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어째서 '김용균법'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우리는 그 안타까운 사연을 잘 알고 있다. 김용균 씨 어머니의 헌신 덕에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법이 통과되었다. '김용균법'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 법에는 "도급인은 관계수급인 근로자가 도급인의 사업장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에 필요한 안전 조치 및 보건 조치를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제 63조가 들어가 있다. 이 조항으로 인해 위험을 외주화하는 원청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김용균법'이 통과되어 다행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21세기에 하청기업 노동자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차별해온 그동안의 관행에 다시금 놀라게 된다.
유럽과 미국의 원·하청 관계는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깝다. 우리와 비슷할 거라 착각하는 일본의 원·하청 관계는 온정주의적 관계다. 원·하청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살펴볼수록 한국의 원·하청 관계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의 원·하청 간의 압도적인 비대칭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관계다. 같은 노동자라도 원청에서 근무하는지, 아니면 하청에서 근무하는지에 따라 받는 보수가 달라진다. 보수에 따라 노동자와 그 가족이 누리는 삶의 질도 달라진다. 자본주의라고 해도 한국만큼 원·하청의 격차가 큰 곳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격차는 우리 내부의 어떤 특정한 문화나 습속에 근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과연 무엇일까.
'능력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역동적 민주주의는 우리 스스로도 자랑하지만, 많은 세계인들도 인정하는 우리의 자랑이다. '6월 민주항쟁' 이후 수십 년간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목청껏 외쳐온 민주주의는 늘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쳤다. 물론 이것만해도 민주적 역량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부족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평등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등해지기 보다 극도로 불평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불평등은 이미 나쁜 의미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능력'에 대한 우리의 물신주의 때문에 이런 불평등은 정당화되고 심화되었다.
'능력'에 대한 맹신은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이데올로기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더 좋은 보수를 받고 더 잘 살고 더 행복해도 된다'는 황당한 생각이 어쩌다 한국인에게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유교 문화로부터 능력주의가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능력주의는 유교에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은 고려시대부터 과거제도가 시행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이토록 빠르게 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고위직을 부여하는 제도는 중국과 우리밖에 없었다. 일본의 젊은 학자 요나하 준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 과거제도를 도입하려고 해도 물적 기반이 없어서 불가능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한 종이와 종이로 만든 책의 대규모 생산과 유통이 중국과 고려같이 생산력이 매우 발달한 나라가 아니고서는 힘들었다고 한다. 영국은 1870년대 미국은 1883년이 되어서야 시험을 통해 관료가 선발되었다. 그만큼 과거제도는 인류 역사에서 드물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Alexander Woodside)는 중국, 한국의 과거제도를 귀족제를 직업적 엘리트 관료로 대체한 세계사적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만큼 대단했지만 그 대신 그만한 대가도 따랐다.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정당화되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아니고 능력을 담보해줄 학력 자본에 따른 불평등이었다. 진짜 능력은 아니었다. 능력을 보여줄 거라는 믿음에 기초한 불평등이자 격차였다. 우리는 이것을 학력·문화 자본이라 고상하게 말하곤 하지만, 사실은 학벌 하나로 먹고 들어가는 세상이었다.
이런 능력주의는 개인적 불평등, 개인적 격차를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사회 전체가 불합리한 격차와 불평등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한국인의 특성을 '평등'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이런 평등 지향은 토지개혁이라는 세계적인 성공 경험 덕분에 귀족적 지주제를 건너뛰어서라고 배웠다. (물론 자유민주세계에서 한국과 대만만 토지개혁에 성공한 이유는 앞서서 중국 본토와 북한에서의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의 치열한 평등의식은 특정 지점에서 사그라진다. '능력'이다.
한국의 유교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 '유교적 근대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2017, <철학연구회 학술발표 논문집>)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에 대한 전국민, 특히 청년들의 분노가 촛불혁명의 결정적인 도화선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우리 사회의 대중들이 갖고 있던 어떤 원초적인 정의감을 건드렸다. 우리 사회의 대중들, 특히 청년들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아니 돈도 실력이라고 우기는 정유라가 부당한 외압을 통해서 명문대에 입학하고 또 별 다른 노력 없이 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냥 가만히 인내하며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정의감은 일정한 실력과 노력만이 특정 성취나 권한을 누릴 자격을 정당화한다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능력주의. 필자)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그 메리토크라시 이념은 지난 촛불혁명의 가장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였다."
장은주는 문재인 정부가 여기저기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했지만,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던 사실을 들추어낸다. 전교조가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한 이유는 뭘까?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단체임에도 전교조는 기간제교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했다. 장은주는 정규직 교사들이 교원 임용고시를 통과했다는 자긍심과 자기 정당화에서 이유를 찾고 있다. "우리의 권리는 임용고시라는 공적인 절차를 통했기에 정당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OECD 국가 중 15년 차 경력 교사 임금보수통계를 보면, 한국이 1인당 GDP 대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유럽을 포함한 선진국 대부분의 경우 1인당 GDP에 근접한 보수를 받지만, 한국은 약 2.3배를 받는다. 사학연금을 포함하면 비교 불가 수준으로 격차는 커진다. 한국 교사는 세계적 기준에서 드물게 좋은 직업이다. 그래서 선진국 교사들은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려는 직업이지만, 한국에서는 보수에 이끌려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정규직 교사의 능력은 무엇인가? 아이를 잘 가르치는 것인가? 한국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임용고시라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만이 능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 가치로 남는다. 시험성적은 직무 현장에서는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이를 근거로 차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랜 옛날부터 한국인은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과거나 시험을 통한 인재선발은 세습 귀족을 제어할 필요성이 있던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다. 세계가 서로 경쟁하는 시대에 한 번의 시험으로 내부노동자가 되어 편히 살아간다는 것은 공평성의 차원에서 정당화되기 어렵다. 시험공부 능력은 인간 능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에서 시험은 물신이 되었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평등한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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