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가 지난 9일 노무현 당선자측에 흔들림없는 재벌개혁을 촉구하는 긴급성명을 발표했었다. 이유는 재계와 메이저 언론의 '재벌개혁 망국론'이 자칫 재벌개혁의 후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참여연대는 이날 성명에서 "개혁대상으로서의 재벌이 없어졌다고 재계가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반문하며 "재벌은 있다"고 반박했다.
참여연대는 최근 드러난 재벌의 대표적 폐해로 "두산그룹의 해외발행을 가장한 특혜성 BW의 국내발행 및 그룹4세에 대한 재산·경영권 승계 의혹, SK그룹의 SK증권 주식 이면거래 사건, 현대자동차그룹의 족벌체제 강화, 동부그룹의 계열금융기관 자금을 동원한 아남반도체 인수 및 동부전자에 대한 순환출자, 삼성생명의 부당계약전환 등의 불법행위와 이를 무마하기 위한 금감원 로비의혹 등"을 꼽았다.
이날 성명을 낸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김상조 소장(한성대 경상학과 교수)과 인터뷰를 가졌다. 김 소장은 국내 재벌들의 경계대상 1호다. 앞의 성명에서 언급됐던 두산, SK,현대자동차, 동부그룹, 삼성생명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예외없이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의 워치대상이자 소송대상이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참여연대 기피현상이 얼마나 심한가는, 국내굴지 S그룹의 경우 직원들이 사내 인터넷망을 이용해 참여연대 홈페이지로 접속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는 한 가지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던 차에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당선자가 되자 참여연대를 향한 재계의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다. 참여연대 회원들 가운데 대통령직인수위 경제팀에 참여하거나 조언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참여연대에서 재벌개혁 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김상조 소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재계의 관심은 더한층 높아졌다. 여러 형태로 인수위에 조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IMF사태후 더 커진 재벌의 제2금융권 장악도**
김상조 소장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재벌개혁 현안 가운데 '제2금융권 개혁'의 시급성과 방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견을 물었다. DJ집권기에 보험, 투신, 증권, 카드 등 제2금융권에서의 재벌 금융계열사의 시장점유율이 가공스런 속도로 높아지면서 재벌의 사금고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 소장도 지난해 11월 한국금융학회와 예금보험공사가 주관한 심포지움에서 <비은행 금융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과제와 대안>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재벌의 사금고화를 막기 위한 개혁 방향을 집중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A4 26쪽 분량의 이 발표문은 현재 인수위가 마련중인 금융개혁안에도 주요 참조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소장은 "IMF사태후 제1금융권 즉 은행부문에서는 많은 개혁과 진전이 이뤄졌으나, 제2금융권 즉 보험.증권.투신.카드 등에서는 도리어 재벌의 지배력이 강화되는 퇴행 현상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2002년 4월말 현재 10대 재벌소속 금융계열사의 평균적인 소유구조를 보면, 총수 등 동일인 지분은 1.27%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45.70%에 달하는 계열사를 통해 내부지분율이 50.43%에 달하고 있다. 이는 비금융계열사의 평균 내부지분율 44.94%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특히 문제가 심각한 곳은 은행산업 못지않게 덩치가 커진 생명보험사, 투신운용사에서의 시장지배력 급증이다.
"IMF사태가 터진 해인 97년도의 삼성,교보,대한생명 등 3대 생명사의 시장점유율은 67.2%였다. 그러나 2001년도 점유율은 77.9%로 크게 높아졌다. 특히 삼성생명의 경우 32.9%에서 39.7%로 급증해 전체시장의 4할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생명과 삼성투신의 내부자거래**
이처럼 재벌의 생보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생보 자산을 운용하는 재벌계열 투신운용사의 시장점유율도 비례해 급증했다.
