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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얼마나 근대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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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얼마나 근대적이었을까?

[인문견문록] 김상준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독재 타도' 소리가 전국을 들썩일 때 나는 미국인 인류학자의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시카고 대학 박사 과정이었던 그는 박사 논문의 주제로 민주화운동과 한국인의 유교적 심성과의 관련성을 연구했다. 그를 돕고 있던 동생의 소개로 만나서 번역 작업을 종종 거들었다. 작업을 열심히 도왔지만 사실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것이 유교적 품성 때문이라니. 공감이 가질 않았다. 사정이 생겨서 조수 노릇을 그만두었지만, 유교에 딱히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유교에 무관심하다가 관심을 갖게 된 두 번의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기독교 변증론자인 C.S. 루이스가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장경철·이종태 옮김, 홍성사 펴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단서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는 우리 내면의 양심'에서 도출해내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논리는 2000년 전 맹자가 말하던 측은지심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또 다른 계기는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였다. "한국 사극에서 왕 앞에서 관료가 격론을 펼치는 장면을 보고 감명받았다. 일본의 지배층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막후에서 교섭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겉으로 의논하는 법은 없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인은 언제나 공공연히 의논한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2012년 2월 22일 자 <한국일보>) 지긋지긋한 당쟁이라고 생각하던 그 모습이 세계적 지식인의 눈에는 훌륭한 정치 행위였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인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눈이 아니다. 서구에 의해 굴절된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는 동아시아의 유교적 후진성을 당연시했다. 그런 관점을 학술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사회학의 비조(鼻祖)인 막스 베버다. 그는 중국이 자본주의 문턱까지 갔지만 결국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했던 이유를 중국 에토스(ethos 사회별로 특징지어지는 관습)에서 찾았다. 20세기 후반까지 절대적 진리로 군림하던 베버의 유교테제는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흥과 함께 점차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나 논의의 대부분은 유교의 특정 요소가 자본주의에 선택적 친화성(베버의 용어)을 가진다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21세기 들어 중국의 도전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주장에 대한 여러 도전들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한국인 학자가 베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회학자 김상준 교수다.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선사한 책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펴냄)가 그가 쓴 책이다.

▲ <맹자의 땀 성왕의 피>(김상준 지음, 아카넷 펴냄). ⓒ아카넷
먼저 김상준이 도전한 베버의 유교 테제를 살펴보자. 베버의 책 <중국의 종교(The Religion of China)>(미번역)은 왜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는가를 다룬다.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발생한 것을 현대인은 당연시한다. 하지만 19세기 초반까지 세계 경제의 3분의 1을 담당할 정도로 막강했던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인의 내면에 뿌리박힌 영리 추구 심성, 훌륭했던 농업 생산성, 활발했던 화폐 경제, 창조적인 발명품 등 중국에는 자본주의로 이행할만한 많은 요소가 있었다. 베버조차 "중국인의 근면과 노동능력은 언제나 비길 데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중국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교가 자본주의를 저해했기 때문이었다.

유교는 어떻게 자본주의적 발전을 방해한 것일까?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발휘해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한 것이라 설명한다. 프로테스탄트는 구원예정설을 믿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속에서의 직업적 성공이었다. 프로테스탄트에게 직업은 밥벌이만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이었다. 소명이었기에 소명을 통한 성공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은 필요 이상의 자본을 축적할 동기가 없다. 오직 성공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들만이 자본을 축적한다. 현대인은 모두가 돈에 미쳐있기에 이것을 당연히 생각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돈과 성공을 집단적으로 추구한 것은 특이한 사건이었다. 이들을 성공에 목마르게 만든 것은 구원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의식하는 극적 긴장감이 이들을 현실 속에서 성공하게 만든 동인이었다. 베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리적·초월적 긴장이 바로 이것이다.

이점에서 유교는 매우 달랐다. 베버는 유교를 "현세와의 갈등을 절대적으로 감소시킨 합리적 윤리"라고 말한다. 유교는 '현실적응적 윤리'다. 그래서 유교는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현세와 개인의 초현세적 사명간의 긴장"을 모른다. 현실적응적 태도는 현세와의 윤리적 긴장의 부재를 낳았다. 베버의 설명이다. "자연과 신, 윤리적 요구와 인간의 불충분함, 죄의식과 구제요구, 현세에서의 행적과 내세에서의 보상, 종교적 의무와 정치사회적 현실 간의 어떠한 긴장도 이 유교윤리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과 인습에 전혀 구속받지 않는 내면적인 힘을 통해 생활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베버는 왜 유교의 현세지향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까? 베버의 생각으로는 초월성과의 긴장 속에서 합리성은 자라나기 때문이다. 베버에게 현세와의 윤리적 긴장감은 근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유교는 이런 긴장감을 결여한 종교였다. 이것이 베버의 유교 테제였다.

