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의 대표적인 비관론자 스티븐 로치가 미국 경제가 '제2의 일본'이 될 것이라는 쇼킹한 전망을 내놓아 경제전문가들을 아연실색케 하고 있다.
이같은 전망은 얼마 전 유럽경제의 견인차인 독일이 일본형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 위험이 크다는 경고에 이어 나온 것으로, 자칫 잘못하면 일본에 이어 미국, 독일 등 세계 3대 경제주축국이 모두 디플레이션에 빠져들면서 전세계 경제계가 공황적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여서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미국경제는 더블딥 단계 지나 일본형 장기불황 국면에 진입**
모건 스탠리의 글로벌 연구센터 소장인 스티븐 로치는 그동안 미국 경제가 잠시 회복세를 보였다가 다시 경기침체에 빠지는 '더블딥'(W자형 경기침체) 현상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는 그러나 22일자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비관론을 내놓았다. 미국의 경제가 재하강국면에 진입을 할 뿐 아니라 일본과 같은 'L자형 장기불황'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장기침체를 막는 일이야말로 현 미국 정치지도자들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가장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로치에 따르면 미국경제는 이미 디플레이션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미국은 일본과 틀리며 일본경제의 무기력과 비교하면 미국경제는 더 유연성을 갖고 있고 역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이미 디플레를 맞고 있으며 앞으로 그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나스닥지수가 5000고지를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스닥시장의 붕괴에 대해 믿지 않았듯 현재의 경기확장세의 기초가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증시침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가 그런대로 버티는 것은 유례없는 주택경기 거품과 이에 의지한 소비거품 덕분이다. 로치는 그러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최근의 주택경기 호황과 소비자들의 여전한 소비욕이 미국경제를 계속 지탱케 할 것이라고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동안 미국 경제의 버팀목 구실을 해온 주택신축은 3개월째 급격히 줄어들고 실업률이 다시 높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로치에 따르면 주택경기의 거품이야말로 경제거품의 핵심으로, 지난 97년이래 지금까지 미국 주택값은 27%나 올랐으며 이는 같은 기간 주택임대료 상승률의 3배나 된다.
미국내 소비거품의 붕괴현상이 어떻게 촉발될 것인가에 대해 로치는 이라크 발발에 따른 유가 급등, 사무직의 대량감원 또는 부동산시장 거품의 증발이 그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이중 한가지만 심화되더라고 미국경제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같은 우려를 하는 이는 로치뿐아 아니다. UBS워버그의 모리 해리스 수석이코노미스트도 최근 "미국의 향후 경제 전망을 어둡게 본다"면서 "4분기 경제성장률을 기존의 3.0%에서 2.5%로 하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중국과 유럽도 디플레이션 위기에 직면**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세계 주요국가들에도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로치는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주요국가들이 디플레현상을 이미 겪고 있으며, 중국 등지에서 값싼 원자재를 도입해 만든 미국상품의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만큼 미국내 디플레 압력은 가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C도 올해 성장률 추정치를 네 번이나 낮춰 이번 분기에 0.3~0.7% 정도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EC는 2분기에도 0.3% 성장하는 데 그친 바 있다.
로치는 "EU지역의 희망과 기대가 이제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있다"며 "그 동안 독자성장이 기대됐던 유럽 지역이 이제는 이전보다 더 미국 주도의 국제교역 사이클에 의존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세계최대 성장지대인 중국도 심각한 디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은 국내기업을 포함한 전세계 기업의 각축장이다. 특히 중국이 지난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기업들은 죽기 살기식 가격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도 금명간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봉착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독일, 이미 일본형 장기불황에 진입**
이 가운데 가장 상황이 심각한 곳은 미국, 일본에 이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인 독일이다.
EU 최대 경제대국으로 유럽경제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독일은 일본과 같은 장기 디플레이션에 빠질 위험이 가장 크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바커는 18일 "독일과 일본은 최종 판매 감소, 통화 통제 능력의 상실, 경기 부양 능력 부재, 지나친 간접 금융 의존, 인구 고령화 등의 공통점이 있다"며 이는 독일이 지난 10년 이상 장기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과 비슷한 디플레이션 압력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인 최종 판매(국내 총생산에서 재고와 순무역을 제외한 나머지)가 선진국들 가운데 독일과 일본만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 독일의 경우 미국 등과의 무역 거래에 경제성장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중앙은행은 최근 "지난해부터 시작된 경기후퇴(리세션) 국면에서 빨리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올 경제성장률이 당초 예상치(1.20%)보다 낮은 0.75%에 머물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의 경제전문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지난 20일자에서 "세계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더블딥(회복되던 경기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디플레이션"이라고 경고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을 초래하는 주범으로 꼽은 것은 '상품가격 하락'과 '자산가치 하락'이다. 유럽과 중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지역은 지난 99년 1월 유로화가 출범하면서 개방과 함께 시장이 유로회원국 전체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가격인하 경쟁을 벌여 물가 하락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
***금리 낮추고 돈 푼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한 때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으로 불리던 미국도 지금은 세계화의 부메랑에 노출돼 있다. 요컨대 생산단가가 보다 저렴한 제품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미국기업들이 생산위축의 늪에 빠져드는 디플레이션 발생 압력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로치는 "디플레이션은 미국 경제에 중대한 위험"이라면서 "이로 인해 지난 90년대 일본이 장기불황을 겪었던 것처럼 미국 경제도 '이중 침체'가 아닌 '삼중, 사중 침체 '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로치는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는 한번에 0.5~0.75%포인트에 달하는 급격한 금리 인하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금리를 추가로 대폭 인하해 경기와 물가를 부추길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도 각국 중앙은행이 보다 팽창적인 재정과 통화정책을 펼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24일로 예정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 추가 인하 조치가 취해질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다. 미연준에서는 금리 인하를 단행할 만큼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다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은 '실탄을 아껴야 할 때'라는 입장이다.
요컨대 작금의 디플레이션은 금리를 낮추고 돈을 더 푼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도리어 지금은 과잉유동성으로 부동산 등의 거품이 생겨나고 있는만큼, 돈을 더 푸는 것보다는 시중에 풀려있는 돈들이 몰려갈 수 있는 '신규 대형투자처'를 만드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 관측이다.
과연 '월가의 불길한 예언가'로 불리는 로치의 예언대로 미국경제를 신호탄으로 세계경제는 악몽의 디플레이션 시대를 맞게 될 것인가. 세계가 지금 지구촌에 넘쳐흐르는 과잉자본들이 몰려갈 수 있는 '동아시아 뉴딜 플랜' 등 초대형 신규투자처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하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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