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별명은 호빵맨이었다. 아마 그의 외모때문에 붙은 별명인 것 같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 속 호빵맨과 실제 통하는 구석이 많다. 호빵맨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초인적인 슈퍼 히어로와는 조금 다르다. 일단 얼굴부터 친숙한 호빵이고, 그 호빵이 물에 젖거나 곰팡이가 슬면 힘이 약해져 악당에게 당하기도 한다. 필살기도 눈에 띄는 화려한 기술이 아닌 평범한 호빵 펀치이다. 호빵맨의 매력은 강함이나 화려함에 있지 않다. 그의 매력은 배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머리를 떼어주는 순수한 이타주의에 있다. 누가 뭐라해도 개의치 않고 꾸준히 자신의 역할을 해나간다. 그런 호빵맨을 보며 늘 짠하면서도 즐거웠다.
노회찬도 마찬가지 였다. 늘 우리를 짠하게 하면서도 웃음 짓게 하는 사람. 평생을 불평등과 맞서왔던 사람,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해도, 선거에서 몇번을 떨어지고도 상상도 못한 유머로 우리를 웃기던 사람. '국민을 원망하기 시작하면 정치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결코 국민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사람. 그런 그가 참 신기했다. 이 척박한 진보정치의 한가운데에서, 날이 한껏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 정치의 현장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정치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2016년 말, 정의당 내 행사에 함께 참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그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당시 정의당 부대표로 일하며 나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때였다. 한껏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뜸 그에게 물었다.
"해결이 안 되는 일로 힘들 때는 보통 어떻게 하셨나요? 제가 겪는 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일을 겪으셨을 텐데.. 어떻게 수십년 동안 이 길을 걸어오셨는지.. 사람들 사이의 증오와 갈등... 생각만으로 끔찍합니다.”
"그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 너무 괴로울 때면 자기 전에 기도를 했어.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해결이 되어 있기를!”
당찬 그의 목소리가 무색하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도라니. 늘 가시밭길을 가면서도 호빵맨처럼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아니 도리어 함께 걷던 이들을 웃겨주던 그가 자기 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라니. 그렇게 맘 졸이며 기도하던 호빵맨은 다시 아침이 되면 환한 웃음으로 배고픈 이들에게 자신의 머리 한 귀퉁이 빵 조각을 떼어주었다. 지금 그의 답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쪼그라든다. 당신께서 1년 전 번뇌의 밤을 지새웠을 때에도 그러셨을까 싶어서.
벌써 1년. 매순간 우리를 짠하게 만들던 진보정치의 호빵맨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아직도 고비의 순간마다 '노회찬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그를 보내주지 못하고 있다. 지난 1년간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순간의 농담이었던 것처럼, 다시 그가 브이를 그리며 장난끼 어린 얼굴로 짠하고 등장할 것처럼.
호빵맨 이후, 호빵맨을 계승하여 새롭게 등장한 슈퍼 히어로가 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인기있는 '원펀맨'이라는 히어로다. 원펀맨의 둥그런 대머리와 히어로 복장, 그리고 주기술인 보통펀치를 보면 자연스레 호빵맨이 떠오른다. 하지만 원펀맨은 호빵맨과는 확연히 다르다. 호빵맨이 이타주의의 화신 같은 히어로라면 원펀맨은 '취미로' 히어로를 한다. 예컨대 자신의 일상을 누리다가(게임을 한다던가), 지구가 위기가 닥쳤을 때 무심한 표정으로 지구를 구해낸다. 괴인과 슬렁슬렁 싸우다 슈퍼마켓 바겐세일에 늦은 것을 깨닫고는 한방에 괴인을 해치우고 후다닥 달려간다. 호빵맨 노회찬도 보았으면 좋아했을, 미워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다.
우리의 호빵맨은 혼신을 다해 당신의 역할을 다 했다. 그 역할이 너무 극진했기에, 우리를 이렇게 뼈아픈 그리움과 미안함 속에 남겨두고 하늘로 날아갔다.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호빵맨이 없는 오늘,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 속이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이따금 함께 힘을 합쳐야 할 이들이 증오의 언어를 주고 받으며 횡으로 종으로 갈라진다. 이 비극의 현장에서 진보정치는 아직 갈피를 못잡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호빵맨을 보고 진보정당에 들어온 우리가 새로운 유형의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누가 뭐라해도 뻔뻔해 보일 정도로 끄떡없는 히어로. 우리를 갈라놓고 웃음 짓는 기득권 세력에게 시크한 원펀치를 날릴 수 있는 히어로.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히어로. 더 이상 호빵맨이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수많은 평범한 원펀맨들이 통쾌한 펀치를 날릴 세상을 꿈꾼다.
(프레시안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와 함께 노회찬 서거 1주기 추모주간(7월 15일-28일)을 맞아 추모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