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연말 회식 자리였어요. 장소를 빌려 직접 음식을 해 먹었는데, 일본인 부장이 주변에 있는 여자 직원을 둘러보더니 황당한 말을 하더라고요. '술집에서 이만큼(여자 직원 수만큼) 부르면 돈이 얼마냐?' 그 말에 누가 답을 하겠어요. 너무 황당해서 여직원들끼리 서로 멀뚱히 바라만 봤어요."
일본 기업 자회사(이하 C사)에서 근무하던 김지영(가명) 씨. 그는 직장 내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지난 5월 말 퇴사했다. 그리고 6월 5일 고용노동부 서울강남지청에 진정을 냈다.
무역업을 하는 C사는 일본 기업이 100% 출자한 한국 법인이다. 김 씨는 2010년대 초반 입사했다. 대표이사는 일본인이며, 10여 명의 한국인이 C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문제는 본사인 일본 기업 임원과 부장이 자회사의 행사 참여나 관리 목적으로 한국을 자주 방문한다는 점이다. 김 씨를 포함한 여직원들은 일본인 상사의 출장 날짜가 고지되면 한숨부터 내쉬었다.
"행사장에서 일본인 임원이 저에게 새집으로 이사했다고 자랑하면서 갑자기 휴대폰으로 찍은 욕실 사진을 눈앞에 들이밀더라고요. 그러더니 '욕실이 이렇게 큰데 같이 들어가서 목욕할래?' 이러더라고요. 당황했죠. 이 임원은 평소 이런 식의 성희롱을 많이 했어요. 또 한 번은 제가 예약한 호텔 관련해서 '이번 호텔은 어떠신가요?'라고 물었더니, '방에 같이 올라갈래?' 이러더라고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참았죠."
일본인 상사들, 성희롱과 혐오 발언 일삼아
성희롱 발언만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인 상사들은 공식 석상에서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한국 대리점 한 곳의 직원이 사고를 친 적이 있어요. 그러자 일본 임원이 전 직원에게 공개 메일을 보내 '(문제의) 직원은 '한국인의 표본''이라며 한국인 직원 전체를 조롱하더라고요. 이뿐만이 아니에요. 한 번은 모 호텔 일식집에서 회식을 했는데, 한국인 셰프가 우리 앞에서 '참치 해체쇼'를 했어요. 그런데 그걸 본 일본인 상사가 '한국인은 참치 해체도 제대로 못 하면서 참치를 먹는다. 참치를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인이랑 회식하는 자리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모르겠어요.
일본 소녀상을 모욕하기도 했어요. 한 직원이 출장 온 일본 상사 차량을 운전하고 대리점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일본인 상사가 소녀상이 있는 곳에 가자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직원이 일본 대사관 앞으로 데려다줬죠. 그랬더니, 소녀상과 소녀상 주변 한국인들을 가리키며 비웃었다는 거예요. 소녀상이랑 한국인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요. 그 직원이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정말 불편했어요."
김 씨 입사 초기에는 이런 성희롱이나 혐오가 자주 발생하지 않았다. 2015년 대표이사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했다. 대표이사는 일본인 상사들의 성희롱과 혐오 발언을 묵인하거나 무시했다. 여직원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임원과 부장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한 번은 대표이사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랬더니, '일본 여자들은 그런 말을 들어도 그냥 웃고 넘긴다'고 말하는 거예요. 어이가 없었죠.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또 다른 성희롱을 하는 거예요. '본사 여자 직원 중에 뚱뚱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의자에 앉으면 못 일어날 거야. 그 여자 직원은 남편과 성관계를 할 때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이런 말 하면 성희롱이냐?' 이러더라고요. 선을 넘은 거죠."
대표이사 자신이 성희롱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지난 2월로 기억해요. 중국 출장을 다녀온 대표이사가 여직원 한 명을 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다짜고짜 '기뻐하라'라고 하더라고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중국 사람에게 회사 소개 책자에 실린 여직원 단체 사진을 가리키며 '이 중에 어떤 게(どれが) 제일 괜찮냐?'고 물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부른 여직원이 '제일 괜찮다'는 답을 받았다며 웃더라고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무척 불쾌했죠. 그러자 대표이사 하는 말이 '중국에서 인기 있는 거(스타일) 아니야?'라며 또 웃고. 여직원이 물건도 아닌데 '어떤 게'라고 칭하면서 괜찮네 어쩌네 한 거죠."
대표이사는 매년 실시되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도 받지 않았다. 한국어 교육이라는 게 이유였다. 김 씨가 생각하기에 대표이사는 직장 내 성희롱 및 괴롭힘 문제에 개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일본 회사에 다니니까 불합리해도 그 문화에 따라야 하는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성희롱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야후재팬(www.yahoo.co.jp)에서 검색했어요. 그랬더니, 일본사회도 성희롱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뚜렷했어요. 그런데 회사 일본인 상사들은 왜 그럴까 싶더라고요. 직원들이 한국인이어서 그런 건지…."
결국, 김 씨는 반복되는 성희롱과 혐오 발언 그리고 개선되지 않는 현실을 견디다 못해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강남지청에 자신이 겪은 성희롱 관련 진정을 제기했다. 그러나 50여 일이 지난 지금, 강남지청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
지청은 지난 12일 김 씨에게 7월 중에는 진정 처리가 완료될 것 같다고 통보했다. 지청에서는 회사가 성희롱 관련으로 처벌을 받으면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가해자(일본 상사)를 조사하고 사규에 따라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후에 연락하겠다고 전달했다.
반면, 성차별·성희롱·부당해고 등 여성 노동 사례를 상담하고 있는 서울여성노동자회는 "근로감독관이 사건 조사 후 성희롱 사실이 인정되면 사업주에게 가해자 징계 및 피해자 보호 등의 시정 지시를 한다"면서 "근로감독관이 처리 기한을 정하지 않은 것 같으니 한 번 더 문의해 보라"고 조언했다.
김 씨는 성희롱 진정에 대한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강남지청은 "확인 불가"…C사는 "조사 중"
강남지청은 <프레시안>과의 전화에서 "진정 여부 등은 진정인의 동의 없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강남지청에 출석한 C사 대리인은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7월 2일 근로감독관을 만났다"며 "'진정 내용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사측 대리인은 그러면서 김 씨가 제기한 성희롱 건과 관련해 사내 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고 밝혔다. 사측 대리인은 "제3자인 변호사를 중심으로 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정 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파악하고 있으며 90% 정도 조사가 이뤄졌다"면서도 "기본적으로 성희롱과 괴롭힘 등은 없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원 100명 중 8명이 직장 내 성희롱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피해자의 81.6% 이상이 '참고 넘어갔다'고 응답했다.
성희롱 행위자는 대부분 남성(83.6%)이었으며, 직급은 주로 상급자(61.1%)였다. 성희롱이 발생한 곳은 회식장소(43.7%)가 가장 많았으며, 다음이 사무실(36.8%)이었다.
성희롱 유형은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5.3%), '음담패설 및 성적 농담'(3.4%), '회식에서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강요'(2.7%) 등이 다수였다.
김 씨는 "그만둘 즈음에는 직장 내 성희롱이나 괴롭힘이 일본인 상사뿐 아니라 한국인 직원들도 사이에서도 퍼지고 있었다"며 "지금 일본인 상사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오면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참았는데, 상황이 점점 더 나빠졌다. 가해자 처벌이 반드시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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