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후 가장 많은 지구촌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반전을 외쳤다. 그 숫자는 무려 세계 1천여개 도시에서 1천1백50만명. 미국의 부시 정권이 주도하는 패권주의에 대한 지구촌 시민들의 대항전이다.
'2.15 반전 집회'를 주도한 세계 시민단체들에 따르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반전시위가 15일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와 중동 등 전세계 1천개 이상의 도시 및 타운에서 개최돼 모두 1천1백50만명이 참가한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각국 정부와 경찰은 시위참가자 수를 8백만명 정도로 낮춰 추산하고 있으나, 이들 또한 2차대전후 최대규모의 반전집회에 아연 경악하는 분위기다.
***미국, 9.11테러 희생자들도 반전집회에 동참**
이라크전 강행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서는 유엔본부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당초 예상했던 10만명보다 훨씬 많은 25만여명의 시위대가 집결, 미정부를 경악케 했다. 뉴욕 경찰은 자체 추산결과를 밝히지 않는 등 시위참가자 수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남아공의 인권운동가로 노벨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이날 유엔본부 앞에서 가진 연설에서 "총구로부터는 결코 진정한 안보를 가질 수 없다"며 "유엔 무기사찰단에 사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줘야한다"고 강조했다. 여배우 수전 서랜든은 "이라크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우리 조국의 안전을 지키는 길은 아니다"고 역설했다. 이날 집회에는 이밖에 대니 글로벌 등 많은 영화배우가 동참했다.
뉴욕 집회에는 9.11테러 희생자의 친척들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가족"이라는 문구를 새겨넣은 우산을 쓰고 행진에 참여했다. 이들의 참석은 9.11테러를 주요 명분으로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부시정부에게 앞으로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뉴욕 이외 로스앤젤레스등 여러 도시에서도 반전집회가 열렸는데, 영화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는 오랜 기간 평화운도을 펼쳐온 마틴 쉰, 안젤리카 휴스턴 등 유명 배우와 롭 라이너 감독 등 할리우드 유명인사들이 대거 동참하기도 했다.
이날 미 공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는 경찰이 반전시위대를 향해 최루가스를 발사해 최소한 2명이 병원으로 후송됐으며 여러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반전시위 주최자들은 시위에 3천여명이 참여했으며 이 곳에서 시위를 계획한 이유는 공군사관학교와 함께 페터슨공군기지 등 군시설이 집중돼 있는 곳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 2백만 모여 "부시는 피에 굶주린 전쟁도발론자" 비난**
이날 전세계에서 가장 대규모 반전집회가 일어난 곳은 유럽대륙이었다. 시위 주최측은 스페인 4백만명, 이탈리아 3백만명, 영국 2백만명, 독일 70만명, 프랑스 50만명 등 전체 1천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아일랜드 6만명, 네덜란드 7만명, 스위스 4만명을 비롯해 노르웨이,헝가리, 룩셈부르크, 크로아티아, 러시아 등에서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반전 구호를 외쳤다.
각국 경찰은 시위 참가자 수가 이보다는 훨씬 적을 것으로 추산하면서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시위라는 데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유럽의 반미감정이 얼마나 거센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날 특히 세계의 주목을 끈 곳은 부시 미대통령과 함께 보조를 맞춰 이라크전을 강행하려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통치하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블레어의 호전적 정책과는 달리,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70%가 유엔이 동참하지 않는 이라크전에 반대할 정도로 반전여론이 거세다.
영국의 반전시위 주최측은 이날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2백만명 이상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런던 경시청은 참석자 숫자를 75만명으로 낮춰 잡으면서도, 영국에서 이같은 많은 인원이 시위에 참가하기는 2차대전이후 처음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런던시내 중심가 하이드 파크에는 주최측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전시위 참가인원이 2백만명을 넘었다는 전광판 표시가 빨간 글씨로 번쩍였다. 이날 하이드 파크에는 켄 리빙스턴 런던시장 등 정치인, 노조 지도자, 배우 등 유명인사들이 동참해 그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궜다.
이날 영국에서는 런던외에 글래스고, 벨파스트 등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도 수만명이 참가하는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날 "수백만 시위대가 국제적 지도자들로 하여금 한 목소리로 미국에게 이라크전쟁을 강행하지 말도록 촉구토록 했다"고 대서특필하며 "시위대들은 이날 베트남 전쟁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에서 부시 대통령을 피에 굶주린 전쟁도발론자로 조롱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언론들도 블레어 총리를 '부시의 푸들'이라고 조롱하며 즉각적 참전 반대를 촉구하는 여론을 전했다.
