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때문에 생기는 피부병**
일전에 재미있는 임상 양상을 보이는 여자 환자 한 분을 진료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느냐'는 저의 첫 질문에 대답은 않고 여자 피부과 전문의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남자 의사에게 보이기 힘든 신체 부분에 피부 질환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어디가 불편한 지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저희 병원의 홍일점 여의사는 수술중이어서 1시간 이상 기다려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제가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은 후 환자분은 다리가 몹시 가렵다면서 긴 치마를 올려 정강이 부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도 이 분은 진찰을 받을 준비는 제대로 하고 내원하셔서 스타킹을 벗거나 꽉 쪼이는 바지를 벗어야 하는, 서로에게 민망한 장면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피부 병변은 심하게 각질이 일어나 있고, 표면은 마치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흔히 볼 수 있는 건성 습진의 전형적 양상이었습니다.
<사진1>
피부과에 와서 정강이 부분을 의사에게 보여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건성 습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한 다음, 바르는 약을 처방하면서 건성 습진의 예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왜 여자 의사를 찾았는 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환자는 얼굴이 약간 붉어지면서 정강이 부분말고도 신체의 다른 부분에도 이상한 증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옛날 의과대학생 시절에 일반외과 실습을 돌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턴이 맹장염(정식 의학 명칭은 급성 충수돌기염입니다)으로 의심돼 입원한 환자의 진료 기록을 작성하면서, 배가 아픈 것이 문제이므로 배 부분의 증상만 열심히 살펴 기록을 남긴 뒤, 나머지 신체 부분은 ‘정상 범위(within normal limit:WNL)'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주치의 회진때 일입니다. 침대 시트를 걷어내고 환자의 전신을 진찰할 때 보니, 예전에 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분이었습니다. 결코 '정상 범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뒤 그 인턴이 어떤 일을 당했을 지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학창 시절의 그 기억을 떠올리며, 정강이가 아닌 다른 부위에도 피부 증상이 있다면 저의 ‘건성 습진’ 진단은 오진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위가 어느 부분인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자분은 한사코 보여주기를 거부하다가 약간은 강압적인 저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엉덩이 부분을 보여주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엉덩이 부분의 피부 소견도 정강이 부분과 동일했습니다. 전형적인 건성 습진과 차이점이 있었다면, 피부 병변의 색깔이 다리 부분보다는 좀 더 붉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왜 건성습진이 잘 생기지 않는 부분인 엉덩이에 이런 증상이 생겼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료 순서에는 어긋나지만 다시 한번 환자와 문진(history taking)을 하면서 비로소 이 질환의 원인이 승용차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너 드라이버인 이 여성은 운전을 하는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바꾼 새 중형차에는 좌석 가열장치가 장착돼 있었던 것입니다. 쌀쌀한 날씨에 자동차 히터와 좌석에 부착된 가열 장치를 동시에 사용한 결과 스커트 아래로 노출된 다리 부분에는 전형적인 건성습진이 생겼고, 엉덩이 부분은 시트의 가열장치로부터 직접적으로 열을 받아 건성습진과 열성홍반이 동시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열성홍반(erythema ab igne)은 검붉은 색소 침착을 특징으로 하는 피부 질환입니다. 병명만 들으면 생소하겠지만 실제로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피부 질환으로 겨울철에 치마를 입는 여성에서 흔히 생기는 피부 질환이지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노출된 피부 가까이에 전열기를 두게 되면 생기는 피부 질환으로, 영어로는 toated skin syndrome 이라고 합니다. 글자 그대로 피부를 전기 토스트기로 구워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사진 2>
이 질환은 화상을 입힐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피부에 열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정도의 고열을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피부에 노출시키면 생기는데, 그물 모양의 붉은 홍반과 갈색의 색소 침착이 생기는 게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피부에 열이 직접 작용해 혈관이 늘어나고 늘어난 혈관속에 피가 잘 흐르지 않고 고이기 때문에 그물 모양의 붉은 발적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그 부위에 갈색의 색소 침착이 생깁니다. 대개는 피부에 직접 열을 가하는 행위를 중단하면 서서히 증세가 좋아지지만, 갈색의 색소 침착은 영구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직 검사를 해보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피부에서 보이는 진피 변화를 그대로 볼 수 있는데, 콜라겐 섬유는 감소하고 변형된 에라스틴 섬유만 증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열성 탄력섬유화(thermal elastosis)’라고 합니다.
열성홍반은 치마를 즐겨입는 젊은 여성의 다리에서 흔히 생기는데, 전열기나 라디에이터 등에서 발산되는 열이 다리 피부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여성환자의 경우는 좌석 가열장치로 인해 직접 엉덩이 피부에 열을 받아 열성홍반이 생긴 것입니다.
열성홍반을 치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방이 제일 중요하고 직접 피부에 열이 닿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치료는 홍반만 생긴 초기에는 보습제를 충분하게 사용하며 열이 직접 피부에 닿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고, 필요하면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색소 침착이 남았을 때에는 일반적인 색소 침착 치료에 준해 미백 연고와 피부 재생 연고를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치료에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예방에 신경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론 그 여자 환자분은 건성습진과 열성홍반 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되었고, 아마 지금은 좌석의 가열 장치는 사용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도 사용하기에 따라 이렇게 멀쩡한 피부에 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처럼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생기고 싶어도 생길 수 없는 피부 질환이지만 말입니다.
편리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올 겨울에는 조금 춥더라도 난방 사용을 절제하여 실내 온도를 조금 낮게 유지하면서, 내복을 입어 피부도 보호하고 에너지도 아끼는 지혜를 발휘해 봄이 어떨까요?
계미년(癸未年) 새해에 프레시안 독자분 모두의 가정에 행복과 건강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