김상준은 유교가 현세와의 긴장을 결여하고 있다는 베버의 지적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는 베버의 초월적 긴장을 '현세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식'이라 정의하며, 우환(憂患) 의식을 유교에 고유한 윤리적 긴장의 사례로 든다. 그는 우환이란, "현실의 불완전성에 대한 아주 근원적인 자각을 지극히 유교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예를 들어 논어 자한(子罕)에서 '봉황은 오지 않고 하도는 나오지 않는다'라고 공자가 탄식하는 문장이 나온다. 봉황은 순임금 시기 세상이 평온했을 때 나오는 새이고 하도는 전설적 인물 복희씨 때 나타난 용마(龍馬) 등에 씌어있던 기호다. 공자는 자신이 살던 시대가 이전의 평화로웠던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타락한 시대였다고 인식했다."

또한 유교의 도통(道統)론은 초월적·종교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도란 타락한 세상을 구제할 하늘의 도리를 의미하고 통이란 그 도리를 전수하고 실천할 집단의 계통을 의미한다. 도통론이 유교에서 그토록 중요시되었던 것은 유교의 현실에 대한 긴장도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었다. 베버는 유교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왜 이런 오해가 발생했을까? 현세 종교라고 분류될 만큼 초월에 대한 언명이 유교에는 드물었다는 것도 오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교적 초월 원리가 외적으로 파악되기에 좀 복잡한 맥락 속에서 움직였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김상준은 베버의 유교 테제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왜일까? 유교 테제를 논박하지 않고는 베버가 쳐놓은 근대성 그물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긴장감이 부재한 유교는 사회를 합리화할 동력을 마련할 수도, 자본주의를 창출해낼 수도 없었다. 자본주의의 미발달은 내발적 근대화의 실패를 의미한다. 베버의 유교테제를 그대로 승인하면 동아시아는 식민지가 되는 그날까지 전근대 사회였던 것이다. 베버는 서구가 자본주의를 발아해 낸 사실로부터 서구의 근대성을 유추·확증한다. 이로서 근대성은 서구의 전유물이 된다. 김상준은 베버가 짜놓은 틀을 넘어서기 위해 근대성 패러다임 자체를 뒤집는다. 베버가 노는 물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싸움을 거는 것이다.

김상준은 베버적 '고전 근대성'을 넘어서기 위해 '중층 근대성'을 제안한다. 그의 중층근대성론에 따르면 근대성이란 자본주의와 맞물렸던 근세 유럽지역에서만 단발적으로 출현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성은 오랜 시간 쌓여진 여러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 근대성이 문제인 것일까? 인류학자 파비안(Fabian)에 따르면, 근대성 담론은 야만인의 이미지와 시간의 등급을 만들어낸다. 근대성에서 배제되는 사회는 시간적으로 열등한 사회이며 이들은 야만인으로 이해된다. 이런 서구적 근대성을 그대로 두고는 동아시아의 문명사적 의미를 확보하기 어렵다. 중층 근대성은 근대성의 판을 새롭게 짜기 위해 김상준이 만든 개념이다.

중충 근대성론에 따르면 근대성은 원형 근대성, 식민-피식민 근대성, 지구 근대성의 세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형 근대성은 기축시대 보편 종교에 의해 등장해서 식민 시기까지, 식민-피식민 근대성은 제국주의가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시기, 지구 근대성은 2차대전 이후 국민국가가 등장한 시기를 가리킨다. 김상준의 논점은 원형 근대성의 구축에 있다. 현대적 근대성의 맹아 형태인 원형 근대성은 기축시대 세계 종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2000년 전이 근대성의 기점이라니? 공감하지 못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김상준은 근세 역사에서 나타난 근대성의 원형이 기축시대에 이미 발현되었다고 본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가 말하는 기축시대(BC800~BC200)에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윤리와 종교가 집중적으로 출현했다. 그리스 윤리철학, 이스라엘 예언자들, 인도·중국·이란의 성인과 철학자들이 활동한 시기가 이때였다. 우리가 보는 근세 근대성은 원형 근대성이 만개(滿開)한 것이다.

