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정전 사태만이 아니다. 1992년 LA 흑인 폭동,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부를 강타했을 때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것은 이웃 시민들이었다. 평범하던 시민들은 폭도가 되었다. '인간은 모든 인간에 대해 늑대다'라는 홉스의 경고는 미국 사회를 보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럭저럭 굴러가던 사회가 긴급사태가 발생하자, 곧바로 무법천지로 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 미국은 적어도 공동체 의식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에 불과했다. 이처럼 미국의 문제는 국가 원리 자체에서 발원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등장했다. 가톨릭 배경을 가진 정치이론가 패트릭 J. 드닌(Patrick J. Deneen)은 미국의 문제는 미국의 핵심가치인 '자유주의'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펴냄)은 미국 주류에서 나온 최초의 '망국 선언'이다.
자유주의란 어떤 사상인가? 드닌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권리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사상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욕망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체제는 시장경제와 결합된 작은 정부다. 자유주의 정부는 사회계약을 통해 정당화된다. 드닌은 계몽사상을 추종해 개인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옹호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드닌은 과거에 자유주의가 성공한 이유를 '자유'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유(Libertas)'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단어다.
전통적인 정치철학에서 자유는 최우선 개념이 아니었다. 서구의 전통 정치에서는 개개인의 자유보다 폭정의 충동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폭정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덕성 함양과 자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덕성을 가진 존재들의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공동체 차원까지 관통한다고 믿었다. 동양철학연구자 신정근은 논문 '공동체자유주의와 동양철학적 기초'(2015)에서 서구 공동체주의에서 강조되는 핵심개념들이 동양철학에 공통적으로 존재했었다고 말한다. 유가사상에서 말하는 수기(修己), 안인(安人), 안민(安民)이 서구 전통 정치철학에서 이야기되는 덕성 함양에 해당하는 동양적 개념들이다. 공동체 내부의 조화를 중시한 동서양 전통사상에서는 자유가 아닌 자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다. 자치와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와 달리 자치는 정교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개인 차원에서, 공동체 차원에서 자치를 수행해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맞물려 선순환될 때에만 자치는 가능해진다.
드닌은 자치라는 덕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의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의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의 자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생각했다. 그리스철학은 중세 로마로 이어진다. 덕성 함양으로 스스로를 규제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인간형을 이상으로 삼았던 철학은 이후 급격하게 방향을 전환한다. 자본주의를 만나고 나서였다.
근대는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 이전 자유는 규율을 동반했다. 공동체 차원에서도 자유는 늘 스스로를 자제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갔다. 규율이 없는 자유란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것이었다. 근대가 시작되고 자유는 규율로부터 해방되었다. 근대의 특징은 '규율을 동반한 자유'라는 오래된 정치철학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는 사회규범들을 자유에 대한 장애물로 인식했다. 자유주의는 전래의 종교와 사회규범의 해체에 나섰다. 자유주의가 이토록 과감하게 전래의 습속과 사회원리에 도전한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
유가사상과 서양전통 정치철학이 동일하게 개인의 권리가 아닌 절제와 덕성을 강조했던 것은 경제적 원리와 처한 조건 때문이었다. 기원후 1500여 년 동안 세계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0.02~0.03% 정도로 거의 제자리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이 자신만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가 없었다. 개인의 권리가 사회에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세계 경제 성장률이 0.5%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개인은 공동체가 부과하는 규율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경제적 자유는 생활의 자유를 먼저 필요로 했다. 개인이 부각되면서 공동체는 사라졌다. 자유가 외쳐지면서 자율 대신 욕망이 넘치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세 가지 지점에서 전통적 사상과 달랐다. 첫째, 정치의 토대를 높은 이상이 아니라 욕망이 굴러다니는 낮은 현실 바닥에 두려고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덕성 함양이라는 전통적 덕목을 무시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오만, 이기심, 탐욕에 근거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완성했다. 더 나아가 통치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계급들끼리 분열·대립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에게 공동체적 덕성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 전통사회에서 사회구조를 강화하는 것들이 이제는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로 이해되었다. 교회나 가부장적 권위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무제한적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철학의 비조인 홉스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지배를 구상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서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수백 년간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기성의 권위로부터의 해방, 임의적 전통에서 벗어날 것, 자연에 대한 지배력의 확대를 주장했다. 드닌은 이런 자유주의 기획을 '거대한 도박'이라고 판단한다.
