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순방중인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의 '외교 아마츄어리즘'이 연일 구설수를 낳고 있다.
다른 나라 총리의 외교 실수는 통상적으로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블레어의 외교 실수를 정면으로 대응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외교당국자들은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듯 하다는 대목에 도달하면 사정은 1백80도 달라진다.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영국의 더 타임스와 한국의 <청와대 브리핑> 보도다.
***중국의 대응: 블레어의 만찬초청 거절**
영국의 일간 더 타임스는 21일(현지시간)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후진타오 국가주석 부부를 비공식 만찬에 초청했다가 '정중한 거절'을 당하는 '외교적 냉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블레어 총리는 중국 방문을 앞두고 의전에 관계없이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 후 주석 부부와 함께 비공식 만찬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으나 중국측은 '사흘간의 장고' 끝에 "적절치 않다"며 거절 의사를 통보했다.
블레어 총리가 이같이 냉대를 받은 것은 5년만에 중국을 방문하면서 미국과 함께 21세기를 주도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중국에 단 48시간만 체류하기로 해 '중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풀이했다.
신문은 "블레어 총리보다 일정이 훨씬 더 빡빡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조차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베이징과 상하이를 방문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며 "블레어 총리의 '국제감각 부재'가 중국의 따돌림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는 2001년 9월 이래 벌써 두차례나 중국을 방문했으며,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1998년 이래 매년 베이징을 방문해 유대관계 강화에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아직도 편지를 주고받고 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월 후 주석을 러시아로 초청, 후 주석의 주석직 취임 이래 최초의 해외 방문을 성사시키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신문은 블레어 총리가 미국만 지나치게 중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아시아를 소홀히 해 중국의 '외교적 당근'을 챙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레어는 지난달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G8(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정상회담에서도 후 주석과 회담을 원했으나 중국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블레어 총리는 북핵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도 상대적으로 친근한 일본에는 이틀이나 머물면서 한국에서는 하룻밤도 묵지 않고 도착 당일 중국으로 출국했다.
***한국의 대응: 공동기자회견에 적게 참여한 국내언론 비판**
21일자 <청와대 브리팅>에는 '정상회담에 더 관심을-한·영 기자회견 우리측 취재기자 4명 참석하는 데 그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정상회담에 대한 언론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아쉽다.
20일 저녁 6시 40분 청와대 녹지원에서 가진 한·영 정상회담 관련 공동기자회견에는 모두 70여명의 기자들이 참석했다. 이 가운데 우리측 취재기자는 모두 10여명. 이 가운데 TV카메라 취재진을 제외한 신문과 방송의 취재기자는 모두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자들은 영국측 수행기자들과 서울에 상주하는 외신기자들이었다.
보도지원비서관실은 당초 영국측 참석기자들과 ‘격’을 맞추기 위해 10명선의 취재를 희망했으나, 사전에 질문자로 선정된 두 기자 외에 2명만이 공동기자회견 취재를 신청하는 데 그쳤다.
이날 취재기자들의 저조한 참석률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기자회견 시간이 휴일 저녁인 데다, 양국 정상 기자회견이어서 자유질문 없이 사전에 질문기자가 정해져 있어 다른 기자들은 참석 이상의 큰 의미를 두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방송사의 현장중계도 없어 기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공동기자회견은 영국 총리가 국제적으로 민감한 북한 핵문제의 해결방법을 둘러싸고 우리측이 지속적으로 표명해온 ‘다자 대화를 통한 해결’에 인식을 같이해 국제적 여론 조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분석되는 등 외교적 의미가 적지 않았다. 특히 공동기자회견은 그 자체가 정상회담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외교적 행사로 언론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 외교 관계자들의 지적이기도 하다."
***'코리아 패싱'**
<청와대 브리핑>의 지적은 일면 맞다. 아무리 반나절 스쳐가는 외국정상이라 할지라도 청와대 표현대로 "격을 맞추기 위해" 일정 수준이상의 기자 배석은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한-영 정상회담의 껄끄러운 성사 과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이같은 청와대 지적이 적절치 못해 보인다.
블레어 영국총리의 이번 아시아 순방은 애당초 한국을 배제한 가운데 기획된 것이었다. 블레어는 당초 일본과 중국만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뒤늦게 이를 안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막판에 순방코스에 한국도 삽입됐다.
이러다 보니 당초 일본과 중국에 이틀씩 체류키로 잡혀있던 일정때문에, 블레어총리는 한국에는 불과 반나절만 머물며 정상회담후 만찬을 마친 뒤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또한 이같은 앞뒤 정황을 알기에 블레어 총리 방한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자연 시들했고, 그 결과가 취재기자들의 공동 기자회견 참석 저조로 나타난 것이다. '가봤자 새로운 얘기가 나올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고, 결과는 실제로 그러했다.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블레어의 아시아 순방 과정에 극명히 드러난,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현상이다. '코리아 패싱'이란 말 그대로 '한국 스쳐가기'를 뜻한다. 한국은 '변수'가 못된다는 인식이다.
<청와대 브리핑>은 "이날 공동기자회견은 영국 총리가 국제적으로 민감한 북한 핵문제의 해결방법을 둘러싸고 우리측이 지속적으로 표명해온 ‘다자 대화를 통한 해결’에 인식을 같이해 국제적 여론 조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분석되는 등 외교적 의미가 적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블레어 총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싶다. '다자대화를 통한 해결'이란 우리측이 지속적으로 표명해온 것이라기보다는 부시 미정부가 주장,관철시키려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의 뜻에 순응한 측면이 강한 게 객관적 진실이다.
리영희 선생은 "한국은 한반도 문제의 주연은 못된다 할지라도 최소한 '힘있는 조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누차 지적해왔다. 우리의 운명을 외부세력에게 맡기고 멍하니 구경만 하는 처지를 의미하는 '코리아 패싱' 현상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블레어의 아시아 순방 파문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차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우리 생존이 달린 문제에서 '힘있는 조연' 역할이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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