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두 곳에서 치러진 4.3 국회의원 재보선은 여야 어느 쪽에도 정국 주도권을 내주지 않은 1대1 무승부로 끝났다.
자유한국당이 지역구를 내준 적 없는 통영‧고성에선 예상대로 정점식 후보가 낙승을 거두었고, 진보정치의 상징인 창원성산에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단일후보인 여영국 후보가 신승을 거둬 고(故) 노회찬 의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원래 한국당과 정의당 차지였던 지역에서 양당의 방어전이 성공한 셈이다. 자당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한 더불어민주당도 창원성산 단일후보의 승리로 위안거리를 얻었다.
예년 재보선보다 15~19%포인트 가량 높은 투표율, 창원성산에서 한국당의 선전은 내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영남권 보수층이 한국당으로 빠르게 결집하는 흐름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당, 총선 겨냥 대여 공세 고삐 죌 듯
정국 향배를 놓고 맞붙은 선거에서 승패가 분명하게 갈리지 않아 각종 현안을 둘러싼 여야 간 힘겨루기가 지속될 전망이다.
당장 인사청문 후폭풍 정국 대치가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가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재송부 요청서를 보낸 데 대해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협치 거부"라며 반발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 전에 김연철 통일부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등에 대한 임명을 마무리할 예정이어서 이들에 대한 지명 철회를 요구하는 야당의 반발이 뒤따를 전망이다.
특히 야당의 화살이 조국 민정수석과 조현옥 인사수석까지 향하는 데다 여권 내부에서도 청와대의 연이은 말 실수에 불만이 제기되는 점도 문 대통령에게는 부담이다.
현재까지 두 수석에 대한 교체 움직임이 감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남권 민심이 한국당의 상승세로 드러난 선거를 거친 만큼, 인사 정국 타개 카드로 청와대 쇄신책이 검토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황교안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재보선을 계기로 증폭된 한국당의 대여 공세는 내년 총선까지 겨냥한 포석이다. 창원성산 뒤집기에는 실패했지만, 강경 보수 노선을 바탕으로 대여 투쟁을 강조하는 '황교안 간판'의 효력을 일부 확인한 한국당의 공세는 더욱 거칠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제도 개정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처리를 위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추진은 갈등의 핵이다. 총선 룰을 일방적으로 개정한 전례가 없다는 한국당의 반발 속에 민주당과 바른미래당의 공수처 법안 협상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3월 국회에서 사실상 무산된 패스트트랙 지정은 4월 국회에서도 전망이 밝지 않다.
창원성산에서 1석을 추가한 정의당이 민주평화당과 공동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경우, 선거제도와 공수처 법안 협상은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교섭단체 구성 추진 의사를 밝힌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이제 교착상태에 빠진 선거제 개혁을 실현하는 데 마지막 노력을 다하겠다"며 "패스트트랙을 통해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각종 개혁법안 처리에선 진보 성향의 제4 교섭단체 재구성이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보수정당인 바른미래당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상쇄하는 효과와 맞물린다.
여권은 북미 협상 불씨 살리기 등 한반도 평화 이슈에선 변함없는 국정기조를 이어가겠지만, 경제 및 민생 분야에선 결집하는 보수층을 의식해 우클릭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10개월 만에 반전된 영남 민심, 총선에선?
여야 공히 불안한 성적표를 받아든 4.3 재보선을 신호탄으로 정치권의 총선 경쟁도 시작됐다.
이번 재보선은 총선을 1년 앞두고 영남권 민심을 드러냈다. 표면적으로는 무승부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국당 쪽으로 무게추가 기운다. 2016년 촛불 정국과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그해 치러진 대선 결과를 떠올리면 현재의 영남권 민심의 변화는 상전벽해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때에도 '초토화', '쓰나미'란 표현이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 민심을 대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광역단체장 3곳을 석권하고, 39곳 기초단체 가운데 25곳을 쓸어갔다.
텃밭에서 궤멸적인 성적표를 받았던 한국당이 불과 10개월 만에 전열 정비에 성공하고 반격 채비를 갖춘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전반적인 지지율 하락세가 완연한 가운데, 한국당은 보수의 근거지인 영남권을 발판으로 총선 전략을 다듬어 갈 수 있게 됐다.
창원성산에만 후보를 낸 바른미래당이 3.57% 득표율에 그쳐 보수 정당 사이의 경쟁구도는 확연히 한국당으로 무게중심이 쏠렸음을 보여줬다.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바른미래당은 영남권을 중심으로 원심력이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보수 정계개편이 발생하면 한국당과 민주당의 1대1 구도로 총선이 치러질 수도 있다.
재보선 결과가 나온 뒤 황 대표가 낸 메시지는 전투적이다. 그는 "(통영고성에서) 압도적으로 이겼고, (창원성산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까지 박빙 승부를 했다"며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국민들이 주신 지지를 바탕으로 이 정부의 폭정을 막아내겠다"며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에 반해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한껏 자세를 낮춘 메시지를 냈다. 그는 "재보궐 선거의 민심을 받들어 민생 안정과 경제 활성화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 한 의원은 "영남 재보선은 내년 총선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라며 "영남권 보수 결집 추세를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전 상황으로 빠르게 되돌아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다만 황교안 체제의 한국당이 표방하는 대여 투쟁과 이념 보수 노선이 보수 밀집지역을 벗어난 곳에서도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수도권 등 전국단위 선거를 결정짓는 요지에선 여권을 향한 추상적 색깔 공세가 오히려 확장성의 한계에 갇힐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지지층 대결인 재보선과 표심을 정하지 못한 '스윙보터'를 흡수해야 승리하는 총선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황 대표가 이번 선거를 "정부에 대한 심판"이라고 규정한 대목은 지속적으로 강경 노선을 고수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2대0 완승을 거뒀다면 확장성 논란과 리더십 논란을 평정했겠지만, 기대보다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든 황 대표의 앞날이 순탄할지는 재보선 이후 한국당 지지율 추이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창원성산 직접 출마 권유를 외면하고 지원 유세에 그친 황 대표의 정치적 결단력도 504표 차 석패로 인해 도마에 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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