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나라에는 재벌이 없다."
손병두 전경련 수석부회장이 지난주말 한 말이다. 노무현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 경제팀에서 흘러나오는 일련의 재벌관련 정책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과정에 쓴 표현이다.
손 부회장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난 5년간 엄청나게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재벌은 없다. 재벌이란 용어도 없어져야 한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기업을 비하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사외이사제도 도입, 사외감사제도 확대, 소액 주주권한 강화에서 이제는 글로벌 스탠드에 부합한 경영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제는 대기업이다 재벌이다 구분하는 것보다는 규제완화를 통해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점진적,자율적,장기적 개혁을 하겠다"**
손 부회장의 이같은 발언을 신호탄으로 메이저 신문 등은 경제팀의 '재벌개혁 정책'을 비판하는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7일자 "인수위, 대기업 정책 신중해야'같은 사설이나 3면의 '삼성이 재벌개혁 타깃인가' 같은 기사 등이 대표적 예다. 다른 언론들도 이 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쏟기란 마찬가지였다. 8일 중앙일보는 김상택 화백의 만평을 통해 대우, 동아, 쌍용그룹을 'DJ에게 죽은 문어들'로 묘사하며 노당선자의 '재벌 손본다'는 신문을 접한 뒤 골머리를 앓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듯 재계와 언론의 대응이 예민하자, 노무현 당선자는 8일 자신의 대변인 이낙연과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을 통해 잇따라 "특정재벌이나 기업을 표적으로 삼지 않으며 충분한 의견수렴 및 입법절차를 거쳐 점진적,자율적,장기적인 개혁을 추진한다"는 경제개혁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7일 오후 인수위도 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경제관련 아젠다를 ▲경제시스템 개혁 ▲기업하기 좋은 나라(규제개혁 등) ▲금융개혁 ▲세제개혁으로 제시했다. 그 어디에도 재벌이란 표현은 없다.
당초 인수위가 마련한 10대 아젠다에는 '재벌개혁'이 별도항목으로 잡혀있었다. 그러나 7일 확정된 10대 국정과제에서는 이 항목이 빠지고, '재벌'이란 표현도 사라졌다. 게다가 재계의 민원인 '기업하기 좋은 나라(규제개혁 등)'란 구체적 추진과제가 삽입됨으로써 외형상으론 균형을 맞추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그룹들은 노 당선자 및 인수위의 이같은 입장표명이 단지 '속도조절'일뿐 본질적 변화는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조금 더 지켜보자"는 식의 긴장된 반응이다. 한때 재벌개혁의 주 타깃으로 거명됐던 삼성그룹은 8일 '자발적 개혁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참여연대의 인수위 비판**
이같은 재벌개혁 논란이 증폭된 데에는 언론의 과잉보도 못지 않게 인수위 자체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인수위원들의 경우 "언론의'침소봉대' '거두절미' 보도가 많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나, 인수위원이 '공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참여연대는 지난 6일 성명을 통해 '구조본 해체 파문' 등을 야기한 인수위 경제팀의 최근 행보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구조본이 과거 비서실과 같이 재벌총수의 전횡과 선단 문어발경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서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분명한 것은, 위법행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아닌 한, 정부에게는 개별 기업의 내부조직을 해체하라고 명령 또는 권유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설사 해체하라고 한다고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재벌총수가 모든 계열사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열사를 총괄하는 조직은, 그 명칭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속될 것이다.
참여연대는 구조본의 폐해에 대한 인수위의 문제의식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나, 그 해결책은 대증요법이 아닌 근본적 제도개선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참여연대가 지적했듯, 실제로 대다수 대기업들의 경우 현재 구조본을 이중구조로 운영하고 있다. 구조본 소속 임직원들의 숫자는 최소화하고, 실제로 구조본 업무를 하는 임원들은 계열사 소속으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이러다 보니 설령 구조본을 없앤다 할지라도 그 기능은 변함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게 대기업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요컨대 구조본 해체란 '상징성'은 클지 몰라도 '실효'는 거의 없는 접근방식인 셈이다.
***'재벌개혁 망국론'**
하지만 이같은 인수위쪽의 미숙함 못지않게 최근의 재벌논란을 보면 재계와 언론의 '본질 흐리기'가 곳곳에서 목격된다.
본질 흐리기의 핵심은 "이제는 대기업이다 재벌이다 구분하는 것보다는 규제완화를 통해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손병두 부회장의 주장에서 읽을 수 있듯, '지금이 재벌개혁 운운할 때냐'는 주장이다.
