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의 여파일까. '일하는' 청년을 위한 정책들에 청년복지의 무게가 쏠리고 있다. 청년구직활동지원금, 취업성공패키지, 청년수당(서울시), 일하는 청년통장(경기도), 청년디딤돌카드(부산시). 모두 청년들의 구직 또는 근로 활동을 조건으로 현금이나 금융 서비스를 지원하는 제도들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청년들이 얼른 노동시장에 진입하여 안정적 소득과 삶을 꾸려가길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노동이 복지수급의 전제조건이 될 때, 기대한 것처럼 취업이 활발해지고 소득이 늘어나며 생활에 안정이 찾아오는 것일까?
노동연계복지에 대한 믿음은 한국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저소득층의 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이드' 수급 조건으로 노동을 의무화하는 정책이 도입되었다. 사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한 의료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미국에서 메디케이드는 저소득층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국가 보건의료 안전망이다. 작년부터 연방법원의 승인을 받은 주정부에 한해, 메디케이드 수급자격으로 노동의무조건을 부과할 수 있게 되었다. 메디케이드를 운영하는 데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주정부들, 보통 빈곤율이 높은 지역들에서 신청이 늘어나고 있다.
첫 타자는 아칸소(Arkansas) 주였다. 작년 6월 아칸소 주정부는 연방법원의 승인을 받아 메디케이드 수급 대상 중 임신 여성이나 장애인 등을 제외한 근로 연령층(30-49세)에게 월 80시간에 해당하는 노동, 구직, 직업훈련 또는 지역사회서비스 수행을 의무로 정했다. 이 조건을 3개월 이상 이행하지 않거나, 활동을 증빙하는 온라인 월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메디케이드에서 탈락시켰다. 불과 3개월 만에 무려 1만 7000여 명이 자격 배제 통보를 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올해 3월 연방법원은 수급 탈락자들의 상황을 우려하면서 아칸소에 내렸던 결정을 번복했다.
하버드대 소머즈(Sommers) 박사 연구팀은 이 사태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했던 작년 말, 아칸소의 메디케이드 노동 의무화 정책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에 발 빠르게 착수했다. 그리고 올해 6월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 의학저널(NEJM)>에 그 결과를 출판했다.(☞ 바로 가기 : 메디케이드 노동의무조건 - 아칸소에서의 첫 1년의 결과)
연구팀은 2018년 11~12월 동안 노동의무 조건을 도입한 아칸소와 그렇지 않은 대조 지역(켄터키, 루이지애나, 텍사스)의 19~64세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내용에는 건강보험 가입 여부와 가입 유형, 주 20시간 이상의 근로 여부 등이 포함되었다. 정책 도입 전의 실태는 연구진이 2016년에 수행했던 다른 연구의 전화설문조사 결과를 활용했다. 정책 도입에 따른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연구 주제였던 만큼 연구진은 2016년 대비 2018년 변화 크기를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연도, 지역, 연령이라는 세 가지 요인의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기 위해 삼중차이(Difference-In-Difference-In-Differences) 모형을 적용했다.
