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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료원의 죽음들을 돌이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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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료원의 죽음들을 돌이켜보며

[시민정치시평]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

목련의 몽우리가 녹기도 전에 한 간호사가 죽음을 택했었다. 함께 일하던 이들이 자신의 영정사진 앞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유서에 적어 넣었다. 두릅이 아직은 데칠만한데 한 청소노동자가 죽음을 맞이했다. 지병도 없이 일하던 이가, 열흘이 넘게 쉬지 못하다 폐기 물품 더미 사이에서 감염으로 하직했다. 세계노동기구(ILO) 추가 비준 준비로 떠들썩한 사발면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울시 인권강사들 사이에서, 지금 가장 강의 가기 두려운 곳은 서울의료원일 것이다(참고로 전통적으로는 소방서다). 건강권에 대해 명징하고 풍부한(이 두 가지가 함께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독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강의안을 준비한 한 강사는, 자기는 거기 강의하러 안 갈 거라고, 두려움에 앞서 잘라 말했다. 분노와 차단이 대립하는 공간에서 그 어떤 명사가 인권을 논할 수 있을까.

인권적 문제 상황 속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죽음이 우울증이나 지병을 위시로 개인적인 이유로 치부되어 버린다면 그 죽음은 개인의 죽음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게 될 새로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올 덫이 되어버린다. 비인권적 상황이 발생하는 구조에 대한 개선이 없다면, 그 덫은 녹슬지 않고 반복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인권이 포함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감싸는 만큼 약하지만, 그 누구도 공적인 자리에서 인권을 부정하진 못한다. 비인권적 사건이 터지면 가해자나 방관자는 이를 인권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자신에 대한 비난과 처벌을 불러올 수 있는 문제와 상관없는 종류의)라고 하지, 인권의 문제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인권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어떤 해석이 힘을 갖는가, 어떤 해석자가 힘을 갖는가가 인권의 현실적 적용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이다. 왜 죽은 이의 인권과 산 이의 인권이, 같은 이름임에도 다를까? 이를 풀기 위해서 다른 책장을 참고해보고자 한다.

누구의 해석인가? 그 해석은 누구를 위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해석인가? 다소 음모론 적이지만, 그만큼 자극적이고 지적 유희가 되는, 동시에 타당하며 구조적 분석의 거리가 될 수 있는 이 물음은 포스트모더니즘 흐름을 관통하는 메시지 중 하나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 흐름에 있어서 작은 영향을 받은 역사학에서도 이 질문은 던져졌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는 역사를 시간의 차원에서, 이미 지나가 버렸으며 재현할 수 없는 그것으로서의 과거와 이 지나간 시간의 편린들이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는 역사를 구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의 끝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덧붙는다. 역사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담론이고, 이 담론은 역사가의 담론이다. 이런 주장은 당연히 역사학자의 반박을 받게 된다. 리처드 에번스(Richard Evans)는 이에 대해 관찰 자체는 과학의 영역이며, 역사 기술에 담기는 담론의 근간은 역사가 개인보다는 시대정신의 발현이라고 답한다. 이미 이십여 년이나 지난 논쟁이지만, 이 논쟁이 남긴 질문은 끊임없는 확장성을 지닌다. 필자는 덧붙여본다.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

오랜 시간 동안 인권은 모두를 위한 인권은 아니었다. 근대적 인권의 표상이라 여겨진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같은 경우에도,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의 대상자인 인간의 범주에 있어서 현실적 작동의 근간에는 특정 인종의, 특정 국가의, 특정 계급의, 특정 성의, 특정 건강 상태의, 특정 성적지향의, 특정 종교의…. 수많은 특정한 단서들이 붙어왔다.

이러한 차별적 인권선언 속에서 선명하게 도드라진 건 결국 소유권, 정확히는 프랑스 국적의 백인 남성 부르주아의 소유권에 대한 명문화였다. 이런 '부자를 위한 권리'에 대한 비판으로 두 번째 권리선언(1793)에서 소유권이 여타 존엄의 권리들을 침해하며 작동할 수 없다는 것과 소유권의 정착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문제를 위한 사회부조 항목들이 기재되었으나, 반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세 번째 권리와 의무선언(1795)을 통해 해당 항목들은 삭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며 장미전쟁 같은 계층 내 분쟁이 아닌 전국적 혁명이 될 수 있었던 근간인 압제에 대한 저항의 권리조차도 삭제되었다. 이러한 인권의 특정성의 비참한 말로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일어난 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인권의 특정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국제적인 노력은 이러한 특정성의 발현이자 그 참혹한 결과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나 열매를 맺는다. 세계인권선언을 준비하는 위원회에서 선언문의 작성을 위한 논쟁의 방점은 결국 인권이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이다. 선언의 문장은 그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의미가 들어있다.

르네 카생이 제안했던 세계인권선언 초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모든 인간(all men)은 형제다." 당장 첫 단어부터 수많은 불만이 나왔었다. 모든 인간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남성(men)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자연인(people)인가, 이도 아니면 최종적으로 선언된 것처럼 모든 인류(all human beings)인가.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모든 사람, 남성과 여성'이라고 적어야 할까? 주어인 인간에 대한 정의마저 이러한데, 서술어인 '형제'는 말할 것도 없다.

인권 분야에서의 이런 강박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세심함의 전통은, 상기한 '특정성'의 위험을 조금이나마 명시적으로 만듦을 통해 피하고자 함이다. 기표로서의 인권이 곡해에서 벗어나 명확하게 모든 존재의 존엄을 포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우울증이나 지병을 갖다 붙이며, 노동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덮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고독히 죽음을 퇴직금으로 받으며 노동하고 있는 이들이 분노하여 일어나기를 지지하는 마음이다.

결사의 자유마저 양해를 구해야 하는 오늘, 옛 문장 한 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인류'의 범주에 힘없이 죽어간, 그리고 앞으로 그 죽은 이의 자리를 채울 새롭게 죽어갈 이들이 포함되기를 기원한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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