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파병 결의안에 반대해온 프랑스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국가들이 미국의 수정안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주목된다. 유엔 안보리에서 파병안이 통과될 경우 우리나라 정부도 파병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아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안보리 국가들은 수정결의안을 통과시키더라도 파병이나 주둔비-재건비 분담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미국이 안보리국가들과 물밑협상을 통해 결의안을 통과시킨 후 실제 파병과 주둔-재건비 등의 비용은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떠넘기려는 '음모'가 작동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프랑스, 미국과 타협키로"**
영국의 로이터통신은 17일(현지시간)"프랑스가 마침내 이라크 주권인정과 행정권력이양을 단계적으로 구분지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그동안 이라크 파병시 미국이 아닌 유엔이 지휘권을 쥐어야 하며, "한달내에 이라크인에게 자치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
따라서 '선(先)주권인정 후(後)권력이양'이라는 프랑스의 이같은 입장변화는 종전의 태도에서 크게 후퇴한 것으로, 사실상 미국측이 제시한 수정 결의안을 수용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프랑스 외무부 대변인도 이에 앞서 16일 "필요한 것은 (이라크) 주권을 인정해주는 매우 강력한 정치적 도약"이라고 말해 이라크의 주권을 상징적으로 인정하면 미국의 수정 결의안에 동의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도 18일(현지시간) 이와 관련,"프랑스는 유엔에서 이라크의 잠정통치기구인 과도통치위원회를 조기에 승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에 대한 구체적 정치권한 이양에 관해서는 '단계적'인 대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파리발로 보도했다.
신문은 이어 "프랑스 외교당국이 이라크 정상화를 '상징적인 주권 회복' 조치와 '권한 이양' 2단계로 나누어 진행할 뜻임을 표명했다"면서 "이는 이라크 결의안을 둘러싼 안보리 협의에 유연한 자세로 임할 의향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AP통신 등도 17일 미국 고위관리 말을 인용, "현재 미국은 이라크의 정치, 경제 재건에 있어 유엔의 활발한 역할을 보장하는 새 이라크 결의안을 제출하는 문제를 고려중"이라며 "우리는 원안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정안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초안보다 유엔의 활발한 역할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한 것이 될 것"이라고 밝혀, 수정안 합의에 근접했음을 시사했다.
이라크 사태 악화로 최대위기에 몰린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유엔 안보리국가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반드시 이번에 유엔 결의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을 누차 밝히고 있다. 결의안만 통과될 경우 한국 등 이른바 '동맹국'들에게 당당히 파병과 주둔-재건비 부담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형식적 정권이양은 가능하나 '군'과 '재건사업'은 못주겠다"**
현재 프랑스는 이라크 주권 인정과 관련, 미국주도의 과도행정처(CPA)가 지명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와 이 위원회가 조성한 '이라크 잠정 내각' 등 두 조직을 이라크의 정통정권으로 인정한 뒤 유엔 안보리가 이 정권의 주권을 한달이내에 승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한 및 재정부문을 포함한 '실질적 권한 이양'에 관해 미국은 "이라크 부처와 행정기관이 하루아침에 모든 실무를 담당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만큼 이양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밝혀 실질적 권한이양은 몇년후에나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와 관련, 당초에는 "미국 주도 과도행정처가 임명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를 승인하면 '점령추인'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해 왔으나 올 여름이후 승인 쪽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지난 5일 유엔 안보리 국가들에게 이라크 결의안을 제출한 미국은 '상징적 권력이양'에 대해서는 수용의사를 밝히면서, 이라크에 파견할 다국적군의 지휘권과 이라크 재건 로드맵(일정표)은 미국이 계속 장악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요컨대 친미적 이라크 정권에게 상징적 정권이양은 할 수 있으나, 군과 이라크 재건사업이라는 '알짜 통제권'은 계속 미국이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미국측 수정안 수용 방침은 결국 '명분'만 내세우면서, 그동안 경제압박 등을 앞세워 가해진 미국측 요구를 수용키로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이같은 프랑스의 입장 전환으로 인해 오는 20일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인 영국-독일-프랑스 정상회담과, 그 직후 뉴욕 유엔총회때 열릴 예정인 미국-독일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수정 결의안 합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외신들은 내다보고 있다.
***파병과 지원은 한-일 등 아시아 몫?**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프랑스 등 유엔 안보리국들이 수정결의안 통과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도 정작 이를 뒷받침할 파병이나 주둔-재건비 분담에 대해서는 '절대 수용불가'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프랑스와 보조를 맞추어온 독일 슈뢰더 총리는 18일 이라크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 파병시 인명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 하에서는 군대는 물론, 이라크 경찰 등을 훈련시키기 위한 고문단 파견까지도 할 수 없으며 추가 재정부담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 다른 유엔 안보리국가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중국 역시 지난 5일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콜린 파월 미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중국은 진지하고 건설적인 태도로 협의에 임해 유엔 결의안에 대한 합의가 달성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히면서도 파병이나 주둔비 분담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다.
미국 또한 이들 안보리 국가들에게는 파병이나 재정지원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일본-인도-파키스탄 등 주로 아시아국가 10여개국에게 파병 또는 주둔-재건비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외교가 일각에서는 유엔 안보리국들이 이라크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실제 파병과 주둔-재건비 부담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국가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음모'를 진행중인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5천~1만명의 전투병 파병을 요구받고 있는 우리나라 정부나 정치권은 벌써부터 "유엔 결의만 나오면..."이라는 식으로 결의안 채택시 파병을 '기정사실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보수언론들도 "유엔 결의가 나오면 파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펴고 있다.
하지만 유엔 결의안 자체가 안보리국가들간의 물밑협상을 통해 이뤄지면서 한국등 아시아국가들에게 모든 부담을 뒤집어씌우는 형식으로 전개된다면, '유엔 결의'는 결코 우리의 파병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작금의 안보리 움직임을 보면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세계강국들에 의해 한반도가 토막나는 쓰라린 풍광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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