분석 결과, 아칸소의 메디케이드 노동의무화 정책은 건강 보장 인구 감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책 도입 후 아칸소 근로연령층에서 메디케이드와 민간 건강보험 가입자를 합친 건강보장 인구 비율은 6.8% 포인트 감소했다(2016년 70.5% → 2018년 63.7%). 이 감소폭은 대조 지역과의 삼중차이 모형을 적용했을 때 13.2% 포인트로 더 늘어났다. 만약 메디케이드 탈락자들이 근로를 통해 고용주가 지원하는 민간 건강보험으로 유입되었다면 전체 건강 보장 인구는 감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용주 지원 민간 건강보험에 가입한 인구 비율은 아칸소 근로연령층에서 소폭 증가했을 뿐이다(2016년 10.6% → 2018년 12.2%). 삼중차이 모델을 통해 대조지역의 근로연령층과 비교해보면 의미 있는 변화로 보기 어려웠다. 반면 어떤 건강보장 유형에도 포함되지 않는 무보험자 비율은 아칸소 근로 연령층에서 4%포인트 늘어났다(2016년 10.5% → 2018년 14.5%). 삼중차이 모형을 적용하면 그 차이가 7.1%포인트로 더욱 커졌다. 즉, 노동의무조건의 도입은 아칸소의 저소득 근로연령층을 대거 메디케이드에서 탈락시켰고 그들 중 상당수는 무보험자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고용 측면에서는 긍정적 변화가 나타났을까? 연구진의 분석에 따르면 정책은 고용 증진에 어떤 긍정적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20시간 이상 노동을 하는 근로 연령층 인구의 비율은 아칸소와 대조 지역에서 2016년 대비 2018년 모두 감소했다. 삼중 차이 모형으로 확인해 보아도 아칸소의 변화 크기는 대조지역의 변화 정도와 통계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칸소의 근로 연령층 응답자 중 97%가 메디케이드 노동의무조건을 이미 어떤 식으로든 충족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즉, 근로연령층의 메디케이드 수급자 중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일을 하고 있었고, 질병이나 임신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면제 조건으로 빠질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이 제도 때문에 메디케이드를 상실한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메디케이드 자격을 박탈당했던 것일까?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대부분은 메디케이드 노동의무조건 정책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예를 들어, 아칸소의 근로연령층 응답자의 32.9%가 이 정책에 대해 전혀 듣거나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고, 다른 연령층의 14.4%는 자신들이 이 제도의 대상자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정책에 대한 인지도는 젊을수록, 남성이며 학력 수준이 낮을수록 더 낮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노동 의무를 져야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동 활동 증빙의 어려움이 메디케이드 탈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주 정부로부터 알림을 받은 대상자 중 오직 49.3%만이 증빙에 필요한 온라인 월례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이유로는 스스로 요건을 미충족했다고 생각한 경우가 40.4%로 가장 많았고, 인터넷 접근이 어렵거나(32.3%), 보고 과정에 대한 혼동(17.8%) 등이 언급되었다. 즉, 정책을 둘러싼 시민들의 이해 차이와 행정 장벽이 많은 아칸소 빈곤층을 메디케이드 바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연구 내용을 종합하자면, 아칸소의 메디케이드 노동의무화 정책은 고용 증진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면서, 수급자들에게 혼란만 야기했다. 또한 행정 장벽을 높여서 수급자들을 메디케이드로부터 내쫓아 결국 무보험자로 전락시켰다. 이는 메디케이드 제도 본연의 목적인 건강보장을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사실 아칸소의 사례는 의료보장만이 아니라, 노동을 조건으로 삼는 노동연계복지 구조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의료든, 주거든, 빈곤 문제든 노동이 조건으로 군림할 때, 각 복지 정책이 닿아야 할 대상자를 탈락시키는 선별 기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확대되는 노동 조건부 청년 지원 정책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4월 첫 지원자 선정을 완료한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의 경쟁률은 4대 1, 한때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를 휩쓸었던 경기도 '일하는 청년통장'의 경쟁률은 10대 3이었다. 취업 지원을 받는 일이 취업 못지않게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운 좋게 합격했다고 끝이 아니다. 합격자들은 정기적으로 활동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고 작성 내용이 부실하거나 여러 번 제출 시기를 놓치면 탈락하게 된다. 아칸소 사례처럼 '노동 조건부' 정책은 '노동'을 촉진하기보다는 행정적 장벽이 되어 이를 넘지 못하는 일부를 탈락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낙오자 안에는 그 정책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복지 정책의 '구직'이나 '노동' 조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 서지정보
Sommers, B. D., Goldman, A. L., Blendon, R. J., Orav, E. J., & Epstein, A. M. (2019). Medicaid Work Requirements-Results from the First Year in Arkansas.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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