먼 과거인 기축시대를 원형 근대성으로 판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축문명을 근대성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구도에서만 역사적 근대가 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성이 달성한 물질적, 지적, 윤리적 수준은 원형 근대성의 도달 없이는 불가능했다." 기축시대는 성(聖)이 속(俗)을 통섭하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속이 성의 통섭 아래 들어가는 데는 막대한 긴장이 필요했다. 성이 통섭해 나가던 고대 사회는 우리 생각과 달리 성의 세계가 아니었다. 주술에 의한 인신 공양, 타자에 대한 혹독한 폭력 등 윤리적 세포가 살아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이런 험악한 속(俗)의 세계를 성(聖)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바꾸려했으니 얼마나 큰 긴장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세계 윤리 종교의 영향력으로 인류는 원형 근대성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사회를 통합적으로 규제하는 원리가 없던 시대에 신성한 윤리가 도입되었다. 이들의 가르침은 이내 국가사회의 원리로 보편화된다. 가르침의 핵심은 초월적 질서로 현세적 질서를 상대화하는 것이었다. 보편종교는 초월적 세계의 타세성과 현실세계의 차세성 사이에 현격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주술에 의지하던 사회에 완벽한 속의 세계에 차세성의 개념과 윤리감의 등장은 고대사회를 전변시켰다. 원형 근대성에 기초한 사회가 계속 이어지다가 유럽의 경우 종교개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하는 초기 근대가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을 계기로 발아한 것이다. 종교개혁, 근대과학의 등장으로 속을 통섭하던 성은 재차 속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제 속이 성을 통섭하는 시대가 온다.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기다.

중층 근대성론의 가장 특이한 주장은 15세기 이후 근대성이 발전되어 나간 시기를 원형 근대성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즉 역사적 근대는 보편종교로 확립된 원형 근대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0년 전 성과 속의 현격한 대립이란 이항대립을 주조해낸 것은 원형 근대성이었다. 역사적 근대에서 다시 속이 성을 통섭했다고 하지만 고착화된 이항대립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었다. 근세 속에서도 속(俗)과 대비되는 성(聖)의 윤리적 긴장감은 그대로 작동했다. 성에 의한 속 통섭이 속에 의한 성 통섭으로 변화되면서 성(聖)은 훨씬 내면화되었다. 이런 윤리적 긴장의 내면화가 유럽에서는 스피노자 철학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주자철학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의 유사성을 동양철학자 한형조는 논문 '주자신학논고시론'(2004)에서 설명한다. 베버가 말한 합리화만이 근대/전근대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속에 의한 성의 통섭이란 관점으로 바라보면 동아시아의 근대는 유럽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 11세기 송(宋)나라 때였다.

송의 근대성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서구의 근대성이 대항해 이후 식민지무역에서의 부의 축적, 산업적 발명, 과학적 기술의 발전, 자본주의의 형성과 맞물렸듯이 송시기의 중국도 유럽에 버금가는 변화를 겪었다. 일단 한당제국의 지배세력의 축을 이루었던 귀족세력이 북방세력의 거듭된 공격으로 거의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이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장원 시스템도 무너져갔다. 신분제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또한 사(士)라는 학인-관료집단의 형성, 이앙법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 철강 부문의 혁신, 다양한 발명품, 무역의 비약적 확대는 송의 근대성을 뒷받침하는 물질적 기반이었다. 신분제를 탈피하고 물적 기반을 확고하게 만든 송의 성취는 원나라가 계승해 더욱 심화·확장시켰다. 이런 성과가 이어져 세계GDP에서 중국이 점하는 비율은 1820년대에는 32.9퍼센트(동아시아 전체는 41.1퍼센트)에 달했다. 동아시아 농업사 연구자인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런 중국의 약진 배경에는 양민신분의 소농들이 만들어낸 소농사회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후 소농사회는 동아시아 사회구성체의 특징이 된다.

