 시기에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빈곤 예방과 안정된 노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국민연금이다. 그런데 연금기금을 보호하기 위해 안정된 노후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을 언제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노후빈곤 예방과 적정 노후소득의 보장을 이루지 못한 채 달성된 기금의 보호와 연금재정의 안정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동안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 국민의 보편적이고 적정한 공적연금 수급권을 보장하지 못해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간의 정책 경로를 벗어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현재의 진행 상황을 제대로 점검하고 조율해야 할 시점에 있는 것이다.
작년 8월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와 제도 개선안이 발표되었다. 그 후 발표된 개선안을 중심으로 공청회를 거치고, 지역별·계층별 국민토론회와 여론조사 등을 통해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운영계획)'을 수립하여 12월 국회에 제출했다. 국민연금 개선안을 하나의 정부안으로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왔던 예전 정부들과 달리 4개의 개혁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영세자영업자의 연금보험료 지원을 포함한 사각지대 해소 방안도 함께 담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운영계획'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과 별도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특별위원회(연금특위)'에 사회적 논의를 의뢰하였고, 지금까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 4월 말로 6개월의 논의 시한이 끝난 연금특위는 16차례의 토의를 진행하면서 전문가 검토과제를 학습하고 각계의 공식·비공식 의견을 수렴하는 등 각 논의주제별로 개혁안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논의 자료를 즉시 정리하여 홈페이지에 공유함으로써 누구나 논의의 과정과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6개월이라는 기한은 논의 주제의 방대함과 복잡함, 그리고 이해관계 상충 등의 장벽을 넘어 합의에 이르기에는 부족했다. 연금특위는 논의 기간 3개월 연장을 결정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본회의에 연장 결정을 요청했으나 다른 안건(탄력근로제)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로 의사정족수가 미달되어 연장되지 못하다가 3개월이 지난 8월 초에야 연장되어 8월 말을 기한으로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경사노위의 연금특위는 각계를 대표하는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위원장 1인, 노동계 대표 1인(전국 단위의 조직 2인이 정원이나 민주노총 대표의 불참), 경영계 대표 2인, 청년 대표 2인, 비사업장 대표 4인, 정부 대표 3인, 공익 대표 3인이다. 이들은 지난 6개월 동안 매주 모여 회의와 토론을 하고 의견을 모으면서 수급구조(보험료와 급여 수준)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접촉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소득대체율을 45% 수준으로 인상하는 안에 대부분의 대표들이 동의하고 있다. 보험료는 대체적으로 12%~13%까지 인상하되 10~15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인상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다만 경영계는 기업의 재정 부담과 경쟁력 약화 우려로 소득대체율과 보험료 인상에 반대하고 있다. 이 정도의 의견 접근이면 계층별·직역별로 가장 이해가 예민한 이슈인 수급구조 문제에서 연금특위 차원의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명확한 의사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동안의 보도 등을 종합해 볼 때 8월 말까지 연금특위의 합의안을 경사노위 본회의를 거쳐 의결하여 정부에 이송하고, 정부는 9월 국회에 이 내용을 통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연금특위의 사회적 논의까지 잘 끝났으니 정부 차원에서 할 일은 끝난 것인가? 그동안 현시점에서 꼭 다뤄야 할 공적연금의 정책 문제를 제대로 다뤘는지, 다루지 못한 정책 문제가 있다면 왜 그렇고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방향을 명확히 정하였는가? 그리고 국민들에게 동의는 구하였는가? 그동안 진행되어온 국민연금 개혁의 의미와 함께 지금부터 이런 쟁점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문재인 정부 국민연금 개혁 논의의 긍정적 의미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의 노후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선 공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고 사각지대의 완화를 위해 소득 하위 70%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임기 중 3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초연금 공약은 이미 실행에 옮겨지고 있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인상 공약도 실행 의지가 확인된다. 역대 정부가 모두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낮추는 재정 안정화를 추구한 반면, 문재인 정부는 이미 소득 보장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시각이고, 그런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연금특위에서 45%까지 명목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방안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여기에 영세지역가입자의 보험료 지원, 첫 번째 자녀의 출산 크레딧 추가 인정 등 사각지대 완화 및 연금권 강화 방안들도 합의될 전망이다.
