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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장 김원봉 부인 ‘박차정 열사’를 아시나요?

밀양서 박차정 학술심포지움 개최

3.1독립만세 운동 100주년을 맞아 밀양 의열단이 널리 소개됐지만, 의열단 김원봉 단장의 부인 박차정 열사를 아는 이는 드물다.

오로지 총을 들고 한평생을 무장 독립투쟁에 나섰던 그의 생애를 기리는 '박차정(朴次貞) 학술 심포지움'이 경남 밀양시 JK웨딩컨벤션에서 열렸다.

▲지난 9일 경남 밀양시 JK웨딩컨벤션에서 박차정 학술 심포지움에 토론회 장면 ⓒ프레시안 이철우
이날 행사는 심경숙 민주당 경남도당 여성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부산시당 주순희 여성위원장을 좌장으로 전재수 국회의원(부산시당 위원장), 제윤경 의원, 김지수 경남도의회의장, 조규면 조선의열단장 등 내빈들의 축사와 함께 진행됐다.

강대민 전 경성대 교수와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 심옥주 소장의 발제자로, 박차정 의사의 유족인 박의영 목사, 밀양독립운동사 연구소 최필숙 부소장, 박미경 동화작가, 부산동래구의회 유인경 의원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박차정(1910~1944) 은 부산 태생의 여성독립운동가이다. 학창 시절의 철저한 항일 의식과 투쟁 정신은 오빠인 박문희, 박문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박차정의 항일 의식은 1924년 조선 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 동래 일신여학교를 입학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박차정 열사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다가 이 사건으로 구속돼 풀려난 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 땅으로 망명했다.

박차정은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서 활약하였다.

1931년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였고, 1932년 근거지를 중국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1932년 10월 20일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여자부의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박 열사는 1939년 중국 강서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상처를 입어 1944년 중경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1945년 김원봉이 환국시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여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의 송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박차정(朴次貞) 학술 심포지움은 그의 남편을 배출한 밀양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했다.

'독립운동가박차정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이후 시민단체, 일반인들의 관심 및 참여를 위한 생가 기행, 학술 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도 진행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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