***프랑스, "우리 모두 함께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파리, 리옹 등 프랑스 전역 주요도시에서 이날 40여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파리에서는 이날 오후 좌파 정당, 노조, 평화단체, 인권단체 등 80개 기관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30여만명이 참여했다. 이 시위 규모는 지난해 대선 도중 장-마리 르펜이 몰고왔던 극우바람을 규탄하기 위해 벌어진 5.1 노동절 시위 이후 최대이다.
시위는 미국인 평화주의자, 1차 걸프전 및 발칸전쟁 참전 용사 등에 의해 시작돼, 시위대는 오후 2시30분께 당페르-로슈로 광장을 출발해 바스티유 광장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평화를' '부시는 살인마' '전쟁 반대' '우리 모두 함께라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번 시위에는 공산당 소속의 마리-조르주 뷔페 사무총장, 장-클로드 게소 전 교통장관, 녹색당 지도자인 노엘 마메르, 공산혁명동맹 소속 알랭 크리빈, 세계적인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 등이 동참했다.
***독일 현역각료들 집회에 대거 동참**
이라크전 반대로 미국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독일에서도 베를린 집회에만 2차대전 이후 최대규모인 50여만 명이 참여, 반전.평화 구호를 외쳤다. 2차대전후 반미집회를 극도로 자제해온 독일에서 현역각료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은 당초 베를린 집회 참가 인원을 10만명으로 예상했으나 오전 일찍부터 시위대가 모여들어 오후 3시 께에는 50여만명이 전승기념비-브란덴부르크관문-알렉산더광장에 이르는 시내 중심도로를 가득 메웠다.
인권.평화.청소년단체, 종교계, 노조, 예술계 등 50여개 단체가 주최한 이날 시위에는 `이라크전 반대' `석유를 위한 피흘림에 반대한다', `부시는 인류평화의 위협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현수막, 애드벌룬 등이 숲을 이뤘다.
슈트투가르트에서도 5만 명이 반전집회를 개최하는 등 이날 독일 전역에서 최소 60여만 명이 반이라크전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볼프강 티어제 하원의장, 위르겐 트리틴 환경장관, 레나테 퀴나스트 농업.소비자장관,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 대외개발원조장관 등 집권 연정각료들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거 시위에 직접 참가해, 부시 정부에 대한 독일정부의 반감이 얼마나 거센가를 보여주었다. 안겔리카 베르 녹색당 당수는 이날 "전세계에서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의 반전평화 시위가 벌어진 것은 독일의 이라크전 반대 정책이 결코 고립돼 있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슈뢰더 총리는 "유엔 무기사찰단의 보고서가 전쟁을 하지 않고 이라크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도 "유엔 사찰단의 활동 기간에 제한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면서 충분한 사찰활동이 이라크의 전폭적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적 해결을 강조했다.
이밖에 스페인에서도 시위 주최측은 전국적으로 4백만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경찰은 약 1백60만명 정도가 모인 것으로 추산할 정도로 대대적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일본 9명의 반전운동가, 이라크전 몸으로 막기 위해 이라크로 향하기도**
아시아에서도 우리나라에서 해방후 최초로 세계단체들과 동참하는 반전집회가 벌어지는 등 거센 반전물결이 일었다.
현재 존 하워드 총리가 미국의 이라크전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호주에서는 베트남전 이래 사상최대인 40만명의 반전 인파가 이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는 주최측이 당초 예상했던 25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시드니에서만 25만명이 운집해 반전을 주장했다. 시위대는 미국의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존 하워드 호주 총리를 집중 성토했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를 경험한 일본의 히로시마에서는 이날 피폭 생존자, 노동단체 회원 등 1천8백여명이 반전을 외쳤다. 이날 집회에서 지난해 이라크를 방문했던 한 교수는 시위대에게 걸프전 휴유증으로 고통받는 어린이 등 참혹한 이라크의 현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 현재 이라크는 15세이하 어린이가 전체국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는 일본 반전운동가 9명이 참석한 뒤 이라크전을 몸으로 막기 위해 이라크로 떠나 비장감을 더했다. 이들은 20명의 평화활동가와 함께 이라크로 떠났으며 이중에는 18살짜리 여고생도 포함돼 있다. 그들은 이라크로 떠나기 전 나리타 공항에서 "이라크과 일본:평화와 우정","전쟁을 막기 위해 이라크로 간다","이라크를 공격하지 마라" 등이 쓰인 플래카드를 들어보이기도 했다.
