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영어판이 출간되어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던 비외른 롬보르의 책 <회의적 환경주의자>가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홍욱희ㆍ김승욱 옮김, 에코리브르 간)되어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외국에서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대다수 언론이 비중있게 다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조선ㆍ중앙ㆍ동아는 물론이고 한겨레ㆍ경향신문 등 대다수 언론이 이 책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그나마 문화ㆍ한국ㆍ한겨레를 제외하고는 기사 내용도 긍정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언론의 보도 내용은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롬보르의 주장이 얼마나 과학적 신빙성을 갖는 것인지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특한' 우선순위 계산법을 주장하며 환경단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롬보르의 논법이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은 그간 별로 많지 않았다.
이번 '과학기술@사회' 칼럼은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캐트린 슐츠의 글을 번역해 싣는다. 캐트린 슐츠의 지적은 최근 증가하고 있는 많은 환경 이슈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인터넷 환경 잡지인 Grist Magazine에 실렸던 특집글 중 하나를 옮긴 이 글의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Citisci Group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숨은 의도**
이곳은 덴마크,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평범한 성취들(포괄적 사회복지, 페스트리 빵, 한스 안데르센)로 알려져 있는 조화로운 북구의 나라다. 그리고 여기 이 나라에서 나온 최신 수출품이 등장했다. 우리가 동화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갖고 나타난 비외른 롬보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 메시지를 전파하는 매체는 500쪽이 넘는 롬보르의 새 책 <회의적 환경주의자>이다. 이 책은 부제에서 자신 있게 내세운 대로 "세계의 실제 상황"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롬보르의 논지는 매우 간단하다. 환경주의자들이 대중을 속여 세계가 자포자기 상태로 빠지고 있다고 믿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실은 1장의 제목이 단언하고 있는 것처럼 "상황은 개선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학 저술로 보자면, <회의적 환경주의자>는 마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쓴 기말보고서처럼 직설적이고 흐리멍덩한 논리를 펼치고 있어 영락없는 C- 학점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언론이 롬보르에 열광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보통인 출판물들(좌파 성향의 런던 <가디언>과 보수적인 <이코노미스트>)과 이런 주제에 정통해 있을 사람들(<뉴욕 타임t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서평자들)까지도 롬보르에 호감을 표시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초당파적인 언론의 구애를 빚어낸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의 전문적 자격 때문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롬보르는 통계학 전공의 부교수로서, 생물학, 생태학 내지 환경과학과 연관된 그 어떤 분야에서도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하거나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또한 저자의 주장 때문도 아니다. 그의 주장은 동료심사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리스트>의 이번 특집에서 일급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 많은 경우 한마디로 틀린 것이다.
언론이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서 좋아하는 점은 그것이 쓰이게 된 이유에 관한 얘기다. 이는 진위 여부가 미심쩍기는 하지만 일단 옮겨 보자면 이런 식이다. 옛날 옛적에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생태 파괴로부터 지구를 구한다는 생각을 진정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이렇게 믿은 나머지 그린피스에 회원으로 가입했고 육식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환경에 대한 우려가 대부분 허튼소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줄리언 사이먼의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를 보고 기겁을 한 롬보르는 사이먼이 틀렸음을 보여주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오히려 역으로 그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옳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를 풀어버린 롬보르는 나머지 우리 모두를 계몽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얘기다. 그리고 언론은 이러한 창조 신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짐 제퍼즈①로부터 제인 로②에 이르기까지 도중에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은 아주 잘 팔리는 기사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는 것이 항상 말이 되는 것은 아닌데,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롬보르는 환경을 다룬 대다수의 일차 연구들이 "대체로 전문적으로 유능하며 균형 잡혀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가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신이 소싯적에 몸담았다고 하는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들이다.
그에 따르면 환경단체들은 각종의 환경재난 ― 지구온난화, 삼림 파괴, 멸종, 대기오염, 에너지 고갈, 식량 부족 등등등 ― 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을 지어내 왔다. 그는 이러한 뻔한 이야기들이 a) 틀렸고 b) 너무나 널리 효과적으로 유포되어 문제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정책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a)에 대해서는 <그리스트> 특집에 실린 다른 글들에서 이 일에 적임인 저명한 과학자들이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므로, 나는 두 번째 점(b)을 다루도록 하겠다. 언론에서는 두 번째 점이 대체로 무시되었으나 이는 첫 번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이 롬보르 편인지 아니면 '뻔한 이야기'의 편인지의 문제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목표들과 잘못된 선택**
롬보르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정책결정(informed decision-making)을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매우 중요하다는, 전적으로 합당한 점을 지적하면서 화두를 꺼낸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정보가 왜곡되어 환경의 현 상태가 실제 모습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보다 더 어둡게 그려지고 있다면, 그에 따라 우리는 제한된 자원을 다른 중요한 목표들이 아닌 환경을 위해 씀으로써 이를 왜곡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옳은 얘기다. 그러나 이어 롬보르는 환경운동이 옹호하는 목표들을 의도적으로 골라낸 다른 "훌륭한 목표"들과 비교해 이들간의 경중을 따진다. 그는 환경을 보호할 것인지 아니면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장을 확대하고, 예술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세금을 감면할 것"인지 사이에서 책임있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달린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계하라, 하고 롬보르는 덧붙이고 있다. 환경주의자들은 세계의 상태를 최대한 어두워 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상태를 나쁘게 보이도록 하면 할수록 우리가 병원이나 유치원 등등보다 환경에 더 많은 돈을 쓸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불과 몇 쪽 뒤에 그는 '뻔한 이야기'의 목적이 "병원, 주간 탁아소 등"보다 환경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주장한다.