대선 공약과 지금까지의 개혁 과정을 평가해 볼 때,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와 달리 재정 안정화 우선주의, 즉 국가중심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소득 보장 우선주의, 즉 국민중심주의로 공적연금을 보는 시각과 개혁 전략을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점진적으로 보험료를 인상함으로써 재정 불안정이 야기되지 않도록 조율하고 있다. 이는 과도한 사각지대, 과소한 연금 수준, 지나치게 짧은 가입 기간이라는 국민연금의 3가지 핵심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문제를 보는 관점의 전환, 정책 목적의 이해를 통한 근본적 정책 변화의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사회정책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폴 피어슨(Paul Pierson)은 어떤 정책이 비록 작은 변화라 할지라도 관점과 방향의 전환이 있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커다란 정책 효과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시간효과(time effect)다. 당장은 그 효과가 작다 하더라도 재정 안정화 우선주의에서 소득 보장 우선주의로, 국가중심주의 사고에서 국민중심주의 사고로 전환된 정책 효과는 시간이 감에 따라 크게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공적연금 개혁의 논의 방식에서도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이 마련한 제도개선위원회의 건의안을 그대로 채택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를 동해 국민의 목소리를 담고 정부의 정책의지를 반영한 4가지 개혁 대안을 제시하였다. 4지선다형 문제를 냈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감행했다. 책임 회피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사회 각층의 대표들로 구성된 사회적 논의를 요청했다. 과거의 시각으로 보면 책임 회피이고 시간 낭비이고 타이밍을 잃는 행동이다. 하지만 필자가 관찰해본 결과, 이 과정을 통해 참여한 대표들은 다양한 정책 문제들을 사실에 기초하여 학습하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과 이해가 다른 관계자들의 입장도 알게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더욱이 가장 예민한 수급구조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의견 접근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진행된 지난 9개월의 사회적 논의 과정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대변해 준다.
과거에는 효율성을 이유로 거칠고 조급하게 개혁을 몰아붙인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가시적 산출물(product)을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적으로 부작용을 동반하거나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 산출물(products)은 그저 산출물일 뿐이지 의미 있는 성과(performance)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짧은 시간에 소득대체율을 대폭 낮추고 보험료율을 높인 개혁은 정책 산출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사각지대가 넓어지고 소득 보장이 악화되었다면 정책성과 평가에서는 오히려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국민연금 개혁 초기에 칼럼을 통해 개혁 논의를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현 정부에서 그런 용기를 내고 있다. 이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된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앞으로 풀어야 할 더 많은 난제들이 나타날 것이고, 쉽게 산출물을 내고 싶은 유혹이 수시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의 출발과 방향이 좋은 만큼, 우리는 이 길을 끝까지 인내하며 가야 한다. 국민의 편에 서서 제대로 된 개혁이 이뤄지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논의하는 장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 논의, 한계와 과제
필자는 문재인 정부가 공적연금을 보는 관점과 개혁에 임하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공적연금 정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명실 상부한 국민의 연금, 더 나아가 국민을 위한 노후소득보장체계를 구축하기에는 현 정부의 개혁 논의 역시 한계가 없지 않다. 이는 주로 그동안 정부 주도의 조급하고 일방적인 논의에 길들여진 우리나라의 논의 문화와 구조의 한계에 기인한다. 그런 구도 속에서 변화의 경로를 걸으며 지금까지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개혁 논의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노후소득보장체계 전반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공적연금체계를 새로 짜겠다는 생각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노후소득의 보장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소명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강조할 것은 기초연금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의 설계 기술과 재정 분석에 대한 충분한 검증 자료도 부족하다. 그런 상태로 비전문가 중심의 사회적 논의 기구에서 심층 논의를 진행하고 합의를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고 타당하지도 않다. 