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벌써 노회찬 동지의 1주기다. 시간이 하릴 없이 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유언은 나를 계속 짓누르고 있다. 1년 동안 과연 얼마나 나아갔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1년이었지만 자료와 통계, 여러 글들을 읽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녹슨 머리를 굴려 보는 수밖에 없는 기간이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은 공황 상태에서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절망에 처한 대중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라도 성사시키려면 오히려 공황상태가 약이 될 터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 OECD 회원국 중 자살율 2위, 출산율 최하위라는 통계를 보고도 공황감이 들지 않는다면 서생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노회찬 동지라면 이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일갈했을까. 촌철살인의 재담으로 웃음과 각성을 동시에 주었을까.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그가 없는 빈 자리는 매일매일 커질 것이고 그 부담은 남은 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2.
필자는 그를 회고하고 싶지 않다. 회고는 노회찬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노회찬은 끝없는 시도와 미래를 의미했다. 그는 전략가였다. 전략가에게 중요한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에 실현시키기 위한 방책인데, 그는 좁디 좁은 그 길을 헤쳐 나갔다. 필자 같은 서생들은 그를 믿고 많은 정책을 쏟아내었다. 어떤 상황이 되면 그가 그 정책을 수면위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한 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던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목표로 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그 많은 사람들을 제단에 바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었던가. 이 모든 후회와 회한은 가끔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짓누른다. 나에게 남은 것은 일말의 책임감일 뿐 아닌가.
노회찬 동지는 풍류와 멋을 아는 재사로서 일세를 풍미하며 보다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2년 브라질 노동자당을 방문하기 위해 들렸던 브라질 상파울로의 뒷골목에서 쌉쌀한 브라질 맥주 한 잔에 이태리어로 '오 솔레미오'를 멋지게 부르던 노회찬의 모습은 이제 아련하기만 하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문헌으로 '삼국지'와 '근로기준법'을 들던 그 유려한 언변은 이제 과거 방송자료를 뒤져봐야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편안히 살기에는 시대와 양심이 그를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을 삼킬 것 같은 원대한 포부가 있었기에 그는 그 험난하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 이상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처음에는 노회찬을 반대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 노회찬주의자가 되었다.
3.
개인은 불완전하고 유한하다. 누구나 비루하고 괴로운 삶 속에 허우적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동적 사회운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회찬은 이를 알았기에 생의 마지막까지 현대의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만든 정당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것이다.
제2, 제3의 노회찬을 만들자고 한다. 이 말에 다소의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사람들이 먼지처럼 사라져 가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은 허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인 진보정당일 것이다.
필자가 가지는 책임감의 정체는 노회찬이 가졌던 이상에 모든 것을 불살랐던 시절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공명이 언제까지 갈 지는 알 수 없지만 힘이 다 할 때까지는 나아가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면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이 노회찬의 유언을 마음에 새기는 유일한 방법이리라.
(프레시안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와 함께 노회찬 서거 1주기 추모주간(7월 15일-28일)을 맞아 추모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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