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레임덕을 상징하는 사건이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청와대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9급 조리사가 엄중한 청와대 보안규정을 무시하고 버젓이 외부출판사를 통해 '청와대 사람들은 무얼 먹을까'라는 책을 펴 낸 것이다.
더욱이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의 4급 행정관이 이 책을 기획했으며, 그가 연말 대선의 강력한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 의원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사표를 냈다는 사실이 겹쳐지면서 '청와대 기강'이 또다시 도마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측에서는 "레임덕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보안의식이 희박한 일부 청와대 직원들의 철없는 행위"라며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애를 썼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책의 기획자인 시민사회비서관실 김운형씨는 영화배우 오정해씨의 남편으로 아리랑 TV 등에서 일하는 등 문화기획 분야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이번에도 책의 기획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을 보더라도 이번 사건을 '정치적 음모'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측에서는 "일개 회사에서도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책으로 쓴다면 윗사람들과 상의하는 것이 기본 상식에 속하는 게 아니냐"면서 "자신의 직속상관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외부 출판사를 통해 청와대 내부 이야기를 책으로 낸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형사적 조치를 취하는 등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가 이처럼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임기 말에 유사 사건이 재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이 책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자 즉각 전지영씨와 김운형씨에 대해 사표를 수리했다. 공무상 기밀 누설을 금지한 청와대복무규정과 형법 제127조를 위반했다는 이유다.
청와대측에서는 "이 책에는 2급 비밀인 청와대 보안시설과 3급 비밀인 을지훈련 관련사항, 청와대 경비 인원, 행사 준비사항 등이 포함돼 있다"면서 "이는 경호에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책의 기획자 김운형씨는 "외국인에게 한국의 식사문화를 알리기 위해 책을 기획했는데 의도와 달리 파문이 커져 미안하게 생각한다"면서 "따로 기밀을 수집, 누설한 게 아니고 청와대 인터넷에 뜬 내용을 주로 소개했다"고 말했지만 청와대측에서는 이를 전면 부인했다.
또한 청와대측은 "김대중 대통령은 식사 후에는 꼭 삶은 밤.떡.고구마 등을 후식으로 먹는다, 이희호 여사가 뻥튀기를 좋아한다, 일년 내내 옥수수를 먹는다, 매 식단마다 제비집 스프가 올라온다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 무책임하게 적혀있다"며 불쾌해 하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전지영씨는 김영삼 전대통령 식생활도 언급했는데, 당시에 전씨는 공보실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해 김전대통령 식생활을 알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반박했다.
전씨는 지난 96년 일용직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97년 지방기자실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했으나 자신이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는 전공을 살리기 위해 보직전보를 요청, 98년부터 9급 조리원으로 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청와대측은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직원들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격"이라며 인간적인 배신감마저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청와대 직원들의 기강과 보안체계가 너무 허술한 것이 아닌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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