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5단체 공동주최로 13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장관 초청 리셉션' 행사는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를 연상시켰다. 초청받은 손님을 머쓱하게 만든 풍광이 곳곳에서 목격됐기 때문이다.
***박용성, "제조업 80%가 해외로 떠나고 싶어한다"**
당초 '경제관련 부처 장관들과 재계 CEO들의 상견례'라는 명분으로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 아이디어를 내 만들어진 이 행사는 전례가 없는 것이어서 재계 안팎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대한상의 박용성 회장의 인사말은 짧으면서도 그 안에 재계의 불만과, 정부에 대한 묘한 압박이 깔려 있었다.
박 회장은 "대내외 여건이 불투명, 우리경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시점에서 경제부처 장관과 기업인 대표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갖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는 말로 예의섞인 인사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박 회장은 그러나 곧 "소비와 투자가 계속 부진한 가운데 환율, 금융시장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경기위축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면서 "특히 제조업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너무 빨리 오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어"성장주역인 기업의 경쟁력 또한 아직 선진국과 개도국의 틈에서 '넛크래커 현상'을 면치 못하고 있고 제조업의 80%가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했거나 옮기길 희망하고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기업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차직 하면 더이상 국내에 투자하지 않고 외국으로 떠나겠다는 압박으로 해석가능한 발언이었다.
이어 건배를 제안하러 나온 손길승 전경련회장은 건배사에서 "이번에 입각하신 경제부총리님과 경제장관님들의 탁월한 전문가적 경륜과 두터운 신망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 경제인들은, 참여정부 경제팀이 기업경영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투자의욕을 고취시켜 주실 것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전개된 일련의 사태에 대한 재계의 불만을 감지케 하는 발언이었다.
***김진표, "여러분의 투자가 절실하다"**
여기에 대해 김 부총리는 재계의 불만을 달래듯 당초 예정시간인 5분을 넘겨 15분가량 연설을 했다.
김 부총리는 "재정 조기 집행과 투자활성화에 역점을 둘 것"이라면서 "2.4분기에 2조5천억원의 예산을 조기집행"하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김 부총리는 또"최근 금융시장 특히 증권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증시에서 외국인 비중이 증가한 상황에서 국내기관투자가들의 역할이 미흡하다"면서 "저금리 체제에 기관투자자들의 투자상품 선택 폭을 넓히기 위해 새로운 투자펀드 상품을 개발할 것이니 기관투자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부총리는 "증시 건전성, 투명성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면서도 "증권분야 집단소송제를 시행하되 남소 방지 장치에 대한 충분한 협의후 추진하기로 했다"면서 집단소송제에 대한 재계 불만을 달래느라 애썼다.
부총리는 다시 한 번 "경제활성화를 위해 투자활성화가 절실하다"면서 "정부 규제로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애로 요인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관련 부총리는 "조세체계 역시 국제경쟁력을 뒷받침하도록 넓은 세원, 낮은 세율 체제라는 원칙을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벽에 부딛힌 법인세 인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메시지의 전달로 읽혔다.
끝으로 부총리는 "대통령께서도 여러 차례 밝히신 대로 정부는 성실한 대다수 기업들이 감내할 수 있는 속도로 시장개혁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갈 것"이라며 "시장친화적인 방식에 의하여 개혁이 추진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며 재계를 달랬다.
***"아니, 대기업 조사 안한다고 해야지 그냥 내려가면 어떻게 해"**
이처럼 김진표 부총리의 '성의 있는 연설'에 고무된 박용성 회장은 연단 앞에 줄지어 서있던 경제부처 장관들도 참석자들에게 소개해야 한다며 한 명씩 연단 위에 올라 인사를 하도록 했다.
이날 재계와 경제부처 장관간의 '묘한 역학 관계'는 경제부처 장관 9명 중 8번째로 연단에 올라와 인사를 하던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에 대한 박용성 회장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앞서 인사한 장관들처럼 강 위원장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자유경제질서 구축에 노력하겠다"며 간단한 인사말만 하고 내려가려 했다. 그러자 이날 '야유회 무대'를 방불케 하며 예의 '소탈한 방식'으로 사회를 보던 박 회장은 "아니, 대기업들 부당조사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확인해 주길 바랬는데, 그 말씀을 안 해주시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내려가는 강 위원장을 제지했다.
강 위원장은 마지못해"대기업에 대한 부당내부거래조사는 전임자가 예고한 일정이기에 그대로 진행하려고 했으나 경제환경이 최근 불안해져 안정될 때까지 지켜보다 하겠다"면서 박 회장이 기대한 답변을 해주었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한 강 위원장이 내려가려하자 박 회장은 다시 강 위원장의 팔을 잡으며 "이러다가 솜방망이 조치가 되는 게 아니냐"는 뼈 있는 농을 던졌다. 듣기에 따라선 비아냥으로까지 들렸다.
김영진 농림부 장관,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한명숙 환경부 장관,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이영탁 국무조정실장,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 등 이날 차례로 인사한 경제부처 장관들이 모두 머쓱해진 순간이었다.
이날 리셉션에 참석한 경제부처장관들과 주요 인사들은 장관들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대부분이 준비된 칵테일 파티를 뒤로 한 채 썰물처럼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여론의 사퇴압력을 받고 있는 재계 출신의 진대제 정통부 장관만 유난히 오래도록 남아 있어 눈에 띄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행사장에는 적막감만**
이날 행사는 당초 예정보다 행사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당초 이날 오후5시부터 부총리 등 경제장관과 경제5단체장의 간담회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생략하고 리셉션 행사만 1시간 가량 가졌다. 이미 지난 10일 있었던 재경부 업무보고 및 대통령과의 오찬, 12일 국무총리 만찬 행사에서 재계와의 만남이 연이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날 참석예정이던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 조윤재 경제보좌관, 김태유 정보과학기술보좌관 등 청와대 경제팀들도 노 대통령의 회의 소집으로 전원 불참했다.
SK글로벌의 분식 회계 파문에 이어 금융시장의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주변 상황도 행사 분위기를 가라앉게 했다. 참석 예정이었던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도 작금의 금융불안사태로 이날 사표를 내버렸으며, 이날 건배를 제의한 손길승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SK그룹 회장으로서 SK분식회계사건으로 검찰에 불구속기소가 된 상태라 위상이 크게 실추된 상태다.
과거 대기업 CEO들이 장관들 눈도장을 찍으러 인사 다니던 관행을 깨고 시간을 아낄 겸 함께 상견례를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가 정부와 재계의 묘한 신경전으로 변질된 씁쓸함을 말해주듯, 공식 행사가 끝난 뒤 파티에 계속 남아 대화를 나누는 참석자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행사장에는 적막감만 감돌 뿐이었다.
과연 이날 모임에 초청을 받고 참석한 주한 외국사절과 외국기업인들 눈에는 이날 풍경이 어떻게 비쳤을지, 대외신인도가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 시점에 생각해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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