태국 남부 파타니에도 이날 약 2만명의 이슬람 교도들이 이라크전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파타니는 태국 인구의 약 4%를 차지하는 이슬람 교도의 중심지로 시위대는 약 4시간에 걸쳐 기도와 연설로 반전 메시지를 전했으며 이슬람 지도자들은 미국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촉구했다.
이밖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이슬람교도가 많은 국가에서도 반전집회가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한 반전운동가는 "이라크에 폭탄 대신 부시를 떨어트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랍 외무장관, 이라크전 반대 결의 채택**
중동 각지에서도 이날 수십만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반전시위를 벌였다.
역내 최대 규모의 반전시위가 열린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는 20여만명의 군중들이 '타도 미국' '전쟁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레바논에서도 약 1만명이 참가하는 반전 시위를 열었다.
아랍 중심국을 자처하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는 비교적 적은 수인 7백여명이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도심 곳곳에서 수백명이 모여 반전 시위를 벌였다. 이밖에 요르단 3천여명, 팔레스타인 6백여명도 시위에 동참했으며 이날 전세계 반전 시위의 당사자인 이라크에서도 수십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전쟁에 반대하고 후세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편 아랍연맹 22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16일 카이로의 연맹 본부에서 이라크 사태와 관련, 긴급 회의를 갖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아랍연맹 결의는 회원국들에게 "이라크의 안전과 영토적 통합을 위협하는데 이용될수 있는 어떤 종류의 지원과 시설도 제공하지 말도록" 촉구했다. 결의는 이와 함께 "아랍 국가들은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안전과 영토적 통합성을 지킬 것임을 약속하고 이들 국가에 대한 어떠한 침공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이번 회의는 범아랍권의 이라크 위기 해법을 모색할 아랍 특별 정상회의를 앞두고 정상회의 일정과 의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됐다. 아랍연맹은 아랍 21개국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등 22개 국가.자치당국을 회원으로 하는 범아랍권의 협력체다.
***당황해 하는 미국,영국,호주 정부**
이처럼 반전집회가 거세게 폭발하자, 이라크전을 강행해온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수뇌부는 당황해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런던에서 대규모 반전시위가 벌어진 다음날인 16일 영국 언론들은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가 이라크전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정치경력이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날 블레어총리가 대중들에게 이라크의 위협을 납득시키지 못함에 따라 "정치경력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은 "만약 블레어 총리가 현재 전쟁을 결정한다면 자신의 나라에서부터 소외되고 당도 분열될 위험이 처해 있다"고 평가했다. 타블로이드신문인 선데이 익스프레스는 블레어 총리가 대중들의 희망에 반해 영국을 전쟁으로 몰고간다면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블레어 총리도 이같은 반전집회에 압박받은 듯 종전의 입장을 바꿔 유엔 안보리 2차 결의안 작성에 찬성하는 변화된 입장을 보였다.
미국의 부시 정부도 당황해하긴 마찬가지다. 백악관은 대규모 집회가 있자 "이라크전이 아직 확정적인 것은 아니며 미국정부는 외교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방어적 입장을 밝혔다.
호주의 존 하워드 총리만은 "대규모 반전시위가 대중 여론이 반전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지 않는다"면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있는 것은 호주를 위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그는 "모든 여론조사 내용을 읽고 시위대 참가자의 수를 세는 일이 가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전여론이 거셈에 따라 앞으로 그의 호전적 행보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를 것이라는 게 현지의 일반적 관측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
이번 2.15 세계반전 집회는 앞으로 이라크전 전개과정에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우선 이번 대규모 집회의 결과, 오는 18일 열릴 예정인 안보리 공개회의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반전 진영이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멕시코, 칠레, 앙골라, 불가리아 등 그간 미국의 지지국으로 분류됐던 국가들은 이들 상임이사국이 이라크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안보리 표결에서 기권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미국을 당혹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시 미정부는 이라크전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라크의 세계2위의 석유매장량이 탐나는 것 외에도 여기서 밀릴 경우 내년 대선에서 참패할 게 확실하다는 부시정부의 위기감에 따른 결과다.
하지만 이번 2.15 집회를 통해 한가지 분명해진 사실은 이제 미국은 국제사회의 '외톨이'가 됐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독자의 물리력으로 이라크를 공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후 전개될 모든 상황에서 미국은 더 큰 국제 시민여론의 거센 저항과 압박에 직면할 것이며, 이는 곧바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시민사회의 일반적 견해다.
부시 정부로서는 '지구촌 시민 파워'라는 일생일대의 천적과 직면한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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