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영국 유조선 억류를 둘러싸고 유럽과 이란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탈퇴한 핵 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놓고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전선'이 유럽으로까지 넓어지는 모양새다.
유럽 측은 19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가 억류한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 호와 관련, 즉시 석방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이 유조선이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신호를 끄고 정해진 해로를 이용하지 않은 데다 이란 어선을 충돌하고서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적 절차에 따라 처분하겠다면서 유럽 측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당사국인 영국은 이란에 대한 제재까지 검토하는 등 대책 마련에 긴급히 착수했다.
영국 정부는 19일과 20일 이틀 연속으로 내각의 긴급 안보 관계 장관 회의인 '코브라'(COBRA)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20일에는 주영 이란 대사대리를 불러 자국 유조선의 억류를 엄중히 항의하고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제러미 헌트 외무장관은 유조선 나포 직후인 19일 스카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이 상황이 신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게 우리의 명확한 입장이다"라면서 "군사적 옵션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외교적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헌트 장관은 20일에도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강하게 항의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영국 정부가 이란 정권을 겨냥한 제재 방안을 마련 중이며, 헌트 장관이 자산 동결을 포함한 외교·경제 조치들을 21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또 이란 핵 합의 체결에 따라 2016년 해제된 유럽연합(EU)과 유엔의 대(對)이란 제재를 복원하는 방안도 추진할 수 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이와 관련, 영국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유엔 사무총장에 서한을 보내 이란 당국의 유조선 나포를 '불법적 간섭'이라고 주장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서한은 "유조선은 국제해협에서 국제법에 따라 적법한 통과통항(transit passage)을 하고 있었다. 적법한 통과통항 권리가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란의 조처는 불법적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정황을 볼 때 이란의 이번 영국 유조선 억류가 4일 영국령 지브롤터 당국이 시리아로 원유를 판매한다며 이란 유조선을 나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만큼 양국 유조선의 '맞교환'이 이뤄질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프랑스 외무부는 20일 낸 성명에서 "이란에 즉각 선박과 선원들을 석방하고 걸프 해역에서의 항행의 자유 원칙을 지켜달라고 요구한다"면서 "이란의 이런 행동은 걸프 지역에서 필요한 긴장 완화를 가로막는다"고 강조했다.
독일 외무부도 "우리는 이란에 즉각 선박들을 풀어 주라고 요구한다"고 밝혔으며, 폴란드 외무부 역시 성명을 내고 이란이 항행의 자유를 준수하고 억류한 선박을 지체 없이 풀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럽연합(EU)은 20일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영국 선적의 유조선을 나포한 것과 관련, 긴장을 심화하는 위험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EU의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대외관계청(EEAS)도 20일 낸 성명에서 "이미 호르무즈해협에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긴장이 더 고조하고 사태 해결을 방해한다"라고 지적했다.
에콰도르를 방문 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헌트 영국 외무장관과 전화 통화를 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레닌 모레노 에콰도르 대통령과 연 기자회견에서 이란의 영국 유조선 억류에 대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국가의 행동이 아니다"라며 "근본적 변화 징후는 없지만 이란 정권이 결국에는 정상 국가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의 압박에도 이란은 정해진 법적 절차대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일축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은 20일 트위터에 "페르시아만(걸프 해역)에서 이란의 행동은 국제적 해양 법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페르시아만과 호르무즈 해협의 안보를 지키는 곳은 이란이며 영국은 더는 미국의 경제 테러리즘(제재)의 장신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자리프 장관은 또 트위터에서 지난 4일 영국령 지브롤터 당국이 자국 유조선 그레이스 1호를 억류한 것을 가리켜 "해적 행위"라고도 비난했다.
이번 유조선 억류가 지브롤터에서의 자국 유조선 나포에 대한 대응 조치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이란은 영국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지브롤터 해협에서 이란 유조선을 억류했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이란의 '유조선 충돌'은 위기에 처한 핵 합의의 존폐에도 초대형 악재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5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핵 합의를 탈퇴한 뒤 핵 합의에 서명한 유럽(영·프·독)과 EU는 1년여간 핵 합의를 유지하는 방안을 이란과 협의했다.
그러나 이란은 유럽 측이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핵 합의 이행에 미온적이라면서 5월8일부터 60일 단위로 핵 합의 이행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
핵 합의 존속을 위해 양측이 적극적으로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유조선 억류로 오히려 긴장이 고조하면서 핵합의의 생존이 더 불안해졌다.
이란은 9월5일까지 유럽이 이란산 원유 수입을 재개하지 않으면 핵합의 이행을 더 축소하겠다고 예고했다. 이 조처에는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까지 높이는 방안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또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자국 상선의 안전한 항행을 보호하겠다면서 유럽 주요국이 해군 전력을 배치하면 이란과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한편 이란의 영국 유조선 억류 하루 뒤인 20일 국영 IRNA통신, 반국영 메흐르 통신 등 몇몇 이란 언론 매체들의 이란어 트위터 계정이 갑자기 차단됐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이들 매체는 트위터 계정 차단이 유조선 억류 보도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지만 트위터 측은 소수파 종교인 바하이교 신도 박해와 관련해 취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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