드닌은 자유주의가 자기 이념의 토대를 '규제받지 않는 개인의 자율적 선택', 즉 '주의주의(voluntarism)'에 둔 점을 가장 크게 우려한다. 인간을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닌 독자적인 개인으로 이해한 최초의 사상가는 홉스였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늑대가 된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홉스는 국가를 호명한다. 개인으로서의 자율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를 개인의 삶의 영역 속으로 개입시키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홉스에게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공동체의 보호막 없이 다른 개인과 맞서야 한다. 혹시 모를 위험을 감당하기 위해 나의 자율권을 내려놓고 국가에 자신을 의탁한다. 개인을 추구한 자유주의가 결국 국가 개입을 초래하는 역설은 홉스로부터 예고된 것이다.
홉스의 자유주의적 주의주의 철학을 계승한 로크는 개인의 '동의'에 신성불가침의 권한을 부여했다. 모든 아이는 동의를 통해 유산을 받아야 한다. 로크는 자율적 선택을 하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동의가 되지 않는 어떤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율적 선택이 최우선적 가치가 되었다. 드닌의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도, 창조된 질서에 대한 의무도,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의무도 더욱 폭넓게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선택은 극히 중시하지만, 선택 행위가 이루어지는 '토대'에는 무신경하다. 자유주의는 인간들이란 개인으로 존재하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말하는 그런 이기적 인간은 원래의 인간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와 결합해 만들어낸 인간형에 지나지 않는다. 드닌의 말이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이기적인 경제행위자로서의 개인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개인은 근대 초 자유주의 질서의 초기에 출현한 국가가 속속들이 개입해 만들어낸 것이다. 자유주의 질서를 강요하는 과정은 구속받지 않는 개인들이 이런 질서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정당화 신화를 동반한다. 자유주의 질서가 대대적인 국가 개입의 결과였다는 사실은 소수의 학자를 제외한 모두에게 무시된다." 로크가 상상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란 이미 공동체와의 유대가 약화된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인공적 '개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역사사회학자 칼 폴라니는 저서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에서 자세히 밝혀놓았다.
폴라니에 따르면, 사회와 인간을 자본주의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국가와 자본이 폭력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전통 공동체와 관행을 분쇄했고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떼어놓았다. 이 과정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변혁적 방식이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개인이 된 것이 아니다. 거대한 폭력이 개입되고 나서야 '개인'이 되었던 것이다. 자유주의가 생각하는 사회계약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 중에는 거친 목소리로 정치인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정치인들이 조롱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하고 좋은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제대로 못해서 엉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의 일반 시민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나마 한국은 나은 편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비자유민주주의(iliberal democracy)'가 정치평론의 단골 개념이 된지 오래다.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극우세력이 약진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스위스 수상은 30대 초의 극우인사다. 한국인은 이런 사실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본다. 그 나라와 한국이 어느 지점에서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본주의를 토대로, 자유주의를 상부 구조로 구성된 사회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운영체제에 해당한다. 이런 운영체제가 기능부전에 빠진 것은 특정 국민들이 못나서도 자유주의가 나빠서도 아니다. 드닌에 따르면, 자유주의라는 운영체제 자체가 현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내고, 개인의 무제한적 욕망을 자극하는 자유주의는 여러모로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이데올로기였다. 자유주의에 민주주의적 몇 가지 요소를 첨가해서 '자유민주주의'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인간이 도달한 최선의 정치체제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있지만, 자유주의가 주류 정치시스템이 된 것은 정치적 자유시장에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제국이 채택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데올로기의 실제적 목표는 위험한 계급 길들이기에 있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책 <근대세계체제>(까치 펴냄)에서 자유주의를 이렇게 평가한다. "자유주의제국은 개인권리의 극대화에 대한 신의를 특징으로 삼지 않았다. 자유주의제국을 구별해주는 것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위험한 계급을 길들이는 (그들을 시민으로 통합하고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들에게 제국이 지닌 경제 규모의 일부를 제공함으로써) 국가의 지능적인 개혁에 대한 헌신이었다." 자유주의가 대세가 된 것은 사회적 위험계급을 체제 내부로 순치하려는 기득권 주류의 적극적인 공세 덕분이었다. 우리는 자유주의라는 어항 속에서 살기에 자유주의를 너무나 당연시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강력한 작위의 결과물이었다.
