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8년 7월부터 '플라스틱 프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플라스틱과 비닐 줄이기를 실천해왔다. 이 글을 쓰는 3월 17일 현재 237일째로, 플라스틱을 줄여온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플라스틱 소비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부끄럽다. 내가 한 일은 그저 '내가 쓴 플라스틱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내가 쓰는 플라스틱을 기록해보자"
나는 여러 문화예술인들과 협동조합을 만들고,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안 가게들을 설득하여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자 어떤 공모 사업에 응했다가 2018년 7월 떨어졌다. 그때 생각했다. "공모에 떨어졌다고 안 할 수 있나." 그저 나부터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일단 페이스북에 내가 쓰는 플라스틱을 기록하자. 플라스틱 프리를 외칠 게 아니라, 그냥 하자.'
10개도 되고 20개도 되었다. 플라스틱이나 비닐을 쓰게 되면 무조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기록했고 내 페이스북은 자질구레한 쓰레기에 대한 기록이 넘치고 넘쳐났다. 아래는 어느 날의 기록이다.
1) 원두를 사무실에 갖고 가는 바람에 집안에 커피가 없다. 믹스 커피 하나를 깠다.
2) 어제 친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사준(이 나이에 무슨…. 빵 사주는 핑계 치곤 그럴싸하다) 바게트를 먹었다. 빵 봉지는 비닐 코팅한 완전한 비닐 쓰레기.
3) 간식. 지난번에 만들었던 약밥이 남아있었네. 데워서 냠냠. 비닐 랩 1개.
4) 울 집 고양이 나무 배설물 모은 봉투.
5) 부엌 쓰레기봉투. 그동안 내용물만 규격봉투에 버리다가 오늘은 비닐까지 버린다.
6) 막내가 좋아하는 콩죽. 먹다 남겨둔 것을 내가 저녁 디저트로 먹었다. 비닐 커버와 플라스틱통. 2개.
몰라서 안 하는가?
플라스틱 컵이 땅속에서 분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00년이다. 핸드폰은 1000년, 양말은 6개월, 담배꽁초는 2년이다. 한국에서 한 해 동안 약 150억 장의 1회용 비닐봉투를 사용하고, 하루 약 4100만 장의 1회용 비닐봉투가 사용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놀라겠지만, 곧장 비닐봉투를 줄이는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해안가에 가득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들, 태평양에 만들어진 한반도의 5배 크기의 플라스틱섬, 거의 모든 생수에 들어가 있다는 미세 플라스틱, 플라스틱을 먹이로 오인해 죽어가는 바닷생물과 새들, 플라스틱 쓰레기 5100톤을 필리핀 민다나오섬에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수출했다 세계적으로 망신을 산 일 등등. 이걸 몰라서 플라스틱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진리가 차고도 넘치고, 세상을 밝게 할 정책과 대안과 방안들이 차고도 넘친다.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부족하여 세상이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것은 아니다. 차고도 넘치는 진리, 부정의를 벗겨낼 다양한 정책은 이상이다. 이상이 현실이라는 땅으로 내려와야만 '정의와 평등과 민주'라는 꽃이 핀다. 이 이상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은 실천이다. 새삼 새삼 느끼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한걸음의 실천, 행동이다.
기록의 힘, 일상의 성찰
사실 나도 '플라스틱 프리 선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지구가 아프고, 우리가 먹는 물에 미세 플라스틱이 있다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하는 게 억지로 하는 금욕 생활처럼 돼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소소하게 기꺼이 할 수 있는 만큼 줄여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플라스틱 문제를 개인에게 돌려서는 안 되지만 개인의 자각과 실천이란 밑거름이 있어야 사회적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원칙으로 시작했다. 기록을 하다 보니, 자세히 보이고, 내가 플라스틱을 막 쓰고 있음이 보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플라스틱을 줄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일상의 어떤 행동을 할 때 성찰하게 된다. 커피믹스를 먹을 때, 발생하는 비닐 쓰레기 1건이 내게 구체적으로 포착되기 때문이다. 장볼 때 채소가게 아줌마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비닐봉투 안에 담긴 콩나물을 또다시 검정비닐에 담을 때, 아차 하며 교훈을 얻는다.