요컨대 북핵위기, 이라크전 임박에 따른 유가 급등, 달러화 하락, 세계적 디플레이션 위기, 향후 선도산업 부재 등 안팎으로 경제위기 요인이 산적해 민관이 힘을 합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인 현 시점에서 재벌개혁 논란은 '제무덤 파기'라는 식의 주장이다. 이른바 '재벌개혁 망국론'이다.
이같은 주장은 일견 설득력을 갖는듯 보인다. 실제로 지금 우리경제를 둘러싼 안팎 상황은 실로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게 진정 올바른 위기 타개책인가이다.
***금융시장, "위기일수록 재벌개혁 해야"**
국내 30여개 투신운용사 가운데 빼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는 한 투신운용사 CEO는 8일 작금의 재벌개혁 논란과 관련,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재벌개혁과 관련, 요즘 대다수 언론들은 마치 큰 일이라도 터진 양 위기감 어린 보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재계는 모르나 금융시장의 반응은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쪽이다. 특히 작금의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재벌개혁은 해야 한다는 게 지배적 견해다.
한 예로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이나 사외이사 확충, 기업 제무재표 등에 대한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서명 의무화 등은 재벌이라는 오너십이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재벌의 과오.과잉투자를 막고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내부자거래를 막기 위해 반드시 도입해야 할 제도이다.
이런 제도가 도입된다면 재계 총수들은 울상을 지을지 몰라도, 금융시장은 대환영할 것이다. 특히 한국의 재벌시스템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는 외국투자가들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경제불안감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재벌 시스템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게 금융시장의 지배적 견해다."
***금융시장 경쟁질서를 파괴하는 '재벌 부당내부거래'**
그는 최근 재계의 강한 반발을 하고 있는 재벌 금융계열사 강제분리 제도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삼성생명을 어느 날 갑자기 삼성그룹으로부터 강제분리한다거나 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금융시장의 상황을 보면 더이상 재벌 금융계열사의 독주를 방관해선 안된다는 게 분명해진다.
한 예로 요즘 제2금융권에는 삼성,LG 등 몇몇 재벌사가 무서운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들어오고 있다. 한 예로 후발주자인 LG카드와 삼성카드는 그룹 계열사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지금에 와선 나란히 카드시장의 시장점유율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불과 2,3년만에 벌어진 사태다.
투신운용, 증권, 화재보험 등 다른 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막대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의 경우 마땅히 자산을 운용할 곳이 없자 자산 운용을 삼성투신에 맡기고 있다. 삼성투신은 그결과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운용수수료 수익을 챙기며,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삼성투신보다 운용실적이 좋은 다른 전업 투신운용사들은 아무 것도 못하고 시장을 빼앗길 뿐이다. 일종의 '금융 부당 내부자거래'이자 '불공정 게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금명간 2,3개 재벌의 시장점유율이 40~50%에 달할 것이다. 제1금융권의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의 시장점유율이 30%다. 국민은행은 이 정도 점유율만 갖고서도 은행권을 사실상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금명간 제2금융권은 재벌의 완전지배아래 들어가고, 그 결과 대형사고가 터질 위험성이 커진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제2금융권에 대한 재벌의 독점적 지배를 막기 위해 제도 마련이 대단히 시급하다 하겠다."
***대우 등을 쓰러트린 곳은 '시장'**
"외국계가 먹음직한 소 한마리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냐."
외국투자가들이 노무현 당선자에게 직.간접적 통로를 통해 강도높은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이유와 관련, 한 대기업 구조조정 고위관계자가 한 말이다. 그는 IMF사태후 단행한 일련의 재벌개혁의 최대 수혜자가 외국계였다고 주장하며, 노무현 당선자가 외국계 주문대로 재벌개혁을 하면 그 결과는 외국계들만 떼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같은 지적은 일면의 진실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체는 아니다. IMF사태를 겪으면서 엄청난 국부가 유출된 것은 사실이나, 이같은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우리나라 기업의 경제체질과 투명성이 획기적으로 제고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기업과 국가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중국의 가공스런 추적을 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최고 수준의 경쟁시스템, 투명시스템, 신뢰시스템, 공정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김상택 화백은 8일 만평에서 IMF사태후 도산한 대우,쌍용,동아그룹이 마치 DJ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철저한 왜곡이다. 수십조대원의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을 해온 이들 부실기업을 쓰러트린 곳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대기업들이 두려워 해야 하는 곳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시장이다. 재벌개혁으로 상징되는 경제시스템 개혁은 시장의 요구다. 대기업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시장의 요구에 따른 자기개혁을 단행, 앞으로 예견되는 험난한 경제환경속에서도 욱일승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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