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속처리안건의 대상은 선거제 개혁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검찰 권한 분산을 위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 검경 수사권 조정과 관련한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개정안 등이다. 이 법안들은 개혁의 최소한으로서 시민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된 사안들이다.
지난 해 12월 15일, 여야 5당 원내대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합의했다. 합의안 첫 조항은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로 되어 있다. 이외에 골자는 '비례대표 확대 및 비례 지역구 의석 비율, 의원 정수 지역구 의원 선출 방식 등에 대해선 정치개혁특위 합의에 따른다'는 것이고,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은 1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한다'고 되어 있다. 물론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 논의를 시작한다'는 조항도 있다.
한국당은 첫째 조항을 들어 '비례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것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이는 군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비례제 논의의 대전제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비례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표심의 비례성과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한 비례대표 숫자의 증원이다. 그러나 한국당은 의원정수 축소와 비례제 폐지를 들고 나왔다. 또한 공수처 설치에 대해선 명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국당은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선거법은 여야가 합의해야 하는 게임의 룰인데 여권이 다른 사안을 연계시킨다며 패스트트랙 반대의 주요근거로 들었다. 정당에 따른 정치적 이해관계는 편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다. 그러나 한국당은 이를 원천봉쇄했다.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갈등을 고조시킴으로써 당의 내부 결속과 지지층을 결집하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추론'은 그래서 타당해 보인다.
한국당은 개혁입법 논의의 시작을 위한 시도를 좌파 독재, 좌파 정변, 좌파 사회주의 등의 언어로 비난했다. 또한 신속처리안건 지정을 의회쿠데타로 규정하고 헌법수호와 독재타도 구호를 외쳤다. 이후에도 장외투쟁을 포함하여 투쟁의 강도를 높일 것이라고 한다.
무리하고 과도한 정치적 행위들이다. 국회법 85조의 2에 명시되어 있는 '안건의 신속처리'는 여야의 입법 교착이 발생할 때 이를 물리적 충돌 없이 타개하기 위해 2012년 5월, 18대 국회 말에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이 주도하여 여야 합의로 개정한 조항이다. 이른바 '동물국회'를 막고 의회주의적 절차에 따른 합의 모색을 위해 일정한 숙고의 기간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당은 여야 4당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정말 '독재'이며, '의회쿠데타'로 생각하는 걸까. 한국당 의원들과 당원들마다 이견이 존재하겠으나 이 모든 극한적 발언과 과도한 정치행태의 초점은 내년 총선에 닿아있다고 봐야 한다.
탄핵과 촛불 민심에 의한 문재인 정권의 탄생으로 거의 궤멸 상태까지 갔던 한국당 등 보수진영의 지지율은 거의 탄핵 이전의 수준으로 복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당의 탄핵 반성과 혁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한국당의 행태는 탄핵이 잘못됐다는 입장을 가진 태극기 세력과 결합을 시도하면서 적대적 혐오를 부추기고, 극한투쟁으로 몰아감으로써 지지를 결집하려는 역사적 퇴행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보수의 결집 못지않게 일반의지에 따른 민심의 이반도 생각할 줄 아는 정치적 감수성의 부재에서 오는 무모한 행위일 뿐이다.
한국당은 민주주의 사망, 좌파 폭정이라는 단어도 동원했다. 탄핵은 헌법절차에 따른 국민주권의 행사였다. 그러나 한국당은 아직도 공식적으로 탄핵에 대해 승복한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탄핵은 잘못됐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역사를 왜곡하는 정당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한 정당은 한국당이다.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한국당의 지지율은 올랐다. 민주당 등 여타 정당들도 상승했다. 양극화된 정당체제에서 지지층이 진영논리에 따라 결집하고 있는 양상이다. 극단의 적대가 정당지지를 견인하는 다수제 양당제 모델의 문제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게 패스트트랙 대치다.
한국당은 반민주적 인식과 총선에 올인하는 구태한 정치 행태를 멈춰야 한다. 2004년의 불법대선자금 사건 때 천막당사, 2005년의 사학법 개정에 반대한 53일 간의 장외투쟁의 추억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이번 사태와 그 당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안임도 직시해야 한다. 한국당이 주장하는 '좌파정변'은 아무 설득도 울림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관점이 한국정치에 대한 양비론이다. 어느 정파나 비판받을 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 민주당 등 집권세력은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한국정치를 싸잡아 비판하고 민생과는 무관한 일에 정치권이 몰두한다는 식의 관점은 기실 한국당의 반민주적 퇴행에 면죄부를 주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양비론의 함정이다. 한국당의 '배드트랙' 폐기는 빠를수록 좋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논의의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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