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가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에 '무역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사실상 '경제 전쟁'을 선언한 셈입니다. 현 상황은 매우 엄중합니다. 한일 관계에서 이른바 '1965년 체제'를 전환해야 할 시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비단 한일 관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북아 질서와 한일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965년 체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차분히 되새겨봐야 합니다. 그 시작점은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입니다.
김민웅 교수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한일협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글을 문답형으로 정리했습니다. <프레시안>은 김 교수의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인가'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 글이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에게 널리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7)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 이걸 출발점으로 해서 회담에 임했다는 거니까, 우리와 일본은 입장이나 자세가 완전히 극과 극이었군요.
그렇지요. 그래서 두 나라의 “기본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매우 본질적인 문제가 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그냥 두 나라로 설정하면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게 마련이지요.
일본은 자신의 가해사실을 역사적으로 기록하는 걸 거부했고 우리는 그걸 기점으로 회담을 하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1차 회담 당시 우리는 “기본관계”라는 말을 주장했고 일본은 “우호관계”라는 말을 내세웠답니다. 이 말이 얼핏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식민지 지배 역사를 청산하는 문제를 담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7-1)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제 안에서는 식민지 배상 문제가 제기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네, 그러니까 남은 것은 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청구권 논쟁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한 회담은 청구권 협정에 한 한 것이고 식민지 배상, 전쟁배상은 따로 정리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전쟁배상도 교전국으로서의 배상요구,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당시의 피해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1965년 한일협정은 단지 청구권 논의에만 국한 한 것입니다. 정확히 따지면 일본은 우리에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엄청나게 있는 겁니다.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관련 판결이 바로 이 문제를 거론한 거에요.
(7-3) 대법원 판결 문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근데 일본은 청구권 논의도 나중엔 하려 들지 않았다면서요?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애초에는 청구권 논쟁으로 자기도 받아낼 게 있다고 역청구권 개념을 가져와 돈 문제를 상쇄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하려 했어요. 그러다 이게 되지 않자 요시다 시게루 정권 이후 기시 노부스케 정권에서는 “역청구권 포기”로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아예 청구권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않고 경제협력이네, 독립 축하금이네 하는 식으로 방향을 몰고 가려 하지요.
(7-4) 아, 복잡하네요. 그것도 1차에서 7차에 이르는 회담을 정리할 때 다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하나 또 궁금해지는 건, 회담이 시작되었던 시기에 일본 정부나 일본 여론이 거의 모두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합법성, 한일합병이 정당했다, 그렇게 여겼다는데 그래도 일본 파시즘에 맞서서 반전운동을 했거나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요? 좀 중구난방으로 질문 드려 죄송합니다.
무슨 요, 생각나는 건 그때 마다 하셔도 됩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일본사람들이라, 네,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우선 일본 공산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미국의 냉전정책이 강화되면서 배제되었고 일본의 미군정 당국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7-5) 아. 조금 조심스러워지네요. “공산당”이라고 하니까.
- 그럴 거에요. 그러나 일본 공산당의 역사를 알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피압박 민족 해방”을 주장했습니다.
(7-6) 1945년 이후는 어떻게 입장을 표명했나요?
패전 이후 일본 공산당은 천황제 지배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천황제가 일본의 민주주의의 걸림돌이고 식민지 해방의 최대의 장애라고 밝혔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황제 비판논쟁은 일본 정치의 아킬레스 건이에요. 이와 함께 일본 공산당은
민족차별을 반대했고 재일 조선인/한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7) 당시 일본 사회 안에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고 지금으로서도 놀랍기만 합니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을 해방이 되었다고 으쓱거리면서 일본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폭도라면서 요시다 정부의 차별과 핍박이 강화되자 일본 공산당 중의원 하야시 하쿠로(林白郞)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시다 정부와 경찰이야 말로 폭도다. 일본 국민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나섰던 조선 인민의 투쟁에 대해 오히려 깊은 경의를 가지고 있다.“
(7-8) 일본 공산당은 아니지만 지금도 이런 생각, 의식을 가진 일본 사람도 있겠지요?
네, 있습니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을 하는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반 아베 운동을 하면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나갈 분들이지요.
