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가능성, 북핵 위기와 함께 현행 '국제경제 3대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태'가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원유수출대국으로 통상 하루 3백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생산해 그중 2백40만 배럴을 수출했으나 최근 베네수엘라국영석유회사(PDVSA)의 파업으로 하루 20만 배럴에도 미치치 못하는 생산량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원유수출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는 국내에서 소비할 연료도 부족해 지난 28일 브라질로부터 52만5천배럴의 휘발유를 긴급수입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소요량에 불과한 것으로 야권에서는 "내전을 불사하려는 상황에서 브라질의 행위는 내정 간섭에 해당한다"며 강력하게 항의해 베네수엘라는 다시 트리니다드에 40만 배럴의 휘발유를 긴급요청하는 등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유가는 29일(현지시간) 배럴당 33달러(서부텍사스산 중질유)를 넘어섰다. 2년만의 최고가다.
***좌파 정책에 대한 보수층 반발**
베네수엘라는 현재 2007년까지 임기(6년)가 보장된 우고 차베스 대통령(98년 당선, 2000년 재선)의 사임과 조기 재선거를 요구하는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28일째 거리를 휩쓸고 있다. 이미 지난 4월11일 대통령궁으로 시위대가 진입하다가 차베스 대통령 지지자들과 충돌이 발생, 1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날 쿠데타가 일어나 이틀간 차베스 대통령이 실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베네수엘라의 내분은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아 왔다. 차베스의 하야를 주장하는 시위대들의 주장은 주로 차베스 대통령이 "좌파적 정책을 강행하면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AP통신이 29일(현지시간)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올해들어 9개월간 베네수엘라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6%를 기록했으며, 인플레이션은 30%에 달하고, 실업률도 17%로 치솟는 등 극심한 경제불황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시위대들은 납세거부 등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시위대의 주축은 4만명을 넘는 PDVSA 소속 석유노동자들로 이들을 주동하는 세력은 바로 석유회사 고위간부들로 석유회사의 거의 모든 간부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이처럼 격렬하게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배경에는 부패가 있다.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는 규모로 보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회사며, 다섯 번째로 석유를 많이 수출하는 회사다.
기존 경영진은 회사의 현대화를 위한 명분으로 민간자본 등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있었다. 남미에서 만연된 기득권층 부패는 이 과정에 작동된다. 차베스가 공공재정의 확보를 목표로 석유가격의 상승을 주도하기 시작하자 간부진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도 PDVSA의 민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어서 차베스 반대 세력을 은밀히 지지해 왔다.
올 초의 쿠데타도 이 석유회사의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석유수출 수익금을 전액 국고에 귀속하겠다는 차베스 대통령의 결정에 간부진들이 맞서자 차베스는"거대 국영회사를 축소개편하겠다"며 파업에 나선 직원들을 교체해나가는 강경책을 구사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그가 등장하기 전 40년간 베네수엘라를 교대로 통치하며 부정부패와 불평등으로 국민의 원성을 산 우파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주의정당 '민주행동'을 비롯한 야당세력들을 물리치고 국민의 성원을 받아 당선됐다.
차베스는 2천4백만 베네수엘라 국민 가운데 대다수인 80%를 생각하는'민주대통령'을 자처했다. 그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은 20%의 특권층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공약대로 차베스는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예산을 두 배로 늘린 베네수엘라 최초의 대통령이다. 베네수엘라엔 정치범이 한 명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 이것만 보면 차베스 대통령의 통치를 비민주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차베스의 처지는 아이러니하다. 베네수엘라에서는 현재 그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면서 권위주의 체제로 기울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이 국가의 모든 권력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민주적 균형을 강조하는 일부 진영들도 반차베스 시위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차베스가 궁지에 몰리자 기독민주당, 민주행동 등 야권은 물론 40년간의 양당체제 당시 부패로 악명을 떨친 베네수엘라 노동자 총연맹(CTV)도 차베스 퇴진시위에 가세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노동자 총연맹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민주행동 당원들이다.
***과거 부패정권 세력 발호**
지난 4월 쿠데타 당시 국민을 선동했다고 비판받은 모든 주요 신문매체들과 4개의 민영방송채널도 반대파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확대전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초헌법적 전횡을 휘두르다 쫓겨난 쿠데타 당시 임시 대통령 카르모나를 배출한 자본가 단체 페데카마라스도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 외신기자는 이러한 반정부 세력에 대해 "양당체제의 잔당들, 양의 탈을 쓴 늑대들, 그리고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혼란스러워했다.
차베스의 위기가 심각한 것은 전례없이 중산층의 이반이 커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가뜩이나 점점 재산이 줄어든 중산층은 차베스 집권 동안 거의 100%에 이르는 볼리바르화의 평가절하와 국내총생산의 위축으로 상실감이 증폭된 것이다.
이들 중산층은 그동안 달러로 자동차. 컴퓨터를 구입하고 미국에서 휴가를 보낸 계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중남미 전문가들은 "차베스의 경제정책이 국제통화기금(IMF)와 크게 다르지 않고 석유수출로 수백만 달러의 수입을 얻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이 위축되고 범죄와 빈곤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면서 이상과 현실의 한계를 지적했다. 차베스의 위기는 너무 성급한 정책 변화로 중산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초래됐다는 비판이다.
로스엔젤레스타임스에 따르면 차베스는 미 행정부에게도 '눈엣가시'같는 존재로 미움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과거 미국의 믿음직하고 우호적인 석유공급기지였으나 차베스가 4년전 집권한 이래 미 행정부는 '반미' 입장을 보인 차베스의 과격한 좌파적 발언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베스는 탈레반에 대한 미국의 공격에 대해 "9.11테러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범죄'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압박해 석유생산량을 감축하도록 해 유가 상승을 주도하기도 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의 소집을 위해 그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가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또한 절친한 친구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들을 방문했다.
게다가 차베스는 콜럼비아의 좌파 게릴라에 동조하고 카스트로와의 관계 등으로 주변국들을 늘 긴장시켜 왔다.
이 때문에 미 행정부는 지난 4월 민주적으로 선출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실각시킨 쿠데타를 지지함으로써 "중남미가 지난 20년간 추구해온 민주적 전통에 대한 도전"이라는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내년 1.4분기 안에 조기선거를 하자는 요구에 대해 "1999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된 헌법에 따라 내년 8월 국민투표를 개최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미국도 베네수엘라가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사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한 발 물러섰다.
베네수엘라 군은 현재까지 별 동요 없이 차베스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아직도 많은 서민들은 차베스와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으며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50%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베네수엘라에서는 시위가 다시 격화될 경우 지난 4월11일 19명 시민의 사망자를 낸 대통령궁 미라플로레스 사태가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LA타임스는 27일 "베네수엘라 사태가 조기에 진정되지 않는다면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우리나라에게도 유가급등과 함께 정치적 상황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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