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당선자와 인수위에 대해 김석중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가 “그들의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했다는 뉴욕타임스(NYT) 기사가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수위의 진상규명 요구와 김상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논란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돈 커크 기자가 쓴 문제의 기사 전체가 인수위와 재벌이 ‘좌파와 우파의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논조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NYT의 국제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설혹 정정기사가 나온다고 해도 이미 한국의 재계가 ‘노무현 정권은 좌파 사회주의’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기정사실화된 셈이다.
***재계의 '의도적 딴지걸기'?**
인수위측에서도 김석중 상무의 발언 파문을 계기로 재계와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지난 4일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노 당선자 쪽의 재벌정책에 반대의사를 밝혔을 때만 해도 인수위는 대응을 자제했었다. 도리어 노무현 당선자는 "특정재벌에 대한 특정적 조치는 없을 것"이라며 "개혁은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재계의 불안감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이번의 반응은 다르다. 김상무에 대한 인사조치까지 요구할 정도로 강경하다. 인수위가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것은, 대선을 전후해 전경련이 보여온 일련의 행태로 판단할 때 이번 사건이 인수위가 추진하는 재벌개혁정책에 정면 도전하는 의도적 발언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수위가 이같은 판단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재벌들의 이익단체인 전경련은 대선 기간동안에 노골적으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해왔다. 대선직전에는 사실상 전경련이 운영하고 있는 <에머지>라는 잡지를 통해 언론매체로는 유일하게 이회창 공개지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또한 전경련의 손병두 수석부회장은 지난 4일 "한국에 재벌은 없다"며 인수위의 재벌개혁을 전면공박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 '전경련의 입' 역할을 해온 김석중 상무의 발언이 터져나온 것이다.
정순균 인수위 대변인은 “〈뉴욕타임스〉에 인용된 발언의 문맥을 살펴보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어, 특정 부분을 말 실수라고 보기 힘들다”며 “이런 내용이 함부로 인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정 대변인은 “김 상무가 전경련의 이론가로 알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그의 말은 전경련의 입장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당선자는 특히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정체성 시비로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인식에서 특유의 정면돌파 방식을 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노 당선자가 12일 새 정부의 총리에 기존의 ‘안정감 있는 인사’ 대신에 ‘개혁성 있는 인물’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평행선 긋는 노사관계가 갈등의 핵**
그렇다면 김각중 상무의 발언 등 전경련의 잇따른 '안티' 발언은 어떤 맥락에서 터져나온 것으로 보아야 하나.
한 대그룹 구조본의 고위관계자는 13일 이와 관련,“현재 대기업과 인수위는 특히 '노사관계'에서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면서 “전경련쪽에서 잇따라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같은 대립에 따른 위기의식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재벌그룹 관계자들은 최근 인수위의 경제 1.2분과 및 사회.문화.여성분과와 일련의 접촉을 가졌다. 이는 노무현 당선자가 인수위에 대해 반대진영 사람들과도 만나 의견을 들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대기업들도 인수위의 정확한 기류를 읽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관계자는 "접촉결과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1.2분과와는 상당한 정도의 상호이해가 이뤄졌다"며 "시장경제의 발달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제도들을 도입하되 구체적 시행시기 등은 재계에 준비할 시간을 주는 점진적 형태로 이뤄질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노사문제'에 대해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노사문제를 담당하는 사회.문화.여성분과와는 한치의 의견접근도 없는 평행선을 그었다"며 "재계의 최대 현안인 노사문제에서 이같은 시각 차가 계속되는 한 전경련 김 상무의 발언과 같은 재계와 인수위간의 신경전은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전경련, 대한상의 통폐합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와**
전경련은 김석중 상무의 발언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자 13일중 대통령 인수위측에 김각중 회장 명의로 공식 사과하기로 하고, 손병두 부회장 주재로 임원 본부장 회의를 열어 김 상무에 대한 인사조치 등 추가 대응책을 마련하기로 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재계에서는 김상무의 해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아울러 가뜩이나 대선 과정의 노골적 '반노(反盧)전선' 표방으로 시쳇말로 '가뜩이나 찍힌' 전경련의 위상이 급속히 낮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는 "재벌은 없다"는 발언으로 재계와 인수위간 불편한 관계를 촉발시킨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에 대한 성토가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권출범기라는 예민한 시점에 언론매체를 통한 새 정부 공개비판은 적절치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이러다 보니 전경련 회장직을 맡으려는 이들도 찾기 힘들어졌다. 내달 6일 예정된 전경련 신임회장 선출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사의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 아예 20일 미국으로 출국하기로 일정을 잡는 등 재벌그룹 ‘빅3’ 모두 차기 회장 추대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차제에 전경련과 대한상의 등 우후죽순격으로 존재하는 유사 경제단체들을 통폐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재벌들의 이익단체인 전경련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 재벌시스템이 존재하는 극소수 국가에만 존재하는 특수단체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은 별로 하는 일도 다르지 않은 두 단체에 이중으로 운영비를 내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전경련 또한 지난해 대한상의를 전경련으로 피합병시키려는 시도를 해 두 단체간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국 특유의 재벌시스템에 근거해 재벌들의 이익단체 역할을 해온 전경련의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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