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리는 법 : 여드름과 유전**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여러 가지 해프닝이 생깁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대기실이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진료실로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부부와 20대의 딸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짜고짜 “당신이 뭘 안다고 우리 딸에게 그런 심한 말을 했느냐!”고 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막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료 기록을 확인하고 자초지종을 천천히 들어보니, 여드름으로 치료를 받는 딸이 병원에서 “여드름은 유전적으로 생기는 것이라서 평생을 두고 꾸준한 치료와 관리를 받아야 한다.”라는 설명을 듣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우울증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젊은 시절에 여드름이 없었는데 어떻게 딸에게 생긴 여드름이 유전적인 요인으로 발생한 것이냐고 항의성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여드름과 유전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왜 여드름을 꾸준하게 치료하여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분들에게 설명을 드린 ‘여드름과 유전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몇몇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여드름이 생기는 것과 유전적인 요인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독일에서의 연구결과를 보면 여드름이 있는 학생의 부모 중 45%에서 부모 어느 한쪽은 여드름이 있었던 데 반해, 여드름이 없는 학생의 부모 중에서는 단지 8%만이 부모 중 어느 한쪽에 여드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전적 요인이 여드름 발생에서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보다 직접적 증거는 일란성 쌍생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드름의 발생 정도, 여드름의 심한 정도뿐 아니라 피지 분비량까지 일란성 쌍생아에서는 동일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면포(comedone)의 숫자도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피지 분비량뿐 아니라 면포 형성에도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세 쌍의 심한 ‘응괴성 여드름’을 가진 일란성 쌍생아를 비교연구한 결과를 보면, 서로 비슷한 시기에 여드름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이란성 쌍생아에서는 50% 정도에서만 비슷한 여드름 양상을 보였다 합니다.
사춘기에만 여드름이 생기는 경우보다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으로 여드름이 생기는 경우(=persistent acne)에서 '가족력'이 있는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염색체 이상의 일종인 ‘XYY증후군’이라느 게 있는데, 남성 염색체인 Y가 두개인 염색체이상 증후군으로 이런 사람들에서 아주 심한 여드름이 생기는 것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사진: 백색 면포와 염증성 여드름이 피하에서 서로 연결되어 염증성 동굴(sinus)이 형성된 응괴성 여드름(acne conglobata)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저작권 이지함피부과>
유전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질환 중에 '아토피 습진'이 있는데, 여드름을 앓은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아토피 습진의 발생률이 낮다고 합니다.
아토피가 있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피지 분비가 적습니다. 이런 요인으로 아토피를 가진 사람들은 여드름이 적게 생기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토피와 여드름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결과만으로는 "여드름이 유전적으로 생긴다"는 직접적인 반증은 되진 못합니다. 다른 요인으로도 이런 현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종적으로 여드름 발생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면, 여드름은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흑인은 백인에 비해 여드름이 적게 생기지만, 일본인에 비해서는 심한 여드름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생선을 주로 먹는 에스키모인(현지인들은 Inuits이라고 한답니다)들은 여드름의 발생률이 낮은 데 비해, 포화 지방산이 많은 육식으로 식사 패턴이 바뀌면서 여드름의 발생률이 증가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인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육식 위주의 미국식 식사를 하면서 생긴 현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다는 것은 꼭 부모 중에서 여드름이 없었더라도 삼촌이나 이모와 같이 가까운 혈족 중에서 여드름이 있었다면, 여드름이 생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이런 경우를 의학적으로는 “가족력이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여드름이 심한 경우에는 외모에 대한 컴프렉스로 우울증이 생길 수 있으므로 심한 경우 정신과 전문의와의 상담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여드름이 잘 치료되면서 이런 우울증 증세는 없어지므로 여드름을 잘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같은 저의 설명을 듣고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해를 표시하며 병원을 소란스럽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하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이번 경험을 통해 환자에게 당연히 알려야할 의학적인 정보라 해도 환자에게 그 정보를 전달할 때에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생명과 관련된 심각한 질환이라면 환자에게 직접 설명하기 곤란하므로 대개 보호자에게 먼저 설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요즈음에는 환자 당사자가 직접 설명을 듣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생을 정리하는 기간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이런 심각한 경우라면 당연히 주치의의 질환에 대한 설명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성적인 질환, 예를 들어 여드름, 당뇨병, 고혈압일 경우에는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치료나 예방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이, 이런 일반적인 원칙이 모든 환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술은 예술이다“ 라는 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환자에게 당연히 알려야할 의학적 정보를 알리는 것도 이런 미묘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하물며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제라면 이것을 어느 선까지 국민들에게 알려야되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있을 것 같지 않네요. 환자들이 자신의 질환이나 치료 내용에 대해 알 권리를 주장하듯이, 국민들도 대통령의 정치행위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알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밝히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 같네요.
자세한 의학적 정보를 전했다는 이유로 항의를 하는 것이 환자나 보호자의 입장인 것을 보면, 모든 사실을 다 알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구요. 임기를 며칠 남기지 않은 노(老)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를 착찹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정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내야만 하는 우리 정치 상황의 어려움을 어렴풋하나마 엿볼 수 있네요.
우리도 언제쯤이면 퇴임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요? 아니 언제쯤이면 우리 국민들이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물러나는 대통령을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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