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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들은 지금도 귀국 말라고 종용"

<김우중 포천 인터뷰 전문> 김우중 아직도 착각속 살아

대우그룹이 단일기업 부도액수로는 전세계 최고 규모인 6백50억달러의 부채를 남기고 파산하면서 3년반전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던 김우중은 한국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해외도피중인 김우중씨를 독점 인터뷰해 그의 흥망과 도피생활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포천> 기사**

대우그룹의 창업자이자 회장이었던 김우중씨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외진 시골집에서 헐렁한 면바지와 맨발차림의 허약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올해 66세인 김씨는 병을 앓으면서 허리가 4인치나 줄었으나 연신 말보로 라이트 담배를 피우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주저하는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세계경영을 외치던 대기업의 몰락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망명중인 최고경영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4차례에 걸쳐 만나면서 김씨는 대우의 몰락 뒤에 숨은 정치적 음모와 경영패착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치명적 오판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나의 최대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그랬다”면서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하려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검찰은 김씨에 대해 월드컴과 엔론을 능가하는 사상최대의 회계사기와 20억달러 횡령 혐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아직 제소되지는 않은 상태다.

호화사치를 혐오하는 한다는 김씨는 “그들은 나를 사기범으로 몰려는 것 같다”면서 “나는 부패에 대해 꿈도 꿔본 적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대우 장부에 대한 ‘회계분식’은 시인했다. 그는 회계분식은 당시 한국의 흔한 관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그룹 계열사간에 자산가격을 부풀려 이동시키는 수법 등이 포함된다.

김씨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20여명의 대우경영진과 회계사들이 2001년에 사기 혐의로 제소돼 지난 97~98년 3백억달러나 회사자산을 부풀린 죄로 6개월간 복역했다.(김씨 변호사에 따르면 정확한 액수는 1백20억달러라고 한다).

***"김대통령이 직접 전화 걸어 잠시 나가 있으라 했다"**

아마도 김씨로부터 나온 가장 놀라운 주장은 그가 한국을 떠난 이유가 ‘처벌을 피해서가 아니라 한국 정부의 고위 관료의 간청에 의했다’는 것이리라. 김대중 대통령과 핵심측근들이 99년 채무 구조조정 와중에 잠시 떠나 있으면 대우 파산에 따른 형사처벌을 면하게 해주고 다시 돌아와 자동차 회사를 경영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 직접 내게 전화를 걸어 잠시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김 대통령은 오는 2월25일 임기가 만료되는데 전 대우 회장의 이런 주장에 대해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김우중씨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끊임없는 성장이 애국적 책무’라는 당시의 경제논리를 구현한 인물이었다. 당장의 수익은 신경쓰지 않았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대우같은 대기업은 ‘대마불사’가 적용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김씨의 꿈과 이러한 논리가 사라졌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가 되겠다는 김씨의 거대한 구상을 밀어줬던 한국 정부는 자금지원을 차단한 것이다.

***정부가 규칙을 바꾼 게 아니라 게임 자체가 변했다**

김씨는 “정부가 모든 규칙을 바꿔버렸다”고 말한다. 사실 변한 것은 게임 자체였다. 김씨의 급속팽창을 지원했던 시스템은 붕괴했다.

김우중씨가 추구했던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전략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대우는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과 상대적으로 경쟁자가 적은 신흥시장에 진출하려고 했다. 김씨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란, 베트남, 인도 등지에 해외자동차공장을 10여개 설립했다. 투자위험을 줄이기 위한 협상도 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경우 6억5천만 달러짜리 자동차 벤처설립 비용 절반을 제공하고 러시아 시장에 진출하도록 도와줄 것을 합의했다.

김씨는 자동차 2백만대 생산을 목표로 2000년이면 그중 절반은 한국 밖에서 생산할 계획이었다. 99년에 이미 그는 1백60만대 생산에 육박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경쟁자들은 김씨의 전략을 무모한 팽창이라고 비난했다. 제너럴 모터스의 루 휴즈 국제영업부문 사장의 경우 96년 김씨의 협상노력이 활발할 때 “대우는 매우 파괴적인 세력으로 시장 창출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팽창전략을 위해 2백억 달러의 자금을 끌어다 썼다. 그는 “통상 10~15년 걸리는 일을 5년안에 하려고 했다”면서 “그게 내 실수였다. 규모의 경제를 위해서 시장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부터 했고 그래서 차를 팔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GM에 70억~1백억 달러를 받고 자동차 회사를 최소 절반 정도 팔수 있을 것이라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가격에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대우 자동차의 회계장부에 숨겨진 부실규모에 대한 평가차이가 너무 컸다는 점이 주요 원인”이라고 말한다.(지난해초 우여곡절 끝에 GM은 대우자동차 자산 일부를 4억 달러에 사들였다).

