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는 정상회담에 앞서 가진 공개적인 모두 발언에서 한국이 미국의 군사 장비를 많이 구매하고 있고, 추가적으로도 구매를 결정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미국은 미국의 장비를 구매하는 나라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해, 문 대통령에게 간접적이지만 강력하게 추가적인 무기 구매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는 트럼프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노딜'을 선택한 이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의 트럼프의 접근법의 이면에는 한국을 겨냥한 금전적 이익의 극대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노이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동맹 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트럼프는 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산 군사 장비의 구매 필요성을 연이어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견인해야 하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아마도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내년 대선 이전에 무기 수출 및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극대화해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다.
무기 판매는 서두르고 대북 협상은 느긋하게
이에 반해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느긋한 태도를 견지했다. 트럼프는 3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열릴 수 있다"면서도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두르면 적절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가 말한 단계는 북미 간의 실무회담 및 고위급 회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 간에는 이렇다 할 접촉이 없는 상태이다. 또한 이전에는 북미 정상회담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단계를 밟아갔었다. 반면 이번에는 실무적 단계를 거친 이후에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트럼프는 개성공단 재개와 관련해서도 "적절한 시점에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라면서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북 제재를 완화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우리는 제재를 유지하길 원한다"고 답했다. 다만 추가 제재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 '스몰딜'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지금은 빅딜을 말하고 있다. 빅딜은 우리가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여러 가지 스몰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빅딜'을 전제로 한 것이다.
불투명해진 남북 정상회담
한편 문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한미공조 균열론을 불식시키려는 데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의 최종적인 상태, 그 비핵화의 목표에 대해 완벽하게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다음에 또 빛 샐 틈 없는 그런 공조로 완전히 문제가 끝날 때까지 공조해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약속드리겠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고, 이에 트럼프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또는 남북접촉을 통해 한국이 파악하는 북한의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은 오히려 불투명해진 것 같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개성공단 재개와 같은 남북경협에 대해 현 시기에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 밝힌 입장과 충돌한다. 이에 따라 김정은이 남북 정상회담에 임할 동기는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비핵화의 최종적인 상태와 그 목표"에 대해 미국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고 한미공조의 완벽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미국이 정의한 비핵화, 즉 핵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도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강도적 요구"라며 거부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또한 미국을 견인하는 한미공조가 아니라 미국에 끌려가는 한미공조에도 불만의 뜻을 나타낸 바 있다. 안타깝게도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선 이를 불식시킬 수 있는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말이다.
인도적 지원과 트럼프식 '빅딜론'
그러나 절망을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가 밝힌 두 가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도적 지원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우리는 인도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고, 솔직히 말해 나는 좋다"고 본다며, "당신들도 이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이 식량을 비롯해 다양한 지원을 하려고 한다"고도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적극적인 인도적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 제재에 악천후까지 겹쳐 북한의 식량 및 의료·보건 상의 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경고는 국제기구로부터 꾸준히 나오고 있다. 북한도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미국을 의식해 이렇다 할 지원에 나서지 못해왔다. 그런데 트럼프가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어진 것이다.
또 하나는 트럼프가 '빅딜'을 명쾌하게 언급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김정은에게 들이민 문서는 핵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 요구까지 담긴 것이어서 결렬의 중대한 원인이 된 바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번에 "빅딜은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비핵화에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존 볼턴 안보보좌관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트럼프가 이걸 인지하고 한 발언인지, 또한 과유불급의 욕심을 접고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고 정책결정자의 발언인 만큼, 문재인 정부는 이를 기회로 포착할 필요가 있다. 비핵화에 이것저것 섞지 않고 핵 폐기에 집중한다면 '빅딜'다운 타결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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