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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 미 대외정책을 동결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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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 미 대외정책을 동결시키다

[전쟁국가 미국 3강·⑤] 매카시즘과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미국도 소련처럼 정치적 숙청을 감행"

매카시즘의 부정적 유산은 넓고도 오래 지속됐다. 1950년 2월 그의 첫 폭로 이후 매카란국내안보법, 이민및국적법(1952년), 공산주의통제법(1954년) 등 악법들이 잇달아 제정됐고, 의회에는 기존 하원 비미국행위위원회에 더해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1950년)와 상원 영구조사소위원회(53-54년 매카시 위원장) 등이 생겨나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1949-54년 의회는 모두 109회의 공산주의 조사 활동을 벌였으며, 비미국행위위원회는 1970년대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53년 4월 행정명령 10450을 통해 공무원 충성도 심사를 다시 한 번 강화했다. 특히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미국인 직원에 대해서도 충성도 심사를 벌여 국제기구의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FBI는 1951-55년 이른바 '책임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교사, 변호사 등을 축출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관한 익명의 문서(blind memoranda)를 HUAC 등 의회와 주정부 등 지방정부에 제공해 해고토록 한 것인데, 이는 정상적인 법 절차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FBI의 정보를 행정부 이외의 기관과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FBI는 당시 유일하게 충성도 심사의 피해자를 변호하던 전국변호사협회(National Lawyers Guild)의 사무실을 14차례나(1947-51년) 불법 침입해 이들의 변론 전략을 빼내기도 했다.

매카시즘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상 검증과 탄압을 일상화시켰다. 미국의 독립언론인 I. F. 스톤은 1956년 4월 "소련보다는 덜 가혹하지만 우리 역시 '숙청'을 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까지는 공산주의자들만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수 천 명의 시민들이 2등 시민으로 강등되고, 모욕을 당했으며,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내부 망명객이 됐다. 생계와 명성을 잃었고, 대중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스탈린이 정치적 반대파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매카시즘에 중독됐다"

또한 매카시즘은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아시아정책을 마비시켰다. '중국의 상실'을 이유로 민주당과 국무부가 맹공격을 받은 결과 아시아 및 중국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펼 수 없게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 패배의 원인을 심층 취재한 언론인 데이비드 할버스탐은 "1950년대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매카시즘이라는 독에 중독"됐다면서 "매카시즘은 미국의 중국 및 아시아정책을 동결"시켰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케네디 및 존슨 행정부가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베트남에 군사 개입한 것은 '제2의 중국 상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최고의 엘리트들>, The Best and The Brightist)

미국의 공직 기관 중 매카시즘의 최대 피해자는 민주당과 국무부였다. '중국 상실'을 빌미로 한 공화당의 정치 공세로 민주당은 공산주의에 유약한 정권, 국무부는 공산주의자가 활개 치는 조직으로 낙인 찍혔다. 따라서 민주당으로서는 중국에 이어 또 다른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을 의미했다.

케네디, 존슨이 베트남 군사 개입을 계속한 이유

매카시즘 이후 미국 정부는 자신이 내세운 반공이라는 수사의 포로가 됐다. 국민들을 냉전에 동원하기 위해 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단적으로 과장한 결과 정부 스스로도 반공주의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이제 어떤 정부도 '제2의 중국 상실'을 초래해선 안 됐다. 이런 경직된 태도가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직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베트남을 잃는다는 것은 곧 정권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한때 애치슨은 베트남전쟁을 프랑스의 어리석은 식민전쟁이라고 폄하했지만 매카시즘 이후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반식민 전쟁이 아니라 반공 전쟁이어야 했다. 한국전쟁 이후 호치민은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의 지령을 받는 공산주의자로 비쳐졌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각 민족의 해방투쟁이 아니라 소련의 음모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전초전이었다. 나아가 중국 공산혁명의 세계적 팽창이었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연설)