***두 김씨의 밀월**

대우가 비틀거리자 김씨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기대했다. 한국의 다른 재벌 회장과 마찬가지로 그는 한국의 정치 시스템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3천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96년 그를 비롯한 재벌 총수들은 법원으로부터 기업을 위한 행위로 처벌될 수는 없다며 집행유예를 받았다.

김씨는 김대중씨를 위해 대선 지원도 했다. 두 김씨는 긴밀한 관계를 즐겼다. 김씨는 국민의 정부 초기 김 대통령에게 5백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해 경제위기를 벗어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수출 잠재력을 훨씬 적게 보고한 김 대통령의 참모들은 이에 분노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대우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정부지원을 원했다”면서 “그러나 국제무역협정에 따라 수출을 위한 특혜조치를 해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계획이 대우만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정부 관료들과 김씨의 충돌은 김 대통령이 주재하는 월례 회의에서 고함이 오가는 상황으로 악화됐다. 하루종일 진행됐던 이런 회의에서 김씨는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며 관료들을 공격했다. 김씨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면서 “기업들이 과도한 대출을 했다고 비난만 했는데, 당시는 금융위기지 산업위기가 아니었다. 이런 긴급상황에서 우리는 단기간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정부 입장이 더욱 곤혼스럽게도 대우는 부채를 줄이고 자산을 매각하고 서구기준에 맞는 회계를 하라는 지시에 저항했다. 김씨는 “대부분의 자산이 한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산을 팔 수 없었다”면서 “우리의 계획은 중단하기에 너무 멀리 진행됐지만 수익은 없어서 자동적으로 부채가 늘어났다”고 말한다.

***관료들이 추가대출 차단**

98년 11월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비행기를 타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씨는 김 대통령을 만나러 병원을 나선 한달 후 하노이로 갔다. 대우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김씨는 약속한 자금 대출을 간청했으나 관료들은 이를 막았다.

김씨는 대우에 대한 압박이 가해지자 “내가 사라지면 대우는 괜찮을 것”이라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김씨의 변호사 석진강씨에 따르면 김씨는 99년 7월 자살을 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이를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대우에 대해 매우 낙담했다”고만 말했다.

대우의 국제 채권단을 대표했던 제프리 존스는 “김우중씨는 비전을 가진 훌륭한 세일즈맨이었으나 재무관리 능력은 부족했다”면서 “대우의 사기극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99년 10월 중국에 세운 3개의 자동차 부품공장 개소식에 참석한 김씨는 대우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과 위암 수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 그는 신문도 보지 않고 심지어 부인과도 대화를 끊는 등 1년간 모든 접촉을 끊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2000년말 부인과 함께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2001년 상반기에는 수단 집권자 오마르 하산 아메드 알 바시르의 손님 자격으로 수단에 머물렀다. 최근 몇 개월간은 아시아와 유럽을 오갔다.

***"한국 정부관료들은 은밀히 지금도 귀국하지 말라고 종용"**

한국의 법에 따르면 김씨는 귀국하지 않는 한 기소될 수 없다. 그는 “정부 관료들은 지금도 은밀히 귀국하지 말라고 종용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한국 정부는 인터폴에 김씨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난 누구도 그를 열심히 찾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인터폴은 2001년 4월 언론에 보도된 체포영장을 거론했지만 인터폴 웹사이트를 한 번 보라는 이상의 언급은 거절하고 있다. 웹사이트에는 그를 수배한다는 내용은 없다.

그는 한국 여권으로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다. 파리, 카툼, 방콕 등지에서 만난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그를 ‘김회장’으로 부른다. 중국과 베트남은 김씨를 정부의 귀빈 대정을 한다. 김씨는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울화가 치밀어 바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서전을 쓰고 있으며 처음으로 골프도 치고 있다. 그는 프랑스 엔지니어링 회사의 고문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김우중씨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아직 논란이 분분하다. 2001년 회계장부에는 없는 BFC(런던 은행 계좌 관리회사)가 발견되자 한국의 채권단들은 김씨가 2백억 달러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의 감사 보고서는 BFC의 해외계좌는 국제대출 처리와 합법적인 투자를 위해 활용되었으며 횡령 증거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2001년 회계사기로 대우 경영진들을 제소한 재판부는 김씨를 분식회계, 재산은닉,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장해창 판사는 판결문에서 “이번 사건은 김우중씨와 측근들이 관행이라는 구실로 저지른 경제범죄 사건”이라면서 “그들의 과실은 한국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김우중,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어**

김우중씨가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바라는 것은 공식적인 면죄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서 재판부터 받아야 할 것이다.김 대통령은 대우그룹의 전 회장을 사면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측근과 두 아들을 포함한 일련의 정권비리에 의해 정치적 영향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재벌개혁을 강화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은전을 베풀 처지가 더욱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씨는 “길어야 5년안에 사람들은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면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도 김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가 번영했던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체제는 사라졌다. 그런데도 구체제가 운이 다했는 것을 결코 충분히 깨닫지 못했던 김씨는 한국의 새 규칙에 적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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