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한 모임에 참석했다. 김대중 정부의 지난 5년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집권할 노무현 새 정부의 과제에 대한 좌담을 위한 전문가들의 예비 모임이었다. 이날 여러 얘기가 오갔고, 다음과 같은 DJ와 노 당선자의 집권초기 상황에 대한 비교분석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요지인즉 DJ의 집권당시에 비해 노 당선자는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크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미국과의 관계'다.
두번째는, '재계와의 관계'다.
세번째는, '야당과의 관계'다.
***첫번째, 미국과의 관계**
하나씩 살펴보자.
첫번째 '미국과의 관계' 측면에서 비교해보면, DJ는 집권후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DJ집권 당시는 IMF사태가 터진 직후의 공황기였다. 따라서 DJ로서는 IMF의 경제신탁통치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IMF의 최대주주인 미국과의 충돌이란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후 DJ를 전폭지지했고, 지금도 'DJ노믹스'에 대한 미국의 호의적 평가는 변함없다.
반면에 노무현 당선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 당선자 앞에 출현한 최대 난제는 북핵위기다. 미국은 현재까지 북핵위기와 관련, 일방주의 외교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미국의 극우세력은 '전쟁 불사론'까지 주장하고 있다. 노 당선자는 이에 대해 한반도 7천만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방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반드시 한국의 사전동의아래 추진돼야 한다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DJ에게는 더없는 우군이었던 미국이 노 당선자에게는 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두번째, 재계와의 관계**
두번째 '재계와의 관계'도 크게 다르다.
DJ는 집권후 '재벌개혁'을 거침없이 공언했다. "IMF사태의 주범중 하나가 재벌"이라는 당시의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대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재벌은 힘없이 고개 숙였고, 그로부터 상당 기간동안 공개적 저항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노 당선자가 처한 상황은 다르다. 최근 전경련 김석중 상무의 "사회주의" 발언 파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재계는 자못 고개를 곧추세우고 냉랭한 시선으로 노 당선자 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계의 이같은 자신감의 저변에는 적극적 시설투자 등 재계의 협조없이는 작금의 불황위기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는 듯 싶다.
DJ에게는 고개 숙였던 재계가 노 당선자에게는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세번째, 야당과의 관계**
세번째 '야당과의 관계'도 DJ 당시와 크게 다르다.
DJ집권직후 상당 기간 한나라당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당시에도 한나라당은 JP총리 인준에 반대하는 등 안티를 걸기는 했다. 그러나 DJ가 추진한 대다수 정책에 대해선 큰 저항없이 없이 추인했다. "한나라당 역시 IMF사태의 주범"이라는 호된 비난 여론 때문이었다. 이같은 여야간 역학관계는 옷로비 사건을 계기로 여론이 DJ에게 등을 돌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노 당선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두번의 잇따른 대선 패배로 이회창 후보가 정계은퇴하면서 아노미(무정부) 상태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나라당은 거침없이 대여공세를 펴고 있다. 대여공세로 당내분란을 희석시키려는 전술적 측면도 존재하나, 내각제 개헌 등을 제기하는 한나라당 주류 일각에서는 심지어 "6개월후 정국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분위기는 간단치 않다. 노 당선자가 북핵위기를 제대로 풀지 못해 외교,경제,정치적 혼란을 맞을 경우 '대반전'의 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원칙이 흔들려선 안돼"**
이처럼 노무현 당선자가 처한 상황은 DJ 집권초기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간단치 않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출범한 이래 지난 2주동안 여러 갈등상황이 야기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한 마디로 말해 노 당선자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세력들이 만만치 않게 많다는 얘기다.
과연 어떻게 이같은 첩첩난관을 돌파할 것인가.
이와 관련, 과거 한 정권의 집권초기에 청와대 재직경험이 있는 한 정계의 거물은 노 당선자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이럴 때일수록 노 당선자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 원칙이 흔들려선 안된다. 한번 원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제2, 제3의 공세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다. 비록 의회가 여소야대라 할지라도 대통령제하에서는 대통령이 절대적이다. 여소야대의 한계나 재계의 저항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자리다. 눈앞의 저항에 흔들리지 말고 원칙을 관철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보일 필요가 있다.
단하나, 북핵위기로 갈등을 보이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확실하게 풀 필요가 있다. 여기서 꼬이면 경제, 정치 등 나머지 모든 게 꼬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관계만 잘 풀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려갈 것이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그는 또 노 당선자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이들은 '변화를 바라는 국민'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뭔가 바뀌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의 믿음을 배신해선 안된다.
위정자들이 집권 초기에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고정표'로 홀대하고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진 이들을 겨냥한 정책을 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순서가 뒤바뀐 접근방식이다. 우선 자신을 지지한 이들의 믿음에 부응하는 정책을 펴면서, 반대쪽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게 올바른 순서다.
이렇게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면서 집권 6개월내에 헤게모니를 확고히 쥐겠다는 자세로 일을 추진해야 국민이 바라는 개혁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한마디로,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이라는 '무서운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긴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때에만 노 당선자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겹겹의 장애를 돌파할 수 있으리라는 지적이었다.
아무리 미국, 재계, 야당이 펴는 공세의 칼날이 시퍼렇다라도 '변화를 바라는 국민'을 믿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개혁 대로행(大路行)'을 해나가야 한다는 조언을 노 당선자를 비롯한 새 정권 참가자들이 경청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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