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네티즌은 지난 주말 본지에 보내온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주말에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대신에 제발 일주일만이라도 비밀리에 잠행(潛行)해 줄 것"을 간청했다. 신분을 숨기고 세간에 나와 아파트값 폭등에 분노하고 불황에 고통받는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둘러보라는 얘기다.
***투기열기는 여전하고 서민들은 죽겠고...**
이 네티즌의 조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말주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서민대중을 가장 고통케 하는 아파트 투기 현장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24일 분양권 전매가 자유로운 마지막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스타시티 모델하우스가 있는 강남 청담동을 가 보았다.
한마디로 복마전이었다. 모델하우스가 있는 영동대교 인근의 청담동 모델하우스 일대는 차들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넓직한 양 차선이 모두 아수라장이었다. 주차장은 협소하기 짝이 없으나 자가용들을 끌고 나온 인파들로 인해 주말 한적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대는 지독한 교통 체증을 겪어야 했다. 모델하우스 오픈 첫날 1만5천여명이 모였던 인파 이상이 이날 모여 들었다. 얼마나 교통난이 극심했던지, 스타시티는 분양 청약이 시작된 26일 아침 각신문에 낸 전면광고를 통해 "청약자들은 제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달라"고 하소연해야 했다.
다음날 25일 오후 모 대형할인매장을 가봤다. 일주일마다 한번씩 가보는 매장이었으나, 가장 눈에 띄는 모습은 할인판촉행사가 거의 모든 품목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산균 음료는 4개짜리 한 묶음에 서비스로 4개가 더 묶여 있었고, 사탕도 한 봉지가 서비스로 더 붙어있었다. 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콧대 높은 코카콜라까지도 사이다 한병을 더 서비스로 묶어 팔고 있었다. 여타 소모성 소비재들의 경우도 사정은 오십보백보였다. 마치 IMF사태후 장거리를 돌아볼 때 볼 수 있었던 카오스(혼란)적 풍광의 재연이었다.
시내 음식점들의 경우도 대동소이했다. 26일 점심때 돌아온 서울 도심의 모처는 '할인 플래카드'의 범람이었다. "5천원짜리 냉면, 점심시간에 한해 4천원으로 파격할인" 플래카드가 붙어있는 3층짜리 대형 음식점 옆의 자그마한 음식점에는 "김치, 된장찌게 4천5백원에서 1천원 할인"이라는 자그마한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제살 깍아먹기식 가격하락에도 불구하고 소비는 줄어드는 디플레이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상이었다. 반면에 대조적으로 아파트 투기로 상징되는 '상투적 투기 붐'은 정부의 연일 '엄포'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었다.
***IMF때도 없었던 소비위축 현상이 나타나**
지난주말 국내 굴지 라면업계의 고위 임원을 만났다. '요즘 경기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라면은 원래 불경기때 도리어 매출이 올라가는 '불황상품'이다. IMF 위기때도 도리어 라면 매출은 크게 늘었었다. 그러나 올해 경우는 다르다. 현재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이는 연초에 라면값을 좀 올린 결과지, 팔린 라면 봉지숫자 기준으로 보면 전년도보다 줄어들었다.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IMF때보다도 위태롭다."
라면뿐 아니라, IMF위기때 도리어 잘 팔렸던 서민술인 소주 판매량도 사상 최초로 감소하는 등 기업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황 위기감은 심각하다.
대기업들이 느끼는 위기감도 심각하다. 국내 굴지 대기업의 임원은 최근 상황은 이렇게 말했다.
"가전제품 하나만 해도 삼성, LG 정도만 그럭저럭 버팅길뿐 다른 중소 가전업체들의 매출은 급감하고 있다. 내수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와서는 수출전선에도 비상이 걸렸다. 일본에 이어 독일이 디플레이션 늪에 빠져들고 미국마저도 소비심리가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최근 '약한 달러' 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결과 우리나라는 수출에도 비상이 걸렸다. 미국이 약한 달러 정책을 펴면 미국시장 수출이 어려워지는 동시에, 달러화에 환율을 묶어놓고 있는 중국의 가격경쟁력은 한층 세져 우리 기업의 수출이 안팎으로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사정책 등의 불확실성도 여전하고...만만치 않은 상황전개다."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장사도 불황을 타기란 마찬가지다. 국내최대 피부과의 원장은 이렇게 전했다.
"우리 병원은 IMF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DJ정권 5년동안 내리 큰 이익을 내며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지난달 수익과 지출이 같아지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 헛장사를 했다는 얘기다. 우리가 이럴 정도면,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든 대다수 병원들은 파산 위기에 직면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상류층들마저 바짝 위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 잠행'을 기대하며**
26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세달을 맞아 행한 한겨레신문 여론조사에서 특히 '경제운영'에 대한 국민 불만이 위험수위라 할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율이 고작 20%에 불과하니, 적신호가 켜져도 한창 긴박한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에서인지 노대통령은 이날 오전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한미정상회담으로 한미공조도 안정돼 있고, 우리 경제도 불안요인이 줄어들어 안정되고 있는만큼 이제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각별히 챙기는 등 경제문제에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태영 대변인은 이같은 대통령 말을 전하며 "노대통령은 부동산 문제나 현재의 경제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으며 다만 경제불안 요인이 줄어들었다고 한 것은 한미공조와 관련한 경제불안 요인이 줄어들었다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라며 "(대통령은) 경제가 어려워지면 서민이 가장 먼저 어려움을 겪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과관계가 어떠했든, 노대통령이 뒤늦게나마 서민들의 '민생'을 챙기기로 한 것은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한 네티즌이 "북핵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파트값 폭등으로 폭발직전의 상태에 다달한 국민들 마음속의 핵폭탄"이라고 적절히 지적했듯, 지금 시중의 민심은 흉흉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선 필요한 것은 '정확한 민심 파악'이다. 이를 위해선 맨앞에 한 네티즌이 제언했고, 과거시절 박정희대통령 등도 했던 '대통령의 잠행'이 필요하다.
'대통령 잠행'의 위력은 크다. 무엇보다 '인의 장막'으로 가려지지 않는 정확한 민심을 읽을 수 있다는 특장이 있으며, 부수효과로 해당부처 장관이나 관료들의 긴장도 촉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잠행'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잠행'이어야 한다. 보도진과 관련부처 장관들을 수행케 하는 '잠행'은 '정치성 쇼맨쉽'으로 비칠 위험성이 크고, 잠행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노대통령의 '진짜 잠행'을 기대해본다. 민심은 지금 흉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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