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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은 '삶의 대안'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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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은 '삶의 대안' 찾아가는 여정"

대안학교의 길 <1> '학생-교사-학부모'를 3각의 주체로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는 '대안'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입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 '대안교육'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기껏해야 10여년 남짓에 불과하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하기만한 용어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홍익인간'이라는 기치 하에 오직 단 한 가지 유형의 교육밖에 볼 수 없었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다양한 교육 목표를 지닌 다양한 형태의 학교가 (인가와 비인가를 막론하고) 벌써 수백 개에 이른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그 만큼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수백 개에 이르는 대안학교들은 어디서, 어떻게, 왜 생긴 것일까?**

대안학교가 수백 개에 이르는 현실은 1997년 간디학교가 산청에서 '대안학교'라는 문패를 달고 첫 걸음을 내디뎠던 때에 비춰보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든다. 간디학교가 문을 열 당시만 해도 내로라하는 교육학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 학교의 '생존' 자체에 의문을 표시했었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이토록 다양한 대안학교는 '어디에서, 어떻게, 왜 생긴 것이며, 무슨 교육활동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 법도 하다.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던 대안학교가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이제는 확산일로를 걷고 있는 이 추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바로 이 문제는 이제 우리 모두가 마음을 터놓고 진지하게 답해야 하는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었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땅의 90년대 말 무렵에는 한 해 평균 200~300명의 학생들이 교육에서 파생된 문제로 인해 자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나는 친구가 좋은데,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데 공부! 공부!만 중요한 건가요…' 등등이 자살한 학생들의 유서에 쓰인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충격적인 자살 사건이 일상화되다시피 하자, 그 간 교육문제를 고민해 왔건 아니건 간에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위기감과 함께 의문이 치솟았다. 대체 아이들과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 역시 다니고 싶고, 다니게 하고 싶은 학교를 만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왜 국가는 이와 같은 교육적 불행을 '강매'하고 있으며 우리들은 별 이의도 제기하지 못한 채 이를 의무적으로 '구매'해 왔을까?

이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논란이 분분했으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국가가 독점하는 기존의 학교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인간형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일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대안교육은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대안교육은 현재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교육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공교육 안에서 새로운 실험들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대안교육의 밑바탕에는 그간 진지하게 교육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국내외의 여러 노력이 자리잡고 있다.)

***창의력보다는 복종심을 길러주는 교육에 반기를 들다**

여기서 '대안'은 무엇을 말하고, '새롭다'는 것은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즉답을 하는 대신 지금 30대 이상으로 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흔히 듣던 이야기부터 떠올려 보자.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훌륭한 상'이며 '교육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말이 있다. 또 입시철이 되면 모 대학의 수석합격자가 나오기 마련이고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이 학생을 인터뷰한다. 인터뷰 내용의 중요한 스토리 전개요소는 수석합격자의 '불우한 환경'이고 이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식의 결론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교육은 사회의 평등에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말들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요는 교육을 받으면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온 위와 같은 말들이 과연 '모두'에게 적용되는 바람직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는 개근상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는 차원이 아니라 교육받는 사람들의 의지와 동의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하나의 방향을 지닌 결론이 부과되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그 간의 학교에서 칭찬의 대상은 창의성이 아니라 복종심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단순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인내력(?)을 지닌 노동자, 지시에 순응하는 관료, 명령 복종을 생명같이 여기는 군인들이 칭찬받는 사회가 된 것이 학교 시스템이 지닌 이와 같은 획일적인 이념과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대안학교는 바로 이런 문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교육의 목적은 국가의 발전이나 입신출세와 같은 교육외적인 데에 있지 않고 인간의 성장 그 자체여야 한다거나,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배우고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은 교과서에 쓰인 내용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들 간의 관계 속에서 체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문제제기를 말하는 것이다.