이런 식의 논법은 두말할 것 없이 엉터리이며 ― 롬보르는 보건, 복지, 교육을 희생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덤비는 환경단체가 정말 하나라도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사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불화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환경운동이 다른 중요한 진보적 목표들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공격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롬보르는 환경운동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충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책임을 환경단체에 떠넘김으로써 분열을 유도해 그 중 좌파를 자기편으로 끌어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롬보르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었음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적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셈이 된다. 실상 우리는 통계적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정작 생각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롬보르의 말대로 "우리는 결코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우선순위의 설정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가 환경을 이를테면 산업보조금이나 국방비 지출과 비교하지 않고 병원이나 보육 문제하고만 비교해 경중을 따져보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뻔한 이야기 vs. 생명**
환경운동에 그것이 야기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 후, 롬보르는 이어 환경운동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가져보지 못한 권력을 쥐어주려 한다. 롬보르는 우루과이에서 인도, 남한에서 나이지리아에 걸치는 모든 나라들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매우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의 상당부분은 월드워치 연구소의 레스터 브라운에게 있음이 분명하다. 롬보르는 '뻔한 이야기'들을 추적해 보면 그 출처가 종종 그에게로 소급된다고 말하고 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색인을 보면 브라운은 15번 언급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핵 발전이나 오존층 구멍, 교토 협약보다도 더 많은 횟수이다.)
이는 엄청난 짐을 레스터 브라운, 혹은 서구의 환경단체들이나 언론 일반에 떠넘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들 각자의 능력을 심하게 무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모두는 언론에 의해 다소간 영향을 받는다(<타임>지가 평균적인 나이지리아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줄지에 대해서는 의아심이 생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롬보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 때문에 '뻔한 이야기'들이 설득력을 가질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다. 롬보르는 환경운동이 거대한 상의하달식 음모집단이며, 주류 환경단체로부터 발원해 그 촉수를 CNN에서 세계은행에 이르는 모든 것에 미치는 것인 양 그려내고 있다. 이런 그에게 있어 수돗물 속에 녹아든 시안화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을, 인근에 들어선 제련 공장과 싸우는 지역, 혹은 세계 곳곳에서 환경 악화의 결과와 매일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롬보르의 구도에서 보면 이와 같은 모든 풀뿌리 환경운동은 합리적인 우려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불합리한 공포 때문에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롬보르는 "뻔한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두려움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민주적 자유에 대한 도전이며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기본적 권리를 침해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손상을 입힌다. 그런 이야기들 때문에 우리는 마치 포위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며, 진퇴양난의 궁지에서 끊임없이 행동에 나서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이는 우리가 종종 감정적인 직감에 근거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상당히 강한 공격이지만, 다시 한번(그리고 놀랄 일도 아니지만) 롬보르는 환경 악화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공포 탓에 성급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이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단 하나의 사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롬보르조차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제, 고용, 예산 적자, 범죄, 마약, 보건에 대해 훨씬 더 걱정을 하고 있으며, 반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환경 문제가 2%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통계는 잊어버리자. 롬보르의 말을 들으면 당신은 생태파시스트들이 재생가능한 칫솔 공급에 돈을 대기 위해 병원과 유치원이 황폐화되도록 내버려두는 녹색독재(Greenocracy) 하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이처럼 화려한 글발과 정치적 분열 책동은 롬보르가 겉으로 내세운 객관성을 너무나 크게 갉아먹어 3,000개의 각주로도 이를 만회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환경주의자들이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증거들을 찾는 과정에서 때로는 사실과 전략에서의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 실수를 한 번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경주의자들을 대중의 감정과 정치인들의 돈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교활한 배후 음모가로 묘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는 그가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짜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엉뚱한 데서 시비를 걸고 있다. 만약 롬보르의 적에서 우상으로 바뀐 줄리언 사이먼의 말이 실현된다면 ― "삶의 물질적 조건들이 대부분의 사람, 대부분의 국가, 대부분의 시간에 대해 계속해서 향상되"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 그것은 환경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환경운동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① 원래 공화당 상원의원이었으나 2001년 봄 부시 행정부의 보수적 정책들에 반발해 공화당을 탈당하고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 그의 탈당으로 상원 내에서 민주-공화간의 팽팽했던 균형이 깨어져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던 주요 정책들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다. ― 옮긴이
② 미 연방대법원에서 여성의 낙태를 합법화한 역사적 판결인 1973년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에서 주요 고소인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본명은 노마 매커베이이다. 원래 낙태 옹호론자였으나 1995년 세례를 받은 이후 열렬한 낙태 반대론자로 입장을 바꾸었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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