드닌은 자유주의가 회생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못 박는다. "자유주의 사회는 경제성장이 둔화될 경우 여간해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경제성장이 얼마간이라도 멈추거나 역행할 경우 무너질 것이다." 사회원리로서 자유주의의 결함 때문에 자유주의는 경제발전이 지속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과 국가가 직접 대면하기 때문에 중간 완충지대가 없다. 결국 자원배분권을 독점한 국가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거친 싸움이 시작된다. 주요한 정당들은 전 국민을 동원하면서 상대를 악마화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보수와 자유주의 진보는 동일한 자유주의의 쌍생아일 따름이다. 군주제 하에서 소수 귀족들만 참가하던 정치투쟁과 달리 현대의 정치에는 모든 국민이 얽혀 들어간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지역적 공동체성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만들어 내기에 돌아갈 지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고향이 없는 사람은 더욱 강퍅해진다. 또한 덕성 함양을 배우고자 해도 배울 수도 없다. 이것들을 가르치는 인문고전 교양과정인 '자유학예(liberal arts)'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규율과 절제 대신 물질적, 성적 욕망이 장려되는 사회다. 고삐를 벗어난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은 이웃 인간에게 늑대가 된다. <워킹데드>에서처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할퀴고 간 뉴올리언스에서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전에도 있었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의 논문 '공동체주의의 이론적 전개와 자유주의와의 논쟁 고찰'(2010)에 따르면, 1982년 마이클 샌델이 존 롤즈의 <정의론>(황경식 옮김, 이학사 펴냄)에 대한 포문을 열면서 자유주의 비판은 본격화되었다. 샌델은 롤즈의 <정의론>이 원자화된 개인의 권리라는 비현실적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비판한다. 평등한 개인들이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 사회계약을 통해 사회를 구성한다는 자유주의 입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무지의 장막 앞에 서 있는 개인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개인이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은 공공선에 대한 외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인간들이 어떻게 공공선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샌델이 불을 지핀 공동체주의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왈저, 찰스 테일러 등에 의해 발전된다. 샌델 등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서도 열성적으로 수행된다. 미국적 자유주의를 대체할 잠재력을 공동체주의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동체주의의 철학적 관점은 중국인의 사고와 친화성을 보인다. 드닌 책의 주요 내용은 공동체주의의 관점과 대체로 일치한다. 드닌의 남다른 점은 미국적 정치 시스템인 자유주의에 대한 '사망 선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를 문제 삼는 또 다른 지식인 월러스틴의 말을 들어보자. 월러스틴은 한참 전에 <자유주의 이후>(강문구 옮김, 당대 펴냄)라는 책을 통해 자유주의의 위기를 예고했다. 월러스틴은 자유주의 기획을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망한다. 그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소련·동구의 사회주의를 동일한 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양 체제 모두 개인에 초점을 맞추고 무제한적 경제 발전으로 체제 안정을 도모하려 한 점에서 동일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유주의로의 사회 통합은 경제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분열과 갈등이 폭발하지 않고 봉합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 발전이 동반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소련, 동유럽의 붕괴는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자유주의'의 실패라고 월러스틴은 설명한다. 드닌의 자유주의 이해는 월러스틴과 비슷하다. 다만 급진사회학자 월러스틴이 현 세계 체제를 전복할 '제3세계의 위험한 계급'에 기대를 거는 것과 달리, 카톨릭 신자 드닌은 새로운 대안공동체에 기대를 건다.
드닌은 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에 기초한 대안공동체를 제시한다. 500년 자유주의 기획이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며, 드닌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 환경에서 함양하는 실천이다." 지역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이 다시 지역공동체와 연결됨으로써 미국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주장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동서고금을 통관하는 대저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비 펴냄)에서 제시한 것도 '어소시에이셔니즘(associationism, 결사체주의-필자)'라는 대안공동체였다. 프랑스 정치학자 토크빌이 미국인의 독특함이라고 평가한 결사체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드닌은 이런 대안이 실패할 경우 심각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체제가 등장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미 미국에는 이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결사체민주주의로 충만한 대안공동체는 미국을 구조해낼 수 있을까? 안승국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결사체민주주의와 정치공동체'(1997)는 결사체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다. "개인이나 집단들은 다양한 결사체에 가입할 수 있으며 결사체를 통해서 의사를 반영한다." "결사체주의는 기업 내의 노사대립을 해소시킴으로써 자본과 노동 간의 관계도 긴밀하게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안승국의 기대와 달리, 결사체민주주의가 작동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선한 사람들만이 결사체를 이룬다는 생각은 낭만에 불과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결사체는 '프라우드 보이즈(proud boys)'라는 극우단체다.
드닌은 미국의 국가 원리인 자유주의에 대해 사망 선고를 내렸다. 미국의 진퇴양난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식 시스템을 그대로 이식해 온 나라에서도 동일한 사태가 전개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미국의 정치원리인 자유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이제 한국의 자유주의는 안녕한지 물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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