▲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연합뉴스

사실 '중국의 상실'이란 생각 자체가 대단히 미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이 말은 '중국은 미국 것'이란 생각의 반영이다. 윌슨 대통령 이후 민족 자결을 대외 정책의 원칙으로 천명해온 미국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자기기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어떤 외국이 어느 일방을 지원했던가. 미국이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를 통합했듯이 중국 역시 내전을 통해 자기 민족의 미래를 결정했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 내전에서는 미국의 대대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패배했다는 점이다. 즉 외세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민족 자결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국공내전에 지상군 개입을 삼간 것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군사개입을 위한 미 국민의 동의를 얻어내기도 어려웠고, 산업화가 뒤쳐진 중국은 전략적 가치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외교관은 소신 대신 복종, 학자들은 비판 대신 침묵

그런데 공화당은 중국의 공산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외교관들을 비난하고 숙청했다. 마치 이들이 중국 공산화를 주도한 주범인 것처럼. 숙청 당한 외교관들에게 죄가 있다면 중국의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했고 정직하게 보고했다는 것뿐이다. 이런 양심적이고 유능한 외교관들을 처벌함으로써 이후 국무부에서는 아시아 및 중국 정책에 대해 소신 있게 발언하는 외교관이 사라졌다. 미국의 아시아정책도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할버스탐은 "합리성을 내세웠던 케네디 행정부가 미국의 대외정책 중 가장 불합리한 중국 및 아시아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지적한다. 매카시즘이 만들어낸 반공이라는 굴레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상대한다는 합리적 접근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라이 스티븐슨, 체스터 보울스 등 측근들이 중국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케네디는 그저 웃으며 "맞아요, 바보 같은 정책이죠. 하지만 재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도 중국 문제는 사적으로만 논의돼야 했다. 중국 문제를 고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카시와 같은) 원시인들을 분노케 할 것이므로.

이러한 사정은 학계도 마찬가지였다. 매카시즘에 따른 사상 통제 때문에 아시아 전공 학자들은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없었다. 1950년 출범한 미 상원 국내안보소위원회(SISS)는 국공내전 당시 중국정책에 관한 미 정부 고문 역할을 맡았던 오웬 라티모어를 불러내 무려 1년이나 조사를 벌였다. 그가 '중국의 상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팻 매카란 소위 위원장은 라티모어에 대해 "소련 음모의 의도적이고도 세련된 실행분자"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라티모어는 1952년 위증죄로 기소됐고 1955년이 돼서야 무죄가 확정됐다. 그가 활동했던 태평양관계연구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는 해체됐다.

1960년 로스 코엔은 <미국 정치 속의 차이나 로비(The China Lobby in American Politics)>라는 책을 통해 매카시즘 이후 처음으로 미 중국정책의 문제점을 짚었다. 장개석 정권의 로비로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민당과 미 CIA가 중국 본토 회복을 위한 비밀공작 자금 마련을 위해 마약 거래까지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책은 발간 직후 10년 이상 사실상의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차이나 로비의 압력으로 출판사가 4000부를 자진 회수해 파기했고 800부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오히려 미국의 반공세력은 1963년 <붉은 차이나 로비>(Red China Lobby)라는 책으로 역공을 펼쳤다. 중국 공산당의 로비로 미 국무부가 국민당을 배신한 것이 중국 공산화의 원인이며 마약 거래는 공산당 소행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1970년대 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코엔의 책이 정상적으로 유통된 것은 닉슨의 방중 이후인 1974년이다. 그 정도로 미국 내에서 중국 정책에 대한 비판은 철저하게 봉쇄되고 억압됐다.

당연히 미국의 아시아 학자들은 1960년대 말까지 정부에 순종적이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미국의 각 대학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자발적 강연회(teach-in)가 열렸을 때도 아시아 전공 학자들은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아시아 학자들이 베트남전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었다. 아시아학에 관한 한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억압됐던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학 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68년 '관심 있는 아시아 학자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Asian Scholar)'가 결성된 이후다.

냉전 이후 적어도 20년 이상 미국에서 아시아 문제에 관한 담론과 정책은 매카시즘이 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매카시즘이 초래한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강고했다. 공산 중국과의 역사적 화해를 이룬 인물이 빨갱이 사냥의 선봉장이었던 닉슨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닉슨 외에는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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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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