유교의 남다른 특색은 무엇인가? 김상준은 반폭력이라고 말한다. "유교에는 인류사 보편적인 윤리정신이 있다.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폭력과 불의에 결연히 반대하고 맞서 싸우는 자세다. 이점을 아직 세계는 잘 모른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자체가 국가 건설 과정에 묻힌 피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으로 성립했다. 씨·부족 사회에서 국가체제로 넘어가는 데에는 엄청난 폭력이 수반되었다. 원초적 폭력 앞에 노출된 인간은 어떻게 폭력을 제어하는가? 가장 거친 폭력은 군주로부터 나온다. 폭력은 외부와의 전쟁보다는 내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더욱 처절해지는 경향이 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유교 창건자들은 군주에게 묻어있는 폭력의 역사를 말끔히 소거한 채 성왕(聖王)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후대 왕들에게 따라야 할 전범으로 제시했다. 이로써 폭력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 했다. 공자가 말한 이전의 가르침을 정리는 했으나 자신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정확히 이것을 의미한다. 유가의 정경(正經)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성왕들의 폭력의 역사가 시자(尸子) 같은 외경(外經)에는 고스란히 적혀있다. 즉, 성왕이라는 개념은 유교 사상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유교의 창시자들이 그토록 폭력에 민감했던 이유는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김상준의 설명이다. "폭력과 인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요임금의 이미지가 술이부작의 붓끝에서 탄생했던 공맹의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폭력이 홍수처럼 범람하던 시대였다." 춘추시대가 시작될 기원전 722년 주나라 제후국은 172개였으나 기원전 464년에는 23개 기원전 221년에는 진나라 하나만 남는다. 이런 조건 하에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유교 창건자들은 고대의 군주를 반폭력주의 영웅으로 그렸다. 이런 영웅 창조로 무엇을 하려던 것인가? 김상준은 윤리를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할 수 있는 반성력"이라고 규정한다. 영웅들의 반폭력을 그림으로써 유교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도입했다.

윤리적 감성이 도입된다고 해서 폭력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신도, 내세도, 인과응보로서의 윤회도, 절대적 선신과 악신의 갈등도, 최후의 심판도 없는 유교 윤리에서 행위 주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여타 종교와 다른, 유교만의 궁극적, 초월적 조정 논리는 무엇인가? 김상준은 '성왕 이념'과 '예(禮)'가 유교의 초월적 조정 논리라고 말한다. 유가(儒家)는 모든 폭력을 탈피한 이념형으로서의 성인군주, 즉 성왕을 만들었다. 예는 성왕들이 행해야 하는 행위 양식이었다. 예의 근거는 종법(宗法)이었다. 유가는 성왕의 개념을 창안해내고, 현실 군주에게 성왕의 예(禮)를 강력하게 권하며, 종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세 가지가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유교 창건자들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종법(宗法)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생각하면 된다. 만약 헌재가 탄핵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내전으로 돌입할 가능성도 있었다. 왕가 종법(宗法)의 핵심은 왕위 계승의 명확한 정리에 있었다. 종법은 권력 승계의 원리를 뜻한다. 종법이 명확하지 않아 삼촌과 조카가 싸우고 장남과 차남이 피를 불렀다. 현실 속에서 왕위 계승은 늘 위태로웠다.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강력한 예방 조치였다. 공자가 주공(周公)을 존경한 이유도 조카 성왕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아서였다. 군주라는 절대권력에 대한 승계 원리를 제대로 정립함으로써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고 유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종법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친족 간의 관계가 더욱 유의미한 관계로 정립되어야 했다. 유교에서 조상 숭배에 기초한 친족주의가 두드러졌던 이유다. 종법의 원리를 알면 조선 당쟁도 이해 가능해진다. 옷차림 하나가 권력 승계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책에 대해 필자 나름의 평가를 하기 전에 다른 분들의 평가를 살펴보았다. 베버 연구의 권위자이자 사회학계의 원로인 전성우는 서평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과연 이 책을 평할 자격이 있는가?" 전성우만이 아니다. 철학계의 스타 지식인 한형조마저 이렇게 말한다. "동서와 고금, 그리고 인문과 사회과학에 걸친 풍부한 학식과 정보, 그리고 현실을 아파하는 열의에 비추어 볼 때, 필자는 저자의 신들메(신발끈. 필자)도 풀지 못한다." 필자의 지인도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조영일 옮김, 비(도서출판b) 펴냄)를 넘어서는 걸작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상찬하기에 용기를 내어 약간의 비판을 가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책머리에 "오늘날 세계인들이 놀라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전통과 활력이 어디서 왔는가? 조선 유교에서 왔다"라고 썼다. 저자는 민주화 운동의 근원을 찾아가다 유교를 만났다. 저자는 유교가 오해받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유교가 원래 그런 것은 아니라며 동서고금에 걸친 논설로 유교를 방어한다. 원래의 유교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원래의 유교 즉 이념형으로서의 유교가 이렇게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 일반인들에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정치철학자 장은주가 책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한국학술정보 펴냄)에서 정확히 이 지점을 지적한다. 장은주가 보는 한국 사회는 '집단과 공동체에 대한 강조'와 '개인의 부재'가 맞물린 사회다. 또한 경제적 성공만을 목적으로 삼는 현세적 물질주의에 매몰된 사회다.

