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8위(자산총액 기준)인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17일 별세했다.
정부는 18일 고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고인이 항공, 육상, 해운 등 교통물류산업의 기반구축으로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한 공로를 높게 평가해서다. 한 시대를 이끌어온 재계 거목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조중훈 회장의 별세는 거대그룹의 순수 국내 창업1세대로서는 마지막 별세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정치권에서 '3김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면, 재계 또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셈이다.
***경영능력과 후계상속은 별개지사?**
창업 1세대가 세운 재벌그룹들은 IMF사태를 전후해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그룹이 공중분해되거나 소그룹으로 분할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외환위기 이후 30대 그룹 중 절반이 넘는 16개 그룹이 사라졌다. 재계 3위였던 대우그룹이 99년 공중분해됐고, 1,2위를 다투던 현대그룹도 지난 2000년 세 토막났다. 살아남은 그룹들도 시장의 요구에 따라 부채를 줄이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이처럼 큰 변화를 겪으면서 매출 등 수익성을 무시한 '외형키우기'와, 소수지분에 의한 그룹 지배 등 창업 1세대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상당히 제거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요즘 들어 보이는 모습은 이같은 기대에 상당히 미흡한 게 아니냐는 게 지배적 평가다. 정운찬 서울대총장이 지난달초 외환위기 이후 5년을 정리하는 학술대회에서 "외환보유고등 거시경제지표는 달라졌지만 외환위기를 가져왔던 전근대적 기업지배구조 등 미시구조적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한대로이다.
한진그룹도 이러한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닌듯 싶다. 한진그룹은 4개소그룹으로 나뉘어 4명의 아들이 독자경영을 해 온 지 이미 오래됐다. 항공, 중공업, 해운, 금융 등 4개 부문으로의 분할구도는 89년부터 가시화했다. 92년부터 장남인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53)과 조남호 한진중공업 부회장(51), 조수호 한진해운 부회장(48), 조정호 메리츠 증권 부회장(44)이 각 부문을 맡고 있다.
이들 2세들은 조 전 회장의 뜻에 따라 각 부문별 회사에서 오랫동안 실무경험을 쌓은 뒤 경영 책임자로 올라섰으며 심이택 대한항공 사장, 이우식 한진중공업 사장, 김찬길 한진해운 사장 등 전문경영인을 두고 '오너-전문경영인 양두 체제'를 구축했다.
한진그룹은 그러나 IMF사태후 잇단 악재로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됐다. 99년 4월 항공사고가 빈발하면서 조중훈 회장이 대한항공 회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해 한진그룹 회장직으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물러섰다. 장남인 조양호 당시 대한항공 사장도 사장직에서 물러나 전경련, 국제업무 등 대외업무만을 담당하는 대한항공 회장직을 맡게 됐다.
더욱이 지난 99년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해 장남 양호, 3남 수호씨 등 사주 일가 3명이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돼 조양호 회장이 구속되는 등 시련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9.11사태로 항공기 이용고객이 격감하자 한진그룹의 간판 기업인 대한항공은 정부로부터 수천억원대의 거액을 긴급지원받아 간신히 파산 위기를 면하기도 했다.
이같은 일련의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이들중 누구도 책임지겠다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다. 조중훈 회장의 별세후 한진그룹은 이들 4명의 2세에게 자동승계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외관만 바뀌었을 뿐 속내를 들여다보면 '총수의 황제경영'은 여전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IMF위기가 지나자 다시 오너지분이 늘고 있다**
과연 한진그룹만 그러한가.
장하성 고대 교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벌의 선의만으로 지배구조가 투명해지기를 기대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도 깊다"고 지적하곤 한다. 재벌에게는 개혁의 칼날이 무뎌지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관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대표적 예가 최근 두산그룹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IMF사태후 한때 기업구조조정의 대명사로 불리던 두산그룹은 최근 오너일가의 편법증여를 통해 '지분 늘리기'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사고 있다.
최근 참여연대의 문제제기후 금융감독원의 조사 착수로 두산그룹은 신뢰도와 관련, 큰 위기를 맞고 있다.
IMF사태후 두산그룹은 국내외 투자가들로부터 구조조정 노력이 호평을 받으면서 앞다퉈 주식을 사들이는 바람에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은 15.68%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편법적 BW(전환사채) 발행으로 인해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현재의 행사가격으로 지배주주 일가가 신주인수권을 행사하더라도, 지배주주 일가의 지분율은 15.68%에서 39.09%로 대폭 상승하는 반면, 소액주주의 지분율은 40.28%에서 29.09%로 대폭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동안 오너그룹에서 시장참여자들에게 이동해온 지분율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한국판 '백 투 더 퓨쳐'다.
두산그룹의 오너인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같은 비판여론에 대해 최근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사외이사 확대, 지배구조 개선 등의 요구는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또하나의 '규제'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거액을 주고 미국의 맥킨지사로부터 컨설팅을 받아 재벌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기업 구조조정을 단행했을 때만 해도 스스로 '자랑거리'로 내세웠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규제'로 전락한 셈이다.
이를 지켜본 한 대형 외국계투자펀드의 책임자는 "IMF사태후 벼랑끝에서 올바른 길을 택함으로써 그후 가장 주가가 많이 올랐던 두산의 오너가 지금 와서 이렇게 말을 바꾸다니 씁쓸함을 감출 길 없다"며 "역시 한국의 재벌은 강적"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재계 곳곳에서 읽히는 '앙시앙레짐'**
두산처럼 한 때 IMF 구조조정 모범기업으로 꼽히던 한화그룹의 최근 행적도 비슷한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지난 9월26일 대한생명이라는 월척을 인수하며 "대한생명을 내·외국인 1명씩 두 명의 최고 경영진에 의한 독립경영 체제로 끌고 가겠다"고 말했던 한화그룹의 김승연회장은 최근 말을 뒤집었다. 한화그룹에 따르면 김회장은 지난 5일 대생 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12월초 대한생명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아 직접 경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는 애당초 "대한생명은 사업구조가 제조업 위주인 한화그룹과는 별도의 독립적인 문화가 필요한만큼 대한생명에는 기존의 한화그룹 인력 가운데 연구소 인력과 인수합병(M&A) 전문가 등 극소수만 보내겠다"던 입장과 확연히 다른 것이어서, 김승연 회장이 '황제경영'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게 아니냐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한생명 인수에 따른 특혜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독립경영'을 약속했다가 여론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책임경영'을 명분으로 '황제경영'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대한생명을 한화그룹이 인수하는 것 자체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았다.
한화그룹은 지난해 7천3백22억원이라는 사상 최대규모의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경영이 부실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화그룹은 계열사들이 서로 순환출자하여 부채비율을 낮추는 분식회계까지 저지르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의 민간위원들도 한화의 대생 인수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한화는 대다수 그룹들이 큰 흑자를 내는 것과는 달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난 3.4분기까지 3백억원이 넘는 적자를 내며 재벌그룹 중 경영실적이 매우 나쁜 곳으로 나타났다. 재계 일각에서 "정권이 바뀌면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를 짚고 넘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조중훈 회장의 별세로 한 시대가 끝났다. 하지만 최근 재계 기류를 보면 '앙시앙레짐' 기류가 곳곳에서 읽힌다. 결코 한 시대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오너체제가 상속되는 한, 한 자연인의 죽음으로 세대가 바뀌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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