"산업자본 계열 11개사의 시장점유율이 2002년 10월말 현재 45.58%로서 1999년 3월말에 비해 10.48%포인트나 급증했다. 특히 삼성투신(3.64%포인트)과 제일투신(3.73%포인트)의 점유율이 크게 증가해, 그 결과 삼성투신의 시장점유율은 13.31%에 달해 한투.대투.현투 등 기존 3대 투신사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김 소장은 이같은 "삼성투신의 약진은 뒤에 삼성생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삼성생명이 자산운용을 삼성투신에 맡기는 '금융 불공정 내부자거래행위'를 함으로써 삼성투신의 약진이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요컨대 현재 30여개에 달하는 투신사들의 운용실적에 따라 삼성생명 자산 운용을 맡기는 게 아니라, 단지 삼성그룹 계열사라는 이유로 삼성투신에 독점적으로 자산 운용을 맡김으로써 삼성투신의 약진이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김 소장은 "공정거래위원회가 그동안 산업계에서의 불공정행위 감시에 중점을 두었지 금융계에서의 불공정행위에 대해선 소홀히 한 점이 없지 않다"며 "앞으로 참여연대는 삼성생명과 삼성투신간 금융불공정거래 문제를 중점적으로 워치(Watch)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금융계열사 강제분리는 '최후의 수단'**
김 소장은 노당선자의 대통령공약중 하나로 재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는 '재벌 금융계열사 강제분리제' 도입과 관련, 김 소장은 "제도는 도입하되 이 제도만 도입되면 모든 일이 풀린다는 식의 접근은 절대금물"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재벌 금융계열사에 대한 강제분리 명령은 최후의 수단이다. 너무나 무서운 칼이기 때문이다. 10년에 한번 사용할까 말까 한 마지막 칼이다."
실제로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도 1929년 대공황후 은행-보험-증권간 겸업화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해 J.P.모건을 강제분리시킨 일이나, 80년대 AT&T의 통신시장 독점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해 7개 회사로 분리시킨 예 등 몇몇 예를 제외하곤 이 제도가 작동된 바 없다.
또한 강제분리 명령은 법이 만들어진다 할지라도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지는 만큼 대법원 판사들까지 계열 강제분리에 동의하지 않는 한 실제로 집행되기 쉽지 않은 측면이 강하다.
김 소장은 이에 따라 금융계열 강제분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대신, "최근 제2금융권의 재벌 사금고화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상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벌총수 등 '사실상 지배자'에게도 책임 물어야**
김 소장이 주장하는 '상시적 접근'이란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엄정한 제도의 집행을 가리킨다.
김 소장은 우선적으로 도입해야 할 새 제도로, 집중투표제 의무화, 전자서면투표제 도입 등 주주총회 활성화를 위한 조치, 회계감독 및 공시제도 개선 등 경영투명성 제고를 위한 조치, 집단소송제 도입 등 사법적 피해구제 수단의 개선 등을 꼽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새 제도의 도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엄정한 '제도의 집행'이라는 게 김 소장의 주장이다.
김 소장은 대표적 예로 재벌의 사금고인 동시에 '사실상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생보사 및 이들 생보사의 '사실상 지배자'인 재벌총수에 대한 감독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요컨대 부실이 발생했을 때 재벌 총수들에게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은 금융지주회사로 인가받은 자에 대해서만 감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독일의 경우처럼 '금융기업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 역시 금융지주회사로 간주해 보다 강화된 기준에 의해 신임의무를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삼성생명의 최대주주인 에버랜드와 그 지배주주인 이건희 회장은 사실상의 금융지주회사다. 그러나 삼성생명은 비상장라는 이유로 외부이사가 존재하지 않아 사실상 감독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서도 이들이 사실상의 금융지주회사라는 측면에서 삼성생명의 경영에 대해 신임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감독기관과 사법기관의 적극적 자세가 요구된다."
***삼성이 문제**
김 소장도 인수위의 생각처럼 "특정기업을 대상으로 한 재벌개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재벌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면 삼성그룹이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삼성생명의 경우 시장지배력 증가 및 부당내부거래 혐의외에도 삼성차 부실 문제, 상장 문제, 부당 계약전환 및 개인신용정보 도용 문제 등 각종 현안이 걸려있어 어떤 형태로든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특히 지난 99년 중반이래 여지껏 차일피일 시간만 끌고 있는 삼성차 부실 처리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 하나, 채권단의 미온적 태도로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채권단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재벌개혁은 대단히 지난한 과제다. 그렇지만 한국경제 전체는 물론 재벌 자신을 위해서도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다. 과연 새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잘 처리해 나갈지,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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