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 이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大)명문 이리여고'의 92기 졸업생! 2학년 때부터 인권동아리 미쓰리딩에서 활동하며 학교 내외에서 청소년 인권에 관련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인권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2016년, 학생 휴대폰 통제와 관련해 학교에서 열린 교칙개정과정 전반을 지켜보며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2016년,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한 이리여자고등학교는 전북학생인권조례에 기반해 '핸드폰을 수거하지 않는다'라는 교칙이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학급에서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했다. 당시 이리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A교사는 휴대폰에 대한 교칙에 근거해 수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A교사가 담임하는 학급은 휴대폰을 수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A교사의 학급에는 "왜 너네만 휴대폰을 걷지 않냐"는 타 학급의 재학생, 교사의 눈총과 압력이 쏟아졌다. A교사는 교칙을 어기고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할 수 없다며, 휴대폰을 수거하고 싶다면 교칙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학교는 A교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실시해 교칙을 수정하게 되었다.
교칙 제정을 위한 공청회는 전교생(3학년은 수능 공부를 해야 한다며 제외되었다)과 전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이후 휴대폰 관련 교칙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수정된 교칙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사전에 논의되지도 않았던 "'담임의 재량 하에' 휴대폰을 제출할 수 있다"라는 문구가 추가된 것이다. 교칙개정심의위원회에서 휴대폰을 아예 수거하지 않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며 자의적으로 내용을 바꾼 것이다. 학생의 휴대폰에 관한 교칙임에도, 총 10명으로 구성된 교칙개정심의위원회 중 학생은 고작 4명이었다. 설문조사와 공청회를 거쳐 민주적인 절차를 밟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학부모와 교사의 의견이 교칙을 좌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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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칙이 제정된 결과, 학생들은 휴대폰 미제출 동의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더 이상 휴대폰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교칙에 따라 휴대폰 미제출 동의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고 무조건 휴대폰을 수거하기도 했다. 동의서를 몇십장씩 인쇄해 학생들에게 무한정 배포하는 학급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동아리 구성원 대부분이 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학교 내 인권동아리였던 미쓰리딩은 학교 밖 소모임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이리여고를 졸업했지만, 미쓰리딩에서의 활동은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올해, 재학생 한분으로부터 올해 새로 바뀐 교칙에 관해 듣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 바뀐 교칙의 내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학교장이 정한 교육시간 중 전자기기를 사용하거나 책상 위에 둔 경우 그 학생은 전자기기를 교내에 반입하는 것을 불허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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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21세기 2019년이 아니라 고조선인 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현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분에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교칙이 제정되었는지 여쭤보았다. 답변은 절망적이었다. "학급 회의 때 교칙에 대해 논의한 적은 없다. 공청회는 학생회 임원끼리만 한 것 같다. 새로 바뀌는 교칙에 대해 다른 학생들은 통보 식으로 들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2019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을 때 엄마께서 말씀해 주신 일화가 떠올랐다. 엄마의 친구분이 자녀의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진학 학교를 선별하고자 각 고등학교에 전화를 해서 "그 학교는 무엇이 좋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그 질문에 우리 학교의 교감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 학교는 인권친화적입니다!"
시트콤도 이런 시트콤이 없다. '인권친화적'이라고 자랑했던 학교에서, 학생에게 적용되는 교칙을 학생들의 제대로 수렴하지도,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개정해버렸다니. 학교 현장에서 학생 자치는, 학생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학생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묵살해버리면서, 어떻게 인권친화적인 학교가 될 수 있다는 말일까?
현재 이리여고는 해당 휴대전화 관련 교칙에 관해, 공청회를 진행했으니 학생들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해 줬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의 의견을 들은 척은 해야겠으니 공청회는 진행했지만, 공청회에 학생들이 참여하고 충분히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장하지는 않았다.
나는 학생의 학교운영 참여권의 법적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교칙을 바꿀 때 학생 의견을 수렴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학생 의견을 얼마나 반영할지는 학교장 마음대로인 상황이다. 법적으로 학생들의 학교운영 참여권을 비롯해 교칙 제‧개정 과정에서의 심의권이 보장되어야 학생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다. 특히 학생에게 적용되는 교칙인 경우 학생의 의견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며 교칙개정심의위원회 등 학교운영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전체 구성원 중 반 이상의 자리를 학생이 차지해야 한다.
초중등교육법 제 31조에는 학교운영위원회의의 설치에 관한 규정이 있다. 학교의 학칙, 예결산, 교육과정 운영방안 등 학교운영을 총체적으로 심의하는 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원 대표, 학부모 대표, 지역사회 인사"만으로 구성되도록 되어 있다. 학생의 참여는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학교운영위원회에 학생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의 참여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교내 민주주의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교육의 첫 번째 목표는 '민주시민 양성'이다. 공부를 잘하게 하여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 '학생다움'을 지키는 학생으로 가르치는 것이 교육과 학교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과 교사 간의 수직적인 권력이 존재하고 지배적이고 비민주적인 학교 내에서 학생인권은 보호 받을 수 없으며 이러한 교육으로는 '민주시민양성'이라는 교육 목적을 이뤄낼 수도 없다. 학생에게 복종만을 강요하는 학교에서 민주시민 양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는 학생‧청소년의 참여를 보기 좋게 꾸며내는 것에만 급급할 뿐이다. 학교운영 참여권 등 실질적인 청소년 참여권이 없는 학내민주주의가 지속된다면 '민주시민양성'이라는 교육 목적은 그림의 떡과 다름없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교장과 교사, 학부모 뿐 아니라 학생도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장과 교감 임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학생들은 학교의 정해진 예산 사용범위 안에서 예산을 집행한다. 또 학교 내부의 규칙, 학교 기숙사 규칙 제정과 교과서 및 기타 교재의 결정, 학급 사항과 숙제에 관한 결정, 수업 참관, 학생 진급·징계에 관한 문제, 학교 행사, 동아리 활동, 학교 분할·합병·폐교 등에 대해 학생들이 참여하여 학교와 협의한다. 한국에서도 학생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를 보장하고 학교운영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교는 우리 사회의 교육 목적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진정한 학생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리고 학생인권과 학교 내 청소년 참여권 보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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