우리나라의 기초연금은 아직 사회부조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과의 재분배 기능 중복과 급여 연계 등 엉킨 실타래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기초연금도 국민연금도 자신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발전 경로를 찾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초연금을 명실 상부한 보편적 기초연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기능을 단순화해야 한다. 이는 국제 사회가 이미 합의하고 제시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현행 재분배 방식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국민연금의 강력한 재분배 산식은 기초연금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현시점에서 노후소득의 보장을 왜곡하고 제도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85년에 국민연금(기초연금)을 도입한 후 2층 후생연금에서 재분배 기능을 없애고 소득비례연금으로 전환했다. 최소한 국민연금의 재분배 기능을 축소하고 재분배 산식도 다른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현행 재분배 방식의 국민연금은 제도 가입자와 미가입자 간, 그리고 가입자의 소득계층 간, 소득 역 분배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또 평균소득의 증가로 전체 연금 지출이 증가될 우려로 인해 소득의 상한을 늘리는 데 주저하게 만들어 중산층의 연금권 확보를 어렵게 한다. 그리고 가입자의 평균소득을 저하시켜 전체 가입자의 연금 수준도 저하시킨다. 이런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산식을 계속 유지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전문적 논의와 대안 마련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관 연금 격차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직역 간의 상호 연대와 직업적 특수성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도록 공적연금 체계를 개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조개혁 논의는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을 1층과 2층으로 분리하여 1층 기본소득보장 부분은 국민연금과 통합하고, 2층 직역연금은 특수성을 반영하여 발전시키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이 구조개혁 방안에 대해서는 과거 여러 정부, 여러 정당에서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검토한 바가 있고, 또 유력한 개혁안이 건의되기도 했다. 이제 공무원에게도 전 국민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연대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아울러 2층 퇴직연금을 강화하여 공무원 등의 직업적 특성을 최대한 반영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형평성과 공정성을 갖춘 공적연금체계를 구축하는 길이다. 그래야 공적연금 전반의 균형 있는 발전도 이룰 수 있게 된다.
내년은 공무원연금 재정 계산의 해다. 그러면 또다시 공무원연금이 귀족연금이라는 비난과 함께 보전금에 대한 비판이 신문·방송과 SNS를 도배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이런 반목과 갈등은 2~3년 주기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민들에게도 공무원들에게도 정부에게도 못할 짓이다. 국력의 소진이고 사회적 자산의 낭비이다. 연금 격차를 둘러싼 대부분의 갈등은 민관 연금의 구조적 차이에서 오고 있다. 나름 그 차이의 불가피성을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큰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3개의 특수직역연금) 간의 연금액 차이는 어떤 설명으로도 국민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구조를 바꿔 ‘같은 것은 같게’ 그리고 ‘다른 것은 다르게’ 만들어서 갈등 요인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구조 개혁의 선결 요건은 대부분 해소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공무원연금의 수익비(내는 돈에 대한 받는 돈의 비율)는 국민연금과 비슷하게 되었다. 연금액 산정 반영 소득 및 지급 개시 연령 등 제도의 내용도 비슷하게 조정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공무원노조 등이 국민연금의 소득 보장 강화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있고, 국민의 열악한 노후 연금소득에 책임을 표명하기도 했다. 공무원노조는 단순한 이해집단이 아닌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공무원의 대변 집단이기도 하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국민연금과의 통합을 적극 수용하겠다고 표명한 공무원단체도 있었다. 일본과 미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나라들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국민과 연금제도를 공유하고 있다. 구조 개혁을 통해 부분 통합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발전시켜온 제도의 장점들을 받아들이고 단점들을 개선하는 소중한 기회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조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권위 있게 개혁 논의를 지속할 수 있는 신뢰 있는 기구의 설치와 함께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각각의 공적연금 관할 부처가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부, 보건복지부, 국방부, 인사혁신처를 통괄할 수 있도록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 산하에 ‘공적연금 개혁 실무위원회’를 먼저 구성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으면 구조 개혁 논의는 이해관계 집단의 무분별한 비판으로 무산되기가 쉽다. 