한국 사회의 이런 문제의 뿌리는 어디일까? 장은주는 위기의 원인을 "우리 사회의 위기를 특유한 도덕적-문화적 지평에 뿌리를 둔 문화"에서 찾고 있다. 그는 유교를 지목한다. 총체적 위기를 초래한 유교적 근대성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유교적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이념'이다. 시험통과자는 모든 것을 취득하고 탈락자는 열패자로 살아가야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념이 메리토크라시다. 능력주의로도 번역되지만 시험통과자가 능력을 보이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사회의 신분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이 유교적 메리토크라시이념이다. 장은주는 유교적 근대성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 선다. 여기서 철학연구자 나종석은 "유교적 습속에 내재해 있는 해방적 요소를 과소평가한 것"이라며 장은주를 비판한다. 나종석은 메리토크라시에 대해 논문 '전통과 근대: 한국의 유교적 근대성 논의를 중심으로'(2015)에서 이렇게 옹호한다. "중요한 사실은 입신양명주의조차도 개인을 타고난 신분이나 혈통에 의한 귀속의식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역사학자 알렉산더 우드사이드(Alexander Woodside)의 과거제도에 대한 '농업의 시작과 산업발달에 이른 인류사의 세 번째 혁명'이란 평가를 덧붙인다.

김상준은 원래적 유교란 좋은 것이라 말하고, 장은주는 유교문화적 요소가 현재의 한국을 이렇게 만든 것이라 논박한다. 나종석은 장은주가 이해하는 유교는 식민기에 이식된 황도(皇道) 유학이라고 반박한다. 조선의 유학이 아니라 일본 그것도 제국주의에 의해 변형된 유학이라는 지적이다. 세 사람의 상호 논박은 결국 유교적 근대성이 명확히 제시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나종석은 원래 유학이 나쁜 게 아니라 황도유학이 나쁜 것이라 하는 데 마찬가지로 황도 유학은 유학이 아닌가? 특정한 정치적 상황 하에서 원래의 문화, 이념은 변형을 겪기 마련이다. 황도 유학적 요소가 순수한 원래의 유학에 내재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장은주의 유교에 대한 폄하에 두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실 초점이 다르다. 두 사람은 유교의 순수한 이념형에 대해 상찬하고 장은주는 현실화된 유교의 문화적 습속이 보이는 폐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나종석의 메리토크라시 옹호는 나이브(naive)하다.

저자는 조선에서 전개된 대중화된 유교, 즉 동학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저자는 유교의 이념형에 애정을 보이지만, 모든 사상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작동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실화되지 못한 이념형은 늘 소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소망의 대상으로만 끝나버린다. 유교를 책 속의 이념형으로만 궁구한다고 올바른 유교 연구일까? 21세기 유교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우환 의식을 가진 유교적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와 결합해 중국, 베트남, 북한의 민족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 유교 지식인들이 건설한 세 나라의 모습이야말로 유교의 가능성과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것은 아닐까? 현존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나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체제가 민족 해방 운동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민족 해방 운동은 유교적 마인드로 무장한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은 "처음 나를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로 이끌어간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라고 말했다. 그의 애국주의는 유교적 애국주의였다. 현대 중국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중국의 경제적 성취에만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 저자는 "북한이 유교적이라는 내외의, 항간의 속설은 난센스"라며 간단히 일축한다. 유교는 좋은 것이지만, 유교 지식인들이 만든 국가가 별로라면 그 유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상준이 스스로 자부하는 '시차적 관점'을 이들 나라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맹자의 땀 성왕의 피>는 탁월한 책이다. 한형조의 표현으로는 '유교의 문명론적 정위'를 시도한 대단한 책이다. 독자는 유교 안에 원래 있었던 근대성의 단초를 발견하는 흥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책을 덮을 즈음 '근대적인 것은 더 좋은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꾸 들게 된다. 근대는 좋고 유교적 근대성은 더 좋은 것인가? 저명한 진보지식인인 안드레 블첵(Andre Vltchek)은 노엄 촘스키와의 대담집 <촘스키, 은밀한 그러나 잔혹한>(권기대 옮김, 베가북스 펴냄)에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블첵의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지구상에서 5000만~5500만 명이 서구의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허탈해진다. 근대성이 감추는 피의 흔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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