자율학습이라면서 타율적으로 '자율학습'을 시키거나, 학생이 학교의 주체 중의 하나라면서 학생들이 학교의 교육활동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와 권리가 전혀 없다거나, 대학입시라는 명분 앞에 상당수 학생들의 성적을 '수'로 만드는 등의 행위는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일반학교에서 이우학교로 전학온 학생들 중에는 전 과목 '수'를 받았던 학생들이 꽤 있다. 국영수도 잘하고 음악과 체육도 잘 하는 학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외라고 보아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다. 이 학생들은 이우에서 한 학기를 보낸 다음 성적표를 받고는 꽤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수'가 '미'와 '양'으로 바뀌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부분 성적표에 어떤 행동을 바꾸고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내용 탓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그로부터 온 몸으로 배운다.

***"대안학교는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학교'다"**

대안학교 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교육의 근본을 묻는다는 점은 대부분 공통적이다. 그 질문의 대상을 살펴보면 '교육, 학습, 수업, 교육적 관계, 성장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이다. 그 외에도 대안학교들은 기본적으로 교사와 학생, 학생들 간, 그리고 학부모와 학교 간의 민주적 관계를 중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적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전제로 학생과 교사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인다. 또한 아이들의 흥미와 적성을 찾아주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바탕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대안학교는 유토피아가 아니므로 이런 과정에서 아직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대안학교는 간디학교의 양희규 교장 선생님의 말처럼 '대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는 학교'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대안학교가 지니고 있는 한계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학교 규모와 학교 역사의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대안학교의 경우 교육활동에 대한 검증과 공유의 단위가 매우 적다. 일반학교처럼 수백, 수천 명의 교과 담당 선생님이 있어서 자신의 성과를 공유하고 검증하는 기회를 갖기가 힘들며, 대안학교 마다 지닌 특색이 다르므로 공유하는 데에 한계가 있고, 교육적 성과는 단기간의 문제가 아니므로 긴 시간의 세월이 검증단위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더구나 일반학교에 비해 선생님들의 노동시간이 대체적으로 길어서 이런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우학교(www.2woo.net)에서는 설립 당시부터 정기적인 학교평가와 교사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외부의 교육전문가로부터 2년마다 정기적으로 학교평가를 받으며, 매학기마다 학교의 수업을 비롯한 운영 전반을 학생, 교사, 학부모들로부터 평가받으며, 이 결과를 공유하고 있다. 학교는 평가의 결과에서 운영의 개선점을 찾으며 교사는 평가의 내용으로부터 자신이 고쳐야 할 점에 관한 힌트를 얻는다. 물론 이는 이른바 '고과점수'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말 그대로 교사의 성장을 위한 객관적인 자료일 뿐이다.

***아직은 질문도, 의구심도 많이 제기돼…"그것은 우리가 함께 져야 할 몫"**

흔히 대안학교에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의 질문이 있다. 주류와 다른 입장에 서서 교육을 하다 보면 학생들의 '사회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그 중의 하나다. 이에 대해선 거꾸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과연 올바른 사회성을 기를 수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현재 이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성의 본질이 옳고 그름의 기준에 기초하기보다는 처세술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의미의 사회성보다는 공동체적 품성과 인간성을 중시하고, 이같은 입장은 우리가 상생에 기초한 대안적인 사회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것이 보다 온당한 답변인 것 같다.

또한 대안학교가 일반학교에 비해 비싼 등록금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만을 위한 학교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 시점을 뚝 잘라놓고 보면 이 지적은 맞다. 하지만 시간의 폭을 넓혀 보면 대안학교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듯이 교육의 정상화도 어느날 갑자기 성취될 수는 없다. 영국의 써머힐이 수천 개의 학교로 번져간 것처럼 이제 이 땅의 대안학교는 싹을 틔우고 있는 중일 뿐이다. 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불사르고 작은 풀씨 하나가 광야를 푸르게 만드는 것은 대안학교 혼자 질 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학생-교사-학부모'의 3각 대화 속에서 깊어가는 상호 이해**

그렇다면 실제로 대안학교는 위와 같은 이념에 기초하여 어떤 학습의 원리와 수업방식에 따라 가르치고 배울까? 우선 일반학교와 다른 점은 획일화된 인생설계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성공신화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주목하도록 교육과정과 활동을 마련한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활동가들과의 만남의 자리가 있고 사회체험과 봉사활동, 통합기행, 생태와 농사, 음식과 옷 만들기, 도예 등 다양한 교과를 학교이념에 맞춰 제공한다.

