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제도의 폐쇄나, 대체 수단 마련을 국제 사회에 촉구해야 한다는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제기됐다.
ISD제도는 노무현 정부 시절 추진되고 이명박 정부 집권기인 2011년 11월 22일 국회 비준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부터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숱한 논란을 일으킨 제도다. 외국인 투자자가 당국 정부가 투자협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할 경우 국내 법원이 아닌 국제기관에 중재를 요청할 권리를 보장한 이 제도가 한국의 사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실제 한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ISD제도의 위협을 받았다. 2012년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ISD를 건 바 있고, 지난 2015년에는 한국 정부가 이란 기업 다야니가 제소한 ISD 에서 처음 패소해 실질적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정부는 지금도 ISD제도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부동산 개발사 게일은 지난 20일 인천 송도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2조3100억 원대의 ISD제도 중재 의사를 걸었다. 5조3000억 원대 규모였던 론스타 ISD 이후 최대 규모다. 지난해 10월 16일에는 스위스 쉰들러사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3400억 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유엔 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의 올해 세계투자보고서에 따르면, 한미FTA는 세계에서 ISD 분쟁을 세 번째로 많이 유발한 조약이다.
패소할 경우 막대한 세금 손실이 불가피하다. 한미FTA 당시는 이른바 범진보진영이 퍼뜨린 괴담처럼 인식되던 ISD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재벌을 홍보하던 이들의 '문제없다'는 주장이 괴담이었음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이미 유럽연합(EU) 역내국 간 협정에 포함된 ISD제도가 유럽연합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인도 정부도 ISD제도가 포함된 투자보호협정(BIT)을 폐기했다. 이미 UNCITRAL는 2017년부터 ISD제도 개혁을 위한 전담반을 운영하고 있다. UNCITRAL는 다음 달 15일까지 각국 정부에 각자의 개혁방안을 제출토록 요청한 상태다.
국내에서 ISD제도를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26일 오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지식연구소 공방, 참여연대는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ISD제도를 개혁하거나, 폐기를 국제 사회에 촉구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UNCITRAL에 ISD제도에 관한 비판적 실증 사례를 제출해 이 제도 폐기를 요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남희섭 지식연구소 공방 소장과 한상희 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 정석윤 민변 국제통상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우선 ISD 남발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분쟁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분쟁 당사자(투자자)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ISD 승소 시 보상을 받는 계약인 제3자 자금지원을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자자가 ISD 분쟁을 제기할 때 제3자 자금지원이 없음을 선언케 하고, 선언이 허위일 경우 투자 유치국이나 자국 형사법상 처벌을 받도록 관련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아울러 이들은 여태 UNCITRAL 작업반에서 다루지 않은 △실체 규범 개선을 위한 논의 틀 구성 △투명성 △분쟁 예방과 공공정책 △투자 협정 개혁을 위한 다자간 조치 △국제투자법원 도입안 등도 한국 정부가 유엔에 논의 안건으로 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ISD제도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조치는 물론, 법원의 판결과 국가의 법률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국가 공공정책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며 "ISD제도를 누가 무슨 근거로 제기했으며, 어떤 과정으로 절차가 진행되고, 어떤 결정이 무슨 근거로 내려졌는지를 주권자인 국민이 알 수 있게끔 관련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들은 "EU가 제안한 국제투자법원 도입안(FTA나 BIT별 투자 법원 대신 다자간 투자 법원을 설립해 ISD제도를 통합적으로 다루게 하자는 안)은 대안이 될 수 없다"며 "투자자 보호를 위한 실체 규범이 바뀌지 않는다면 ISD제도의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규제 위축이나 주권 침해는 여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ISD제도는 당초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됐다"며 "이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ISD제도를 없애거나 이를 대체할 다른 수단을 찾는 게 당연하다"고 전했다.
이어 "UNCITRAL의 ISD제도 개혁 작업반 활동은 투자 분쟁을 줄이고, 좀 더 민주적이고 인권친화적인 투자 정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며 "(한국 정부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안을 UNCITRAL에 제안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변과 지식연구소 공방, 참여연대는 기자회견 후 공동 작성한 개혁방안 의견서를 외교부와 법무부에 공식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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