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미래당이 의원총회를 열고 선거제도 개편 '패스트트랙' 협상안 추인을 시도했으나 불발됐다. 바른미래당 의원총회 도중, 협상 상대방인 더불어민주당의 홍영표 원내대표가 협상안 내용을 부인하면서다. 앞서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선거제도 개편과 사법개혁 사안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고, 바른미래당은 이 '패스트트랙 4당 연대'의 키를 쥔 캐스팅보터였다.
바른미래당은 18일 오전 9시부터 약 3시간 30분 동안 의원총회를 열고 패스트트랙 안건에 대해 토의했다. 의총 시작 후 1시간여 동안은 당 지도부 사퇴론이나 제3지대 정계개편 논의 관련 발언이 이어졌고, 패스트트랙 관련 토론은 10시를 넘겨서 시작됐다. 의총에서 김관영 원내대표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가 검사, 판사, 경무관 이상 경찰 고위직 등 3부류의 피의자 수사에 대해서만 기소권을 갖는 방안'을 제시하며 이것이 민주당과의 "최종 협상안"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이 이에 '그 안이 민주당에서 의총을 거쳐 추인받은 것이냐'고 묻자, 김 원내대표는 "그건 아니지만 이것이 최종안이다. 믿어도 된다"며 설득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초 원내지도부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이 '최종 협상안'에 대해 표결 등 추인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주승용 의원도 "3차례 의총을 했는데 토론만 하고 끝낼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찬반 숫자라도 파악해 보자"고 실질적 논의를 재촉했다.
그러나 이날 오전 10시께,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가 기자들과 만나 "그런 제안을 한 적 없다.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바른미래당에) 저는 '그런 거 안 된다'고 했다"고 말한 사실이 의총장에 전해지면서 지도부와 패스트트랙 찬성파는 난감한 처지가 됐다. 의원들에게 협상 내용을 직접 보고한 김 원내대표는, 자신이 방금 설명한 내용을 홍 원내대표가 부인했다는 말에 당황하며 "실망스럽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 의원은 의총 중 먼저 자리를 뜨면서 회의장 밖 기자들과 만나 "홍 원내대표 발언 내용이 (의총) 중간에 들어왔다. 그래서 팩트가 맞느니 안 맞느니 하면서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협상안이) 없었던 것처럼 되고 있다"고 말했다.
패스트트랙 반대파는 추인을 막을 훌륭한 명분을 쥐게 됐다. 유의동 의원은 "오늘은 표결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홍 원내대표 발언도 있었고, 민주당과 충분히 논의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왜 자꾸 이런 의총을 하느냐. 당 내외로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키고 있다. 좀 신중히 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유승민 의원은 의총 후 기자들과 만나 "'최종 합의'가 된 게 없기 때문에 오늘 결론을 낼 상황이 아니었다"며 "김 원내대표는 '최종 합의된 게 있다'고 처음에 주장을 했는데, 10시에 홍 원내대표가 한 말을 보니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했더라"고 말했다. 유 의원은 "과거에 이런 식으로 합의 안 했다. 최종합의는 양당 원내대표가 서명한 구체적 안이 있어야지, 한 사람은 '합의했다' 하고 한 사람은 '합의된 적 없다'고 하고, 이런 상태에서 바른미래당이 바보같이 이런 의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원내지도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패스트트랙 논의는 지난달 20일 의총 후와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 김 원내대표는 의총 결과 브리핑에서 "최종합의 내용 자체를 상대 당에서 번복한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합의된 안을 전제로 해서 논의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며 "조만간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이 공수처 안에 관해 최종적 합의안을 문서로 작성하도록 하겠다. 작성된 합의문을 기초로 해서 다시 당의 총의를 모으는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김 원내대표는 논의 경과에 대해 "오늘 저는 민주당과의 최종 합의사항을 의원들에게 전달하고 추인받는 절차를 진행했지만, 회의 중간에 제가 '최종합의안'이라고 말씀드린 안에 대해 홍 원내대표가 부인하는 발언을 했다"며 "당내 패스트트랙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진 의원들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말의 행간에서나 '구두합의로는 안 되겠으니 합의문을 써야겠다'는 결론에서나 홍 원내대표에 대한 원망이 묻어난다.
이날 의총까지 불발되면서 패스트트랙 추진 시간표는 더 급박해졌다. 김 원내대표가 설명한 '최종합의안'대로 민주당-바른미래당 간 타결이 성사된다 한들, 바른미래당 내부의 반대는 여전할 것이 뻔하다. 바른미래당 내 반대파들은 '선거제 개편은 여야 합의로 해야지 패스트트랙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라는 원칙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민 의원은 이날도 "선거법을 패스트트랙, 다수의 횡포로 정하는 건 국회가 합의해 온 전통을 깨는 것이고, 이 전통을 깨면 앞으로도 계속 깨진다. 선거법을 다수가 마음대로 고치는 길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원칙을 훼손하는데 절대 반대한다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의당 같은 소수당이 과거 걸핏하면 다수의 횡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에 소수 의견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당이 이렇게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자고 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며 "정의당이 당리당략, 선거에서의 이익만 생각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바른미래당이 거기 놀아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 반대파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 "(반대파의) 목소리가 강하게는 말하지만, 엄연히 우리 당 의원은 29명이다. 각 개별적 의원들이 독립적으로 존중돼야 한다"고 말해 정면돌파 의지를 밝혔다. 민주당과의 서면 합의가 이뤄지면, 이날 시도했던 것처럼 표결을 통한 추인 절차를 밟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 원내대표와 민주당에 남겨진 시간은 현실적으로 4월 임시국회까지다. 공직선거법상 선거구 획정 시한인 '총선 1년 전'은 이미 지난 15일로 넘겼고, 과거 사례들처럼 총선 한두 달 전까지라도 선거법 개정안 및 선거구 획정안을 처리하려면 늦어도 5월 초에는 패스트트랙 지정이 완료돼야 한다. 최장 330일이 걸리는 패스트트랙 처리에서, 본회의 계류 기간 60일은 문희상 국회의장이 협조한다면 줄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한국당이 끝까지 반대하면 270일이 걸린다. 내년 2월 1일 기준 270일 전날은 바로 4월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5월 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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