예컨대 중1의 '유기견(주인들이 버린 개) 기르기'의 경우 학생들이 개를 기르며 생명의 소중함을 체험한다. 어떤 학생은 그 중의 한 마리가 원래 지니고 있던 병으로 죽었을 때 송시를 쓰고 자신이 그 간에 했던 활동을 반성하면서 '컴퓨터 게임의 무작위 살상'을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대안학교들은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생명, 평화, 인권, 자유 등 공적가치를 교육과정에 넣어서 이를 교육과정 운영의 중심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안게 된다. 즉, 주체적 자아관과 관계적 자아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 외에 이우학교의 경우에는 '21세기의 더불어 사는 삶', '머리와 가슴, 손과 발이 조화롭게 발달된 사람' 이라는 교육적 이념에 근거해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중시한다.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생활협동조합의 설립, 학교 앞을 흐르는 동막천 살리기 운동, 마을 방과후 학교, 생태적 주거단지의 설립, 지역을 중심으로 한 봉사활동(월 2회 정례화) 등이 이러한 예다.

학부모님들의 활동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급식위원회, 도서관위원회, 교과지원위원회, 생협위원회, 홍보위원회, 환경위원회 등등의 학부모 조직은 등굣길 나무 이름 달기, 진로특강 열기, 생협 운영, 학교브로슈어 작성 지원, 급식지원과 운영 활동 등 실제로 학교와 수시로 연결된 상태에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같은 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많으므로 자연히 대화의 양이 늘고 그 질 또한 높아진다. 공통의 경험을 나누면서 체험을 통해 서로의 이해의 폭이 깊어지는 것도 교육적 효과를 높이는 결과를 낳고 있다.

***아직은 미약하나 '대안이 숨쉴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물론 대안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교사와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 대안학교의 경우 학생 간의 왕따현상이나 폭력 등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고 곧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만 언론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긍정적이고 환상적인 모습 일색은 결코 아니다.

일반학교에 비해 이른 시기에 진로의 문제에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은 편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강조하다 보니 적응이 느린 학생들이 많아 가정 내에서, 그리고 가정과 학교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왕왕 있다. 더구나 분명 대안학교는 이 사회에서 소수자다.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는 곳도 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해 학부모님들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안학교도 있다.

대안학교가 우리 사회의 공교육을 대체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의 밖에서 변화를 촉구하고 이끌어내는 모델을 제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만큼 대안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문제도 제도와 법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해법 차원에서 풀려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대안학교의 교육적 실험은 나름의 자생력을 갖고 있기도 하나 제도적인 지원까지 받게 된다면 보다 힘 있게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교사, 학생, 학부모라는 교육의 세 주체에게 자율적으로 맡기고 이를 엄밀하고 객관적인 기준에서 책임을 묻는 '협약학교'의 방식을 모색하는 방안, 공공건물 중 제대로 활용되고 있지 못한 곳을 선택해서 새로운 학교로 만드는 방안, 주중에는 비어 있는 종교단체의 건물 등을 빌리는 방안, 국가에서 폐교를 임대해주는 방안 등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찾을 수 있는 방안은 많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학교와 학부모, 교사의 문화일 것이다.

실제로 교육의 문제는 가정의 문제이며 사회의 문제이지 따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등수를 중시하고 학력을 중시하고 돈과 지위가 중요한 사회에서 '대안'이 숨을 쉴 공간은 넓지 않다. 결국 교육은 미래를 생각하는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한다는 깨달음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문제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안교육 운동은 곧 삶에서 대안을 찾는 운동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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