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을 거듭한 끝에 선거제도 및 검찰개혁 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이 가시권에 진입했다.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이 23일 오전 일제히 의원총회를 열어 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검경 수사권 조정안 등 '개혁 3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방안을 추인했다.
여야 4당 원내대표가 합의한 선거법 개정안은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독식 구조를 바꾸어 의석 비율을 민심에 맞게 배분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공수처 설치 법안도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이 한 발씩 양보했다.(☞ 관련기사 : '개혁 3법' 패스트트랙, 8부능선 넘었다)
여소야대 국회 의석분포와 자유한국당의 비토권이 국회선진화법으로 보장되는 현실에서 패스트트랙은 개혁입법을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개혁입법 제로(0)'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와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디 데이'는 오는 25일. 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해 21대 총선에 적용하려면 4월이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스트트랙은 국회법에 따른 절차의 시작일 뿐, 종착역에 도달하기까지 난관이 적지 않다.
정개특위와 사개특위에서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해야 비로소 패스트트랙이 가동된다. 선거법 개정을 다루는 정개특위는 전체 18명 중 여야 4당 의원들이 12명이어서 비교적 전망이 밝다. 반면 공수처 법안을 다루는 사개특위는 18명 중 11명이어서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패스트트랙이 불발된다.
특위 관문을 넘어 패스트트랙이 시작된다 해도 최장 330일 뒤에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4당 합의대로 개혁 법안이 빛을 볼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이르다. 국회의장의 협조로 본회의 계류 기간(60일)을 줄이더라도 270일이 소요된다. 내년 4월 총선이 임박한 1~2월에나 완료돼 그 사이 정치 상황 변화에 따라 각 당과 개별 의원들이 변심할 수 있다. 특히 선거법 개정은 내년 총선에 적용되는 '룰'을 바꾸는 문제여서 현재의 각당 이해관계가 총선이 임박한 시점까지 유지될지 불투명하다.
패스트트랙 법안들이 특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로 넘어오면 재적의원(298명)의 과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산술적으로 더불어민주당(128석), 바른미래당(29석), 민주평화당(14석), 정의당(6석) 등 여야 4당 의원수는 총 177명으로 과반을 크게 웃돈다.
하지만 바른미래당 소속 의원 중 패스트트랙 추진에 반발하는 바른정당계 의원 8명은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 이날 바른미래당 의원총회에서 패스트트랙 반대표는 찬성 12표 보다 딱 1표 모자란 11표나 나왔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류가 있다.
무엇보다 여야 4당이 마련한 선거법 개정안은 지역구 의석을 현재의 253석에서 225석으로 축소토록 해 자신의 지역구가 통폐합되는 의원들이 반대로 돌아설 수 있다. 막상 본회의에 오르더라도 부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까닭이다.
여기에 총선을 앞두고 정계개편이 현실화되면 자유한국당을 포위하는 현재의 여야 4당 공조 지형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정계개편이 없더라도 패스트트랙을 빠져나오는 시점에 소수 정당들이 선거법 개정으로 수혜를 볼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할지도 변수다. 여야 4당이 마련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방안에는 3%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에게만 의석을 배분하는 '봉쇄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지지율이 낮은 일부 야당은 선거법이 개정돼도 당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어 소극적 태도로 돌아설 수 있다. 민주평화당이 봉쇄조항 문제에 예민하다. 정동영 대표는 "민주당 측에서 봉쇄조항을 5%로 올리는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있을 수 없다"고 경계했다.
자유한국당의 반발은 가장 큰 위기 요인이다. 한국당은 이날 의원총회를 열어 "총력 저지"를 선언했다.
황교안 대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투쟁의 선봉에 서겠다"며 "거리로 나서야 한다면 거리로 나설 것이고 청와대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황 대표는 "민주당이 우리 당과 1대1 승부로는 승산이 없으니 2중대, 3중대, 4중대를 들러리로 세워서 친문 총선연대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도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가 기획하고 여당이 실천하는 의회 민주주의 파괴"라며 "좌파 연합 세력이 내년 총선에서 절대 과반 의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특히 "남은 20대 국회 전체를 보이콧하겠다"고 했다. 패스트트랙만 저지할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이 없어 모든 입법 논의를 불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배수진이다.
한국당이 실제로 국회 전면 보이콧을 실행에 옮기면 당장 4월 국회는 물론이고 내년 총선까지 20대 국회는 갈등과 파행이 지속될 전망이다.
홀로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국당에 여론이 얼마나 호응할지 불투명하지만, 국회 파행으로 인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비롯해 추가경정예산 등 당장 시급한 법안 처리에 발목이 잡히는 정부와 여당도 느긋할 수만은 없다.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한국당을 설득해 선거법이나 공수처법, 검경수사권 조정 등 관련 법들을 여야가 원만하게 타협해서 처리하도록 민주당이 가장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외투쟁까지 불사하겠다며 배수진을 친 한국당을 선거법 개정 논의에 끌어들이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당과 마주앉더라도 여야 4당 합의보다 한참 후퇴한 합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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