차근차근 모든 의심 영역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한 자료들을 축적하고 검증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후에 ‘연금체계 개편 및 제도개혁 위원회’를 구성하여 유력한 개혁 대안들을 만들고, 그 개혁 대안들을 가지고 사회적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 개혁 작업은 어쩌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신중한 준비와 오랜 숙의를 거쳐 정파적 이해를 탈피하고 어려운 공적연금 개혁을 성공시킨 해외의 사례들에서 우리는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1984년부터 시작하여 1999년에 완성한 스웨덴의 정당 중심 합의 개혁과 2002년 시작하여 2012년 완성한 영국의 정부 중심 합의 개혁 사례 등 참고할만한 많은 모범 사례들이 존재한다. 국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적 논의를 통한 개혁 사례들을 참조할 수도 있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과 현재 진행되는 국민연금 개혁의 지금까지의 경험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적연금체계 개편을 통한 구조 개혁 논의를 언제 본격적으로 착수할 것인가는 전략적으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을 먼저 종결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구조 개혁의 필요성과 시기에 대해서는 지금 합의를 해 놓아야 한다. 내년부터 시작되는 공무원연금 재정 계산 시점을 공적연금체계 개편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도 현 시국을 고려한다면 지혜로운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적연금 개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노후의 삶을 보장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적연금 개혁이란 재정 부담의 어려움을 서로 감내하는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행복한 노후의 삶에 대한 꿈과 비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역대 공적연금 개혁 과정들을 살펴보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을지언정 한 번도 안정된 노후에 대한 비전과 꿈을 심어주고 함께 얘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는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로 시기에 어떤 계층, 어떤 위치, 어떤 직업에 종사했느냐에 관계없이 열심히 살아온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퇴직 후에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해 주겠다는 공적연금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공적연금 개혁, 문재인 정부에 당부하는 말
필자는 이번 사회적 논의에 참여한 청년 대표들이 소득대체율과 연금보험료 인상 개혁안에 찬성하면서 국가가 안정된 노후 소득을 보장해서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도록 해 달라고 했다는 기사를 읽고 많이 놀라고 감동했다. 소위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는 사람들은 현 세대 노인의 빈곤을 '나 몰라라'하며, 후 세대의 보험료 부담만을 강조함으로써 세대 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하지만 정작 청년들은 그들 부모 세대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안정된 노후소득보장을 제도적으로 잘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된 노후가 보장된 젊은이들만이 둥지가 있는 새처럼 자식도 낳고 힘차게 멀리 날아갈 꿈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적연금은 젊은이들에게도 꿈이고 희망이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를 어느 수준에서 마무리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공적연금 전반의 체계를 바꾸는 구조 개혁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국정의 현안 과제다. 지금 구조 개혁 논의에 바로 착수하진 않더라도 그 필요성과 시기에 대한 논의와 합의는 지금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연금특위에 부여된 임무이다. 그리고 국민연금 개혁에 관한 논의에서 앞서 필자가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논의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연금특위의 사회적 논의에서 수급구조에 합의를 이룬다면, 이는 매우 소중한 성과이다. 하지만 그 결과만을 바로 국회로 회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그 이슈는 현재 우리 국민의 노후를 책임질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에 노정된 많은 문제들의 일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렵더라도 국민의 삶의 현실을 깊이 새겨 어려운 도전 과제들을 끝까지 정면으로 맞이하려는 용기를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 촛불로 탄생했고 포용적 복지국가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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