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때마다 수십 개의 군소정당들이 저마다 후보명단을 내걸고 득표활동을 벌인다. 길거리 담벼락에 붙은 벽보를 보면서 유권자들이 '저런 정당이 있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정당 숫자가 많다. 이스라엘 언론사의 크네세트 출입기자들조차 정당 이름을 제대로 다 기억 못한다. 정치에 관심 없는 일반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더욱 그렇다.
이스라엘은 대통령이 있지만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 실권은 내각제의 우두머리인 총리에게 있다. 이번 총선거에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탸냐후(리쿠드 당 소속)가 이끄는 극우-종교-보수 연합 세력이 이긴다면, 네탸냐후는 총리 4선 연임에 총리 재임 5회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1996년 1차 총리 재임, 1999년 총선에서 패배해 물러났다가 10년 뒤인 2009년 총선으로 총리에 올랐고, 이어 2013년, 2015년 총선으로 총리 3선 연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받드는 다비드 벤구리온 총리(1948~1953, 1955~1962년 재임)만큼이나 최장수 총리로 장기집권을 하는 셈이다.
네타냐후 장기 집권의 비결
1949년생으로 올해 만 70세인 네탸냐후는 국제사회에 극우 강경파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장기 집권 비결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안으로는 팔레스타인, 특히 팔레스타인 강경세력인 하마스(Hamas)와 갈등 국면을 일으켜 유권자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하면서 보수표 결집을 이끌어 내고, △밖으로는 이스라엘의 최대 동맹국인 미국의 일방적이고 전폭적인 지원 덕이다.
총선거가 치러질 무렵만 되면, 그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평온하던 팔레스타인 쪽과의 긴장 상황이 높아지고 유혈 갈등이 빚어져 사상자를 내곤 한다. 특히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인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Gaza) 지구의 주민들이 많이 희생됐다. 그곳 현지 취재 때 만난 사람들이 네타냐후를 가리켜 "우리의 피를 먹고 사는 괴물"이라 비판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지난 3월 말에도 가자지구에선 10대 청소년 4명이 이스라엘군 총격으로 숨을 거두었고 200여 명이 다쳤다.
네타냐후는 총선이 다가올 때마다 한 번도 빠짐 없이 미국으로 발걸음 한다. 그가 들르는 곳은 워싱턴의 백악관, 미 의회, 그리고 강력한 유대인 로비 집단인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이다. 백악관 정상회담에선 미 대통령과 뜨거운 포옹과 악수를 하고, 미 의회와 AIPAC 연설에선 잇달아 더 큰 지지의 박수를 이끌어낸다. 네타냐후의 측근 전략팀은 그런 모습들을 세심하게 연출함으로써 총선거에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려 애쓴다.
미국과의 관계에 관한 한 네타냐후는 운이 좋은 편이다.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네타냐후와 갈등을 빚으며 찬바람이 돌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던 오바마 전임 대통령과는 달리, 트럼프는 일방적으로 네타냐후를 돕는 모습이다.
이스라엘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유네스코(UNESCO)에서 탈퇴한 데 이어, 국제사회의 세찬 비판을 무시하면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던 트럼프가 아닌가? 이 모두 네타냐후가 간절히 바라는 바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장기 집권에 큰 도움을 주는 트럼프가 더없이 고마울 것이다.
4.9 총선이 살얼음판인 까닭
문제는 이번 4.9 총선이 살얼음판이란 점이다. 이번 총선에서 네타냐후의 장기 집권에 도전하는 인물은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2011∼2015년)을 지낸 베니 간츠. 여러 여론 조사 지표는 네타냐후의 집권당인 리쿠드 당과 베니 간츠의 중도정당연합 '청과 백'(Blue and White)이 거의 같은 지지율을 보여 왔다.
투표를 나흘 앞둔 4월 5일, 선거법상 허락된 마지막 사전 여론조사 결과도 거의 같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크네세트 120석 의석 가운데 리쿠드 당이 28석, '청과 백'이 28석).