[韓日協定, 何が問題なのか] ⑥
(7)結局日本は、朝鮮に対する植民地支配が国際法的に合法だったという立場を出発点として会談に臨んだということなので、私たちと日本は立場や姿勢が完全に正反対だったのですね。
ーそうです。
従って二つの国の”基本関係”を、どうのように設定するのかが、非常に本質的な問題になります。加害者と被害者ではない、単なる二つの国の問題として設定すると、到底解明出来ない問題が次から次へと当然のごとく出てくるものです。
日本は自分の加害事実を歴史的に記録することを拒否し、私たちはそれを起点に会談をしようとしたのです。
それで1次会談当時、私たちは”基本関係”という言葉を主張し、日本は”友好関係”という言葉を打ち出したそうです。
この言葉は一見するともっともらしく聞こえますが、植民地支配歴史を精算する問題を含まないようにしようとしたのです。
(7-1)しかし、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体制の中では植民地賠償問題を提起するのが難しくなっていると言っていたじゃないですか。
ーえぇ、なので残るは、財務関係を整理する請求権の論争でした。従って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に基づいた会談は、請求権協定に限局したものであること、植民地賠償、戦争賠償は別に整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いう認識が必要です。戦争賠償も交戦国としての賠償要求、中日戦争と太平洋戦争当時の被害が含まれるものです。
1965年韓日協定は、単に請求権論議だけに限定したものでした。正確にいうと、日本は私たちに未だ払わないといけない借金が膨大にあるのです。
2012年2018年大法院の強制徴用の関連判決が、まさにこの問題を取り上げたものです。
(7-3)大法院判決問題は後にもう少し詳しくお話しして頂ければと思います。ところで日本は請求権論議も後に取り上げようとしなかったそうですが。これはどういうことなのか理解に苦しみました。
ーそうです。こ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思いましたが、最初は請求権論争として、自分たちも貰うものがあるという逆請求概念で持って、お金の問題を相殺するやり方で終わらせようとしました。しかしこのことが無理だと分かると、吉田茂政権以降の岸信介政権では”逆請求権放棄”として整理します。それからは全く請求権という用語そのものを使わず、経済協力やら独立祝賀金やらという形に歪曲しようとするのです。
(7-4) あぁ、複雑ですね。
そのことも1次から7次に至るまでの会談を整理する時に、再度整理お願いします。
もう一つ気になってくる事が。
会談が始まった時に、日本政府や日本の世論のほとんど全てが植民地支配に対する合法性、韓日併合が正当であったと思ったということですが、それでも日本のファシズムに対して反戦運動をしたり、朝鮮の独立を支持した日本人たちはい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少し取り留めのない質問で申し訳ございません。
ーとんでもないです。
思いついたことをその時々に質問してもらって結構です。
朝鮮の独立運動を支持した日本人たちですか、えぇ、いたでしょう。
何よりもまず日本の共産党でした。しかし彼らの声はアメリカの冷戦状態が強化される中で排除され、日本の米軍政当局により黙殺されてしまいました。
(7-5) あ、少し慎重になってしまいますね。"共産党"というのだから。
ーそうでしょうね。
しかし日本共産党の歴史を分かれば、考えが変わってきます。彼らは戦争の時期に”日本帝国主義打倒と非圧迫民族解放”を主張しました。
(7-6) 1945年以降はどのように立場を表明したのですか?
ー敗戦後日本共産党は、天皇制支配に対して徹底的に批判的でした。天皇制が日本の民主主義の足かせであり、植民地解放の最大の障害だと明らかにしました。
この部分は非常に重要なことです。
天皇制批判論争は日本政治のアキレス腱です。
このように日本共産党は民族差別に反対し、在日朝鮮人/韓国人の権利を保護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したのです。
(7-7) 当時日本の社会の中でそんな声があったということは知る由もなく、今でも驚くべきことであったりします。
当時日本政府は、解放されたからと偉ぶってる在日朝鮮人たちを、日本社会の治安を乱す暴徒だと位置付けて、吉田政府の差別と迫害が強化されると、日本共産党衆議院林白郎は次のように言いました。
"吉田政府と警察こそが暴徒だ。日本の国民は、祖国の統一と独立のために戦う朝鮮人民の闘争に対し、むしろ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7-8)日本共産党ではなくとも、今でもこのような考え、意識を持った日本人もいるのでしょう?
ーえぇ、いらっしゃいます。
日本の反核平和運動をするさまざまな市民運動家たちがまさにそのような人たちです。反安倍運動をしながら、日本の平和憲法を守ろうとする人たちです。今日、私たちと共に手を携えて行く人たちなのです。
(번역 : 재일교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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