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간밤에 눈 내렸습니다. 산천이 새하얀 눈을 덮어써서 더 신령스럽습니다. 나는 눈 오는 날이면 산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흰 눈과 함께 살던 10여 년의 산골이 벌써 추억처럼 생각납니다. 눈처럼 해맑은 영혼이 그리워서 산에 올랐는데 큰 숨 들이마시니 숲에서 살던 싱그러운 날들만 벌써 그리워집니다.
요즘은 서울로 출장 와 있는데 눈 온 것을 도시 아침 골목에서야 보았습니다. 도시 뒷골목에서 땟국 흐르는 눈은 내가 좋아하는 설경이 아닙니다. 진짜 설경을 보고 싶어서 냅다 산을 향해 달렸습니다. 서대문 무악재를 지나 진관내동을 지나 북한산으로 갔습니다.
아, 이 싱그러운 공기가 하루도 멀게 그리우니 어찌 살라는 말인지요. 흰 눈을 덮어쓰고 고개 숙인 솔숲을 지났습니다. 산은 바위산인데 흰 눈이 덮이니 육중한 무게는 간데없고 새털처럼 가볍게 하늘을 나는 듯 하늘하늘 거립니다. 일상에서 보았던 산풍경은 간데없고 정반대로 전복된 태고의 산이 감동이 되어서 밀려옵니다.
새벽에 김수남 선생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곧바로 산에 온 것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김수남 선생도 이 땅에 오셨다가 갑자기 춘설처럼 사라졌구나. 덧없는 인생은 봄눈 같아서 잠시잠간 머물다 갈 뿐입니다.
아시아의 민속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태국의 오지 치앙라이 고산족 리수족 마을에 갔다가 뇌출혈로 현장에서 쓰러졌는데 오지라서 병원 응급처리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시아의 소수민족문화를 20년 가까이 사진 찍으며 다니다 결국 현장에서 돌아갔습니다. 사라져가는 아시아 고유의 문화를 안타까워했던 고인은 결국 아시아의 깊은 오지에서 잠들었습니다. 김수남 선생은 오래전부터 그런 곳에 일하다가 죽으면 제일 행복할 거라고 하더니 그렇게 갔습니다.
김수남 선생은 사진집 '한국의 굿' 전20권,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 '아시아의 하늘과 땅' '잊혀진 아시아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아시아 영혼을 부르는 소리' 등 책으로 기념비적인 사진예술을 남기고 갔습니다. 현재 경기도 양평의 갤러리 '와'에서 '한국의 만신들'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시회가 곧 유작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김인회 교수는 김수남 님을 추모하면서 '사라져가는 아시아의 순수한 민중의 문화에 가치를 부여한 작가'라고 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앞서간 예술인이라고 서거를 애도했습니다. 8일 아침 고인을 마지막 보내는 영결식에서 지인들은 김수남 님을 "영혼의 순수성과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성을 지닌 필드워커" "아시아의 민중 현장 어디에 가서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아시아 원형 문화를 빛낸 작가" "아시아 시대의 선구자" "자신의 삶을 완전히 연소시키고 사라진 예술혼"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춘설처럼 사라진 고인은 나에게도 각별한 선배예술인이십니다. 장인정신을 가르쳐주신 분, 아시아의 가치를 일찍이 깨우쳐 주신 분입니다.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용기와 결단력으로 고인은 아시아의 오지를 다녔습니다. 무슨 가치를 찾아 그 험한 길을 나섰던 것인가.
그가 즐겨 쓰던 말 그대로 '아시아의 맑은 영혼'일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의 모든 물상 깊은 곳에 신령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일 겁니다. 우리 안에도 우주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고인이 전시장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들어봅니다.
"서양이나 우리나라처럼 산업화가 된 나라에서는 (산업화 되지 않은 아시아문화를) 민속으로 부를지 모르지만 거기서는 민속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고유문화, 풍속, 예능을, 그 다양한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이 저는 아주 즐겁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아시아의 맑은 영혼을 찾아 오지에 숨어 있는 문화 현장을 찾아다니다 현장에서 기꺼이 돌아가셨습니다. 아시아의 오염되지 않은 문화현장을 만났을 때 순수한 애정과 열정이 샘솟았던 그의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춘설처럼 사라졌으나 그의 예술혼은 수천 점의 사진으로 남아서 '아시아의 빛'이 될 것입니다. 부디 안녕히 가세요.
눈 덮인 산 오름 솔밭 사이 길
한참 바라보며
오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내려 왔습니다
바라만 봐도 엄두가 안 나는
춥고 떨리는 저 희디 흰
빈산
수남 형이 찾다가 찾다가 다시는
안돌아 오고만 영영 가버린 그곳
원형 그대로, 맑은 영혼이 깃든
아시아의 시원
산업화의 물결은 도도하게 지구 전역을 설치는데
아시아 민족들도 변화의 열병이 걸렸는데
이제는 오지에서 소수민족들만
끝내 변하지 않고 마침내 보석으로 남아
숲 너머에서 침묵하는구나
산 능선 솔밭 사이길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뒤돌아 내려오는데
저 빈산에서
윙윙 소리 들린다
문명도 꽃처럼 피고 진다고
다시 원형을 부른다고
너희들 잘못 가고 있다고
수남이 형이 돌아간 고산족 리수족에서
아시아의 소수족에서
솔밭 사이길 너머에서
아시아의 맑은 영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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