'소비할 때 한 눈 팔다 간 플라스틱 덤탱이 쓴다.' 다음엔 미리 비닐봉투에 담지 말라고 말하고, 미리 빨대 주지 말라하고, 빵을 사러갈 때 큰 통을 들고 가게 된다. 점차 익숙해지면서 '플라스틱 사용 0'인 날이 될 때는 무척 기쁘다.
성찰에서 '생각하기'로
나는 파주시에서 지역신문을 만드는 일을 한다. 신문을 우편 발송하기 위해 풀칠을 하다가 생각하게 된다. 딱풀 용기를 재활용하면 어떨까? 딱풀 통을 가져오면 큰 폭의 할인을 해준다면 사람들이 모아서 재활용하지 않을까? 두 개의 풀 뚜껑을 포장한 물풀. 쓸데없이 여분의 뚜껑을 만들면서 플라스틱 쓰레기만 늘렸다. 뚜껑을 잘 닫아서 보관하면 충분한데, 왜 여분의 물풀뚜껑을 만든다면서 자원을 낭비했을까? 이런걸 모니터링해서 제조사에 알리고 플라스틱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장례식장에 갔다오는 날은 플라스틱이 급격히 늘어난다. 장례식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용기가 플라스틱이고, 더구나 탁자 위에는 비닐이 덮여있어, 음식물 쓰레기를 분류하지도 않은 채로 손님이 자리를 뜨면 그 비닐을 묶어서 그냥 버린다. 장례식장에서 쓰는 일회용품이 전체 일회용품 쓰레기의 20%나 된다 한다.
이걸 막는 조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제주의 한 장례식장에선 모든 식기가 스테인리스그릇이었고 식기 세척기를 이용하여 장례비용을 20%나 줄였다 한다.
그래, 하면 되는 거야. 사람들은 편리에 젖어서, 또는 관행에 젖어서 "그거 어려울 걸", "그거 안 될 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1회용품 안 쓰는 곳이 진짜 있다.
'과대 포장 신고센터'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떤가? 이건 공익에 도움되고, 일자리도 만들어지는 것일 텐데…. 돈을 주고 무엇을 살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물건들은 거의 100%로 비닐로 포장되어 있다. 셀프 주유소에 1회용 비닐장갑이 주렁주렁 바람에 흔들린다. 기름 묻힐 가능성이 극히 낮은데도, 서비스 차원인가? 차라리 목장갑을 비치하면 어떨까? 분실 걱정이 된다면 주유기 옆에 매달아도 좋지 않을까? 이것도 정책으로 제안해야겠다.
기록이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일상에 관심을 가지니 자연스레 해결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의 씨앗들이 실천이 되고, 규칙이 되고, 조례가 되고, 센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의 힘, 유치원 아이들의 청와대 청원
2018년 11월 유치원 아이들이 청와대에 국민 청원을 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서울) 살레시오성미유치원 어린이들입니다. 저희가 엄마, 아빠랑 물건을 사러 갔어요. 그런데 비닐에 담긴 물건-과자, 고기, 라면, 젤리, 생선, 과일, 초콜렛, 장난감, 옷…. 플라스틱에 담긴 물건-음료수, 물, 과자, 계란, 컵…. 아이스크림 숟가락 등 저희는 지구를 지키는 물건을 사고 싶은데 모두 비닐과 플라스틱에 담겨 있어서 지구를 지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희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지구를 아프게 하는 비닐과 플라스틱을 만들지도, 사지도 않는 진짜 법을 만들어 주세요. 물건을 만드는 공장들도 지구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더 이상 미루지 말아주세요. 지구가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그리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지구를 지키고, 법을 지키는 교육을 받게 해서 진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사실 플라스틱을 안 쓰려 해도 안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충분히 줄일 제도를 도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태국에선 작년 8월 1일부터 시장에서 비닐봉투 사용을 금지하고, 2030년까지 폐플라스틱 100% 재활용 목표를 세웠다. 유럽연합 의회는 2010년 유럽연합 포장 지침 개정안을 만들어 비닐봉투 사용량을 2019년까지 연간 1인당 90개로 줄이기로 했다(2010년 기준 EU회원국 1인당 비닐봉투 사용량 평균 198개, 한국은 205년 기준 420장).
우리도 포장 지침을 만들고 법제화해야 한다. 유치원 아이들도 깨닫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문제로 못 느낄 뿐이다. 문제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플라스틱에 둔감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이제는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한 일은 부끄럽게도 그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고. 그래서 이제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손을 내민다. "내가 쓰는 플라스틱을 기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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