네타냐후의 지지율이 예전만큼 못한 데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깔려 있다. △장기 집권의 피로감 △소득 분배와 세금 등 경제 정책에 대한 중산층의 불만 △이스라엘 검찰이 기소하겠다고 이미 공식 발표한 개인적인 부패 의혹 △그의 성질 사나운 부인이 총리 공관 근무자들에게 저지른 갑질 △예루살렘 공원에 개를 데리고 갔다가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 등 그의 아들이 보여 온 비시민적 행동 등등 여기에 모두 기록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3월 조사에서는 중도정당연합 '청과 백'이 지지율에서 리쿠드보다 약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었다. 4월의 마지막 리서치에서 지지율이 백중세를 보인 것은 네타냐후 쪽에서 유권자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하는 한편으로 보수층 결집에 그야말로 온 힘을 쏟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마디로 네타냐후가 총선이 있을 때마다 써먹던 '솜씨'를 힘껏 발휘했다고 보여진다.
"정착촌, 이스라엘 영토로 합친다"
그런 '솜씨' 가운데 하나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들을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겠다"는 폭탄 선언이다. 이는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의 기본 원칙이라 할 '땅과 평화의 교환'(팔레스타인에게 땅을 돌려주고 이스라엘은 평화를 얻는다)의 원칙을 깨뜨리는 막말에 다름 아니다. 국제사회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른바 6일전쟁) 바로 뒤 점령지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에 바탕해서 유대인 정착촌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서안지구의 다수 주민은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문제는 그곳에 정착촌을 일구고 사는 유대인 정착민들이다. 미국 CIA의 '월드 팩트북' 최근 자료에 따르면, 유대인 정착민은 서안지구의 여러 정착촌에 39만명, 원래 시리아 영토였으나 이스라엘군이 1967년 이래 점령 중인 골란고원에 2만명, 동예루살렘에 20만명, 모두 합하면 60만명에 이른다.
정착민들은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들의 지지기반이다. 중동 평화의 큰 분수령이었던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당시에는 10만 명이었으나, 그 뒤 정착민의 수는 6배 넘게 늘어났다. 예전에 비해 오늘의 유대인 정착민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이스라엘 강경 우파들이 앞장선 결과로 분석된다. 네타냐후가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겠다고 한 폭탄선언은 4.9총선을 앞두고 보수우파 유권자들을 결속시키면서 지지율을 높이려는 발버둥이라 풀이된다.
유대인 다수도 정착민에 비호감
하지만 그런 네타냐후의 폭탄 선언이 얼마만큼의 약발을 거둘지는 알 수 없다. 60만 정착민들이 네타냐후에게 지지표를 던지는 것만을 생각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다수 유권자들이 보는 정착민에 대한 눈길은 호감보다는 비호감 쪽이다. 여러 조사 결과는 정착촌이 중동 평화의 걸림돌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10명 가운데 6~7명 이상임을 보여준다.
네타냐후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중도정치연합 '청과 백'의 지도자 간츠는 총선이 두 달 뒤로 확정된 시점인 지난 2월 "서안지구에서의 정착촌 철수를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착민들을 화나게 했을 간츠의 그런 발언도 다가올 총선 지지율에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 아래였을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 우린 관심 없다"
이스라엘 총선을 바라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눈길은 어떠할까. 물론 보수강경파인 네타냐후의 정치적 패배를 바랄 것이다. 정착촌 철거 고려를 언급했던 간츠가 총리에 오른다면 지금의 답답한 족쇄에서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까. 팔레스타인의 한 인권 운동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내게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그들만의 리그, 우린 관심 없다"
네타냐후나 간츠, 그 누가 총리에 오르든, 이스라엘의 인권 탄압과 지배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다. 간츠가 "서안지구에서의 정착촌 철수를 고려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전면 철수 쪽은 물론 아니다.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보수강경파가 활개 치는 이스라엘 정치지형에서 중도